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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Nov 04. 2018

근황 이야기

우울증 치료 8개월간의 후기


안녕하세요?


오랫동안 브런치에 들어오지 못하다가 용기내어(?) 들어왔습니다.

그동안 댓글 달아주신 분들께는 답변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브런치에 글을 쓰는게 유독 어려웠던 이유는 우울증이 일보전진 이보후퇴하는 식으로 계속 되었기 때문이었어요. 이 브런치의 목적이 우울증에서 회복되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었는데 정작 글 쓰는 사람 본인이 우울증을 이겨내지 못하는 상태라면... 에... 그렇죠.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건 올해 3월부터 시작한 프로젝트였으니 대략 8개월 정도 되었네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80% 정도 성공했습니다. 



성공했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

잠깐 기분이 괜찮아진 걸 갖고 우울증에서 회복되었다고 착각하는 것 아니냐!!!


이렇게 물으실 수 있을 것 같네요.


제가 우울증에서 상당부분 회복되었다는 증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셀카 사진이 달라졌어요.


저는 올해 3월, 우울증을 없애보려고 결심한 이후 거의 매일 셀카를 찍었습니다. 못생기고 뚱뚱하고 늙어보이고 어둡고 추하게 보이는 제 모습이라도 외면하지 않고 어떻게든 좋아해보려고 셀카를 찍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제가 보기에도 너무 추해서 사진이 든 갤러리를 열어보는 것 자체가 정신적인 충격이 심할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찍었는데...... 이럴수가. 지금 사진과 그때 사진을 비교해보면 같은 사람으로 안 보일 정도입니다. 올해 3월의 제 사진은 한 7년쯤 후의 저라고 해도 믿을만큼 지금보다 훨씬 늙어보입니다.

(혹시 나중에 여러분과 만날 기회가 있다면 확인시켜드리겠어요...)


체중은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과체중의 경계선에 있고, 우울증에서 회복될수록 현재의 저 자신에 대한 근거없는 만족감이 자꾸 커져서 다이어트의 의욕 자체가 사라진 안타까운 상태라...ㅠ 살이 빠져서 얼굴이 변한 건 분명히 아니에요. 처음에 셀카 찍던 앱과 지금 셀카 찍는 앱도 똑같으니 앱 탓도 아니겠죠.ㅋㅋ 


사실 장기간 누적된 우울감과 불행한 기분이 이렇게 사람을 못생기게 만든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고 많이 놀랐네요. 여러분, 거울을 보고 성형을 생각하기 전에 우울증을 먼저 치료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2.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매일, 꾸준히, 하루 2시간 이상 공부를 하고 있어요. 


이건 진짜 처음이에요. 저는 어릴 때부터 조용한 ADHD였던 건지... 공부가 참 힘들었어요. 매일 꾸준히 공부하거나 제때 숙제를 해본 기억이 거의 없어요. 청소년기에는 우울증이 심하게 찾아오면서 공부를 아예 놓았습니다. 수능시험장에 문제집 한 장, 교과서 한 장 제대로 보지 못하고 들어갔던 일은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 것 같아요. 대학교에 와서도 시험 2주전에 벼락치기 공부는 했어도 매일 연속적으로 공부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랬던 제가 약 1달 전부터 매일 2시간 이상 공부를 하고 있어요. 남들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당연한 일이겠지만 저한테는 기적이네요. 제 인생에서 처음이니까요. 사실 우울증에서 많이 회복되었다고 느낀건 올해 7~8월 부터였어요. 그래도 공부는 정말 안되더라고요. 그러다 8월 중순, 9월 말에 각각 한번씩 큰 계기가 있어서 그 계기를 발판삼아, 그리고 그동안 우울증이 많이 제거된 정신상태가 뒷받침이 되어줘서 확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바로 며칠 전에 다시 우울증에 빠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크게 힘든 상황이 왔는데도 공부를 놓게 되지는 않더라고요. 2시간 공부량은 어렵지 않게 채웠어요. 가장 공부가 안 되는 날이 2시간 정도이고 평균은 5시간 정도, 많으면 6시간을 넘기기도 합니다.  

