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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Nov 11. 2018

우울증 치료의 큰 그림

빅픽쳐?




 우울증에서 조금씩 회복되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어요. 우울증 치료라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걸어다니기 시작했고 아무데나 돌아다녔고 춤동작 테라피를 경험했고 사람들을 정기적으로 만나 활동을 했고 이런저런 교육을 받았고 자수라는 인생 취미생활도 만들었고…… 재미있는 일들이 늘어가면서 살아있는게 즐겁고 행복하다, 앞으로도 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하고 싶은 공부와 하고 싶은 일도 생겼는데…… 이게 우울증 치료 과정에서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던 건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걸어다니고 취미생활을 만들면 누구나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될까요? 이렇게 간단하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이라면 전 왜 지난 10년 이상 바닥없는 구덩이에서 끊임없이 추락하고 있었을까요? 우울증에서 회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제가 생각할 때 제가 지난 8개월 동안 했던 일들에는 몇가지 특징이 있어요.   


(1) 저는 과거에 대해서, 상처, 죄책감에 대해서 파고들지 않았어요.  


 그냥 상처가 머릿속에서 떠오르고 고통스러울 때면 상처가 아예 생각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몸을 혹사시키기 위해 열심히 걸었죠. 몸이 지치고 피곤하면 과거의 상처나 힘든 기억이 생각이 잘 안 나더라고요. 예전에는 잠들기 전에도, 심지어 잠자는 도중에도 계속 정신적으로 긴장하고 불안해서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고 일어나는게 힘들었어요. 그런데 죽어라고 걸은 이후에는 잠들기 전에 고통스러운 생각으로 몸부림치는 일도 없어졌고 푹 자게 되었어요.  


 저는 이 나이 먹도록 사회활동도 못하고 부모님의 돈을 쓰고 있는, 폐인생활을 하는 저 자신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심한 죄책감을 느꼈는데 이번에는 그것도 놓아버렸어요. 어차피 제가 신체적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면 부모님은 그런 저를 평생 돌봐야 했겠죠. 그래도 저는 우울증에 걸리기 이전에는 부모님에게 장애가 있는 자식을 돌보는 고통을 주지 않았고, 우울증에 걸린 이후에도 나름 열심히 살아보려고 노력했고 아직 자살하지 않았죠. 자식이 자살해서 그 시체를 치우는 고통을 주지 않은 것만해도 효도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게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말이 안 될수도 있지만 일단 제가 낫기 위해서 저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로 결정했어요. 제가 치유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불필요한 죄책감은 싹 버렸죠. 

그렇게 하다보니 결과적으로 일상속에서 과거의 상처가 의식속에 머무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어요. 


(2) 저는 미래에 대해서 손을 놓았어요. 

 

 마찬가지로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할 틈이 없게 열심히 걸었어요. 전에는 불안과 두려움, 후회와 자책으로 잠들기 전에 몸부림쳤지만 몸을 힘들게 한 이후에는 그게 많이 없어졌어요.  

그리고 여러가지 활동에 참여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다보니 꼭 그동안 준비했던 시험에 합격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크고 작게 일자리에 대한 기회도 닿고 심리상담쪽으로 공부해서 그쪽 직업을 갖거나 심지어 야생화 자수를 열심히 배워서 이걸 직업으로 가져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결혼만 안 하면(?) 저 혼자 재미있게 먹고 사는데는 충분해보이는 일들이 보이다보니 전보다 불안이 많이 줄기도 했죠.  


 그렇게 하다보니 결과적으로 일상속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의식속에 머무는 시간도 많이 줄어들었어요.  


(3) 저는 현재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일들을 많이 만들었어요. 


 전에는 현재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일들이 별로 없었고 현재 즐거움을 느끼면 죄책감도 함께 느껴야만 했는데 이번에는 즐거움을 적극적으로 찾았어요.  


(죄책감을 느낀 이유는 부모님 돈으로 폐인처럼 살면서 심지어 공부도 안 하고 딴짓으로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 공부해야 되는 시간에 그런 일을 해서 장래를 더 망치고 있다는 것 때문이었죠.) 


 그냥 지금 이 순간에라도 즐겁고 싶었어요.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바느질을 하는 것, 수를 놓는 것, 사람들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몸을 움직이는 것, 행사에서 부스를 운영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는 것 등등. 세상에 재미있는 일은 정말 많더라고요. 저는 재미있는 일을 하루에 하나 이상은 꼭 하려고 했어요. 재미있는 일을 찾는게 우울증 약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일이었죠. 


 그렇게 하다보니 결과적으로 일상속에서 과거와 미래보다는 현재 이 순간에 집중하는 시간이 많이 늘어났어요.  



 종합해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저는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을 줄이고, 현재에 집중하면서 우울증에서 회복되기 시작했어요. 


 이건 '명상'에서 추구하는 목표와 같아요. 예전에 어떤 책에서 이런 내용을 봤어요. 누가 부처님에게 명상이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부처님이 이렇게 대답했대요.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바로 그 순간에 머무는 것이 명상이라고요. 그 순간이 바로 현재를 의미하는 거죠.  


 우물에서 물을 길을 때 우물 속으로 내려간 통과 그 통을 끌어올리려고 팽팽한 줄을 당기는 손, 그 행동 자체에 집중하는 것. 귤을 먹을 때 남은 귤을 마저 집어들고 입안으로 넣으려고 하는 대신, 현재 입안에 들어있는 과육의 맛을 느끼는 것. 밥을 먹을 땐 밥을 먹는 동작과 음식에 집중하고 잠을 잘 때는 잠에 집중하는 것. 그게 명상이래요.  