    



제가 우울증으로 겪은 증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자살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태 (매일 자살충동이 일어나고 눈물이 줄줄 흐르는 정도)

2. 자살할 기력도, 의지도 없는 상태 (슬픔, 기쁨 등 모든 것에 무감각하고 타인의 감정에 공감이 어려움)

3. 조금씩 즐거움은 느끼지만 우울감과 고통에 압도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4. 우울감과 고통을 일상에서 밀어내고 평온하고 즐거움을 더 많이 느끼는 상태 (살고 싶다고 생각함)

5. 어려운 상황에서 우울감과 고통이 다시 돌아오더라도 몇 시간 이내에 사라짐

6. 기본 마음 상태가 평온하고 즐겁고, 우울감과 고통을 의식적으로 분석하고 밀어낼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생겼으나 집중력 등 살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할 능력은 회복되지 않은 상태

7. 집중력 등 우울증때문에 망가졌던 능력과 대인관계 등 전반적인 인생을 복구해가는 과정


제가 이 브런치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2단계였습니다. 1단계는 6년 전에서 2년 전까지 사이에 굉장히 심하게 반복되었는데 어느순간 사라지고 그 뒤로는 2단계가 계속 이어지는 상태였어요. 그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브런치에 올린 글들처럼 열심히 노력했고, 브런치에 마지막 글을 올렸을 때의 상태는 3~4단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브런치에 글을 쓰지는 못했지만 일종의 집단상담 프로그램(애니어그램, 춤동작 테라피, 타로심리상담 등이 포함된)을 경험하면서 확실하게 4~5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특히 춤동작 테라피는 프로그램 경험자들 중 99% 정도가 크게 도움이 되고 좋았다고 말할 정도로 효과가 좋았습니다. 그 후 취미생활 모임, 지역공동체 내에서의 소모임 조직에 관한 교육,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 프로그램의 치유활동가 교육 등을 통해 꾸준히 사람들을 만나고 관심있는 일들을 찾아가면서 우울감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종교생활도 우울증 회복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영적으로 어떤 은총(?)을 받아서는 아니고, 종교생활 자체가 가져다주는 심리상담적 효과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종교에서 제공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자존감(기독교에서 신이 자신의 모습대로 인간을 창조했기 때문에 인간은 소중한 존재이고, 신이 아버지로서 인간을 사랑하고 돌봐준다고 생각하는 부분... 신의 도움 없이도 자존감이 확고하다면 괜찮겠지만, 우울증에서 회복되는 과정에서 자존감이 자꾸 무너져서 힘들다면 도움을 좀 받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매일 기도를 하면서 마치 개인상담을 받는 것처럼 자신의 현재 감정과 힘든 일들을 털어놓고, 그러면서 자기 감정과 생각에 대한 객관화가 이루어지고 부정적인 감정을 가져올뿐인 쓸데없는 죄책감들을 풀어내는 것 등이 개인적으로는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6단계까지 왔고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도 생겼습니다. 심리학 공부도 해보고 싶고, 본업은 아니더라도 우울증 치유에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나누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동안 쳐다보기도 싫었던 공부도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문제는 집중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살고 싶고 즐겁고 행복한데 공부가 안 되어서 너무 힘들었어요.



7월부터 9월까지 약 3달간은 공부를 해보려고 했는데도 안 되어서 우울감이 다시 돌아온 시간이었습니다. 예전과 같은 정도는 아니었고, 우울감때문에 죽고 싶다거나 자존감이 바닥을 쳐서 생활 전체가 무기력해지는 정도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우울감이 자존감을 무너뜨려 우울증이라는 병때문이 아니라 내가 바보같고 무능한 인간이라 이런 고통을 겪는다고 죄책감을 느끼던 과거의 우울증 진행과정과 달리, 이번에는 우울감이 자존감을 공격하기 전에 우울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습니다. 우울감은 단지 현재 공부가 안 된다는 상황에서 나온 것일 뿐 저의 다른 부분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죠. 그리고 공부가 안 되는 것은 저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제가 무능한 것은 아니고요. 그동안 쌓아온 사소한 즐거움, 행복감, 평온함이 자존감이 높아지는데 도움이 되었고, 높아진 자존감은 우울감에 전처럼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지난 십수년간 저를 괴롭히던 그 지옥같던 우울증 자체에서는 확실히 벗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너무 고통스러워서 병원에 갈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우울증이 좋아졌고 기억력, 집중력이 많이 회복된 것을 스스로 느끼는데도 공부를 할 수 없는 이유가 뭔지 알 수 없었고 혹시 성인 주의력결핍장애가 아닌지도 의심이 되더군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제가 좋아하는 취미활동을 할 때는 하루종일 집중할 수 있는 것을 보면 공부에 대한 심리적 장벽, 과거 이 공부때문에 겪었던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8월 중순에 '어떤 사건'이 있어서 그날 굉장히 정신적으로 무너진 상태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우연히 10시간 가까이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비결은 '공부'를 한게 아니라 '객관식 문제집의 정답 지문을 그냥 읽은'데 있었습니다.