 명상을 한다고 눈을 감고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과거와 미래의 온갖 감정과 생각을 떠올리는 것은 오히려 명상이 아니라는 거죠.  


 우울증 치료의 큰 그림도 바로 과거와 미래를 놓아버리고 '현재'에 집중하는 데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에는 우울증을 치료한다고 하면 과거에서부터 혹은 미래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과거의 상처를 남김없이 발굴해서 마주하고 '어떻게인지는 모르지만' 그걸 해결해서 부정적인 감정을 없애고, 과거의 문제있었던 사고방식을 바꾸는 등 과거를 깨끗하게 정리해야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어요. 또 과거의 실패와 미래의 불안, 두려움을 한방에 해소할 수 있게 엄청나게 성공하면 우울증에서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저와 비슷하게 과거와 미래에 사로잡혀있는 분들도 많이 봤어요. 어린시절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오히려 많은 상처를 받고 자란 과거 때문에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힘들어하는 분들, 시험에 붙고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져야 엉망진창인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우울증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고 힘들어하는 분들을 많이 봤어요. 


 그런데 과거도, 미래도 실제로는 절대 잡을 수 없는 것들이에요. 저는 이미 지나간 과거도, 과거에 이미 받아버린 상처도 바꿀 수 없어요.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과거의 받은 상처에 대해 현재 느끼고 있는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조금 바꿀 수 있는 것뿐 과거 자체는 바꿀 수도 해결할 수도 없죠. 미래도 마찬가지에요. 아무리 미래를 불안해하고 두려워해도 저는 그 미래를 통제할 수 없어요.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미래에 두려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현재 공부를 하거나 이직을 하거나 해서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겠죠. 더 중요한건 과거와 미래는 허상이고 그것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 자체가 제게 삶을 살아갈 힘이나 의욕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올해 3월부터 제가 했던 일들은 과거와 미래 대신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었어요. 걷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사람들과 마음 터놓고 웃고 떠들며 즐거워하는 이 순간, 자수 한땀한땀에 집중하는 이 순간, 몸을 움직이는 지금 이 순간, 즉 현재에 몰입하는 거죠. 이미 떠난 과거는 놓아버리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는 생각하지 않으니 부정적인 생각을 할 일이 많이 줄었고, 그러다보니 힘이 생겼어요. 현재가 즐거우니 이런 재미있는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다는 의욕도 생겼죠. 실제 현실은 시궁창같을지 모르지만 저는 현재에 집중함으로써 그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었죠. 어떤 의미에서는 그 '시궁창'이라는 것도 과거와 미래가 합작해서 만들어낸 것이지 실제로는 그렇게 냄새 피우는 시궁창까지는 아닐수도 있어요.  


 한번 이런 관점에서 우울증을 돌아보고, 우울증에서 회복될 방법을 찾아나가시는 것도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계곡의 물은 끊임없이 흘러가죠. 그 가운데 사람이 서 있어요. 내려온 물은 사람을 스치고 하류로 흘러내려갔어요. 위에는 아직 사람에게 닿지 않은 물이 흘러오고 있죠. 사람은 그 어떤 물도 붙잡을 수 없습니다. 단지 발가락에 힘을 꽉 주고 물에 쓸려가지 않게 꼿꼿이 서 있을 뿐이죠. 지금 발디딘 그 자리가 바로 현재이고 우울증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붙잡고 늘어져야 할 위치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과거의 상처는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 중 하나죠. 하지만 우울증에서 어느정도 회복되었다고 느낄만큼 정신적인 힘이 생길 때까지는 일단 피하는게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울증의 바닥에 있는 상태에서는 과거와 맞서 싸울 힘이 전혀 없으니까요. 오히려 과거라는 괴물이 내뿜는 독에 녹아버리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힘이 생긴 후에는 과거의 상처가 머릿속을 지나갈 때 잠시 붙잡습니다. 과거 자체는 바꿀 수 없어요. 다만 우리는 과거의 상처가 '현재'에 재생될 때 만들어내는 '현재'의 부정적인 감정은 다룰 수 있습니다.  


 '과거에 나는 부모에게 그런 상처를 받았지. 하지만 그건 과거의 일이고 부모가 나를 무시하고 자존감을 깎아내렸다고 해도 그건 부모의 생각일뿐 나의 실제 존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지금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부모와 나는 별개의 존재이고 나는 나를 자기 멋대로 쥐고 흔들려고 하는 부모와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아. 그보다 내가 지금 관심있는 건 최근에 새로 시작한 취미생활이야. 거기서 만난 사람들이 지난번에 이렇게 말해줬는데 그게 내 자존감을 많이 높여주고 기분이 좋았어. 참, 다음 모임 때 어떤 행사를 한다고 했지? 기대된다.'  


 이런 식으로 과거의 상처가 가져다준 부정적인 감정을 인정하고, 그것과 분리된 나 자신의 입장에서 그 상처와 감정을 분석한 다음, 하류로 흘려보내면 됩니다. 그리고 최근 재미있거나 관심을 갖게 된 일로 주의를 돌려서 현재에 좋은 감정을 불러오고 그것에 집중합니다. 


 사실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은 저렇게 흘려보내도 계속 다시 떠오르곤 합니다. 그래도 그때마다 다시 정리해서 흘려보내면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이 내면에 오래 머물지 않아요. 큰 상처를 남기지 않고 흘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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