저는 객관식 문제집의 정답 지문만을 읽는 식으로 얼렁뚱땅 공부를 시작했어요. 외우는 것도 아니고 문제를 푸는 것도 아니고 그냥 눈으로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도 쉽지는 않았어요. 정답 지문을 다 읽은 다음에는 오답 지문들까지 포함해서 그냥 눈으로 읽었습니다. 눈으로 읽기만 하는데도 몇년만에 처음으로 이렇게 오랜시간 공부(?)해보는 거라 감동적이고 뿌듯하더라고요.


그걸 반복했고 시험이 다가오면서 생긴 불안감때문에 다시 무너지고... 그런 상태가 9월 말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러다가 하도 답답해서 공부에 도움이 될 만한 앱이 없을지 찾아보다가 집중력을 향상시켜주는 주파수, 백색소음, 기능성 음악이 있다는 앱을 발견해서 사용해보았는데 뜻밖에 그게 효과가 굉장히 좋았습니다. 플라시보 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15분 이상 집중이 가능했고 그게 반복되면서 갑자기 공부량이 늘었어요. 그러면서 가속도가 좀 붙어서 지금까지 약 한달 가까이, 매일 최저 2시간 이상은 공부해왔고, 요 근래 며칠간처럼 다시 자살 생각이 스쳐지나가고 저 스스로도 우울증의 구덩이에 다시 밀어넣어진 것 같다고 인정할 정도의 상황속에서도 공부는 계속 잘해왔습니다. 


집중력을 향상시켜준다는 주파수가 정말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그 앱을 사용하지 않을 때도 있는데 그래도 집중은 여전히 잘 됩니다. 제 생각으로는 결국 어떤 대단한 비결이 있는게 아니라, 올해 3월부터 7월까지 공부 외적으로 우울증을 치료하려고 노력했던 것, 8월 중순부터 한 단계 뛰어넘어 공부에 어떻게든 익숙해지게 된 것, 이 두 가지가 단계적으로 이어져서 이런 결과를 가져다준 것 같네요.         



사실 시험이 얼마 안 남은 상황에서 이제야 겨우 매일 꾸준히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게 별로 대단한 의미는 아닐지도 모르죠. 이번 시험도 또 망쳐버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지금 저는 청소년기 이후 처음으로,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끼고 있어요. 생산적인 일을 하고 밤에는 적당한 피로감과 뿌듯함을 안고 잠드는 것. 저는 이런 정상적인 삶을 정말 오랫동안 누리지 못했거든요. 오죽하면 하루종일 공부하고 단어장을 보면서 귀가하는 고등학생들, 공인중개사 인강을 듣고 열심히 문제집을 푸는 할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이었을까요. 저는 그분들이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룬 대단한 사람들보다 훨씬 부러웠어요. 하루종일 우울감, 불안, 무기력때문에 스마트폰만 뒤적거리다가 서늘한 마음으로 귀가하던 무수한 날들... 그런 귀가길에 열심히 하루를 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이제는 그 고통이 없어져서 행복합니다.



*당분간 또 시험때문에 댓글로 답변을 잘 못해드리거나 브런치에 잘 들어올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부분은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실 우울증에서 치유되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던 프로그램들, 우울증에서 치유되었던 구체적인 과정은 이 브런치에서 거의 소개를 못해서 죄송스럽기도 합니다. 그 부분은 시험 끝난 후에 정리를 좀 해서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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