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과 저에게
요즘에는 수시가 많아져서 수능이 전보다는 덜 중요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묘한 긴장감은 여전하네요. 고3, n수생분들, 직장 다니면서 다시 수능보시는 분들, 꿈이 생겨 조금 늦게 학구열을 불태우는 분들. 모두 고생하셨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능 망했다고 인생이 망하지는 않는다, 늦었다고 생각한 때가 가장 빠르다... 이런 말은 너무 꼰대스럽죠? 네, 꼰대 맞아요.ㅎㅎ
저는 우울증으로 수능을 밥먹듯 보고 휴학도 밥먹듯 하면서 인생까지 국에 말아먹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버티면서 살아왔어요. 수능 전날 텅빈 문제집을 보던 기분, 수능날 저녁 수고했다고 말하며 긴장이 풀린 부모님 앞에서 우울증때문에 수고할 수 없었던(?) 저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던 기분, 수능날 밤 칼바람에 목이 죄어오는 듯하던 기분... 그런건 아직도 기억나네요. 수능 시험은 다가오고 무기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자살하고 도망치고 싶던 끔찍했던 날들. 아픈 기억입니다.
저같은 사람도 있으니 너무 힘들어하지 마시고 기운내세요. 남보다 7년쯤 뒤떨어지는 인생을 산다고 해도 길은 다 있습디다(10년까지는 아직 경험 못해봐서 장담은 못하지만 7년 정도는 보장해요). 앞서가던 사람이 다시 돌아돌아 와서 만나기도 하던데요? 우울증으로 힘든 분들은 저처럼 되지 마시고 얼른 치료 받으시고, 억지로라도 운동하고 놀러나가세요. 수능도 못 본 주제에 돈쓰고 놀러다닌다고 죄책감 들더라도 그냥 개무시하세요. 사람은 어느 상황에서나 즐겁고 행복할 자격이 있습니다. 상황이 아무리 엿같고 나 자신이 쓰레기같아도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어요. 행복, 즐거움, 재미는 그 자체로 우울증약입니다. 약 먹듯 꼭 챙겨드세요. 그래야 다음 기회를 위해 뛸 힘이 생깁니다. 자기를 학대하고 비하하고 괴롭히면 여러분 안의 '나'는 우울증과 무기력으로 보복할거에요. 이렇게 말하겠죠. '그래, 니가 말한대로 나 쓰레기야. 나 쓰레기니까 아무것도 못해. 그러니 나한테 아무것도 기대하지마. 난 쓰레기답게 냄새 풍기면서 쓰레기통 바닥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썩어갈거야.'
인터스텔라에서 주인공이 과거의 자신에게 STAY라는 말을 전달하려고 노력하죠. 절규하면서. 전 과거의 저 자신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어요. 그때가 늦은게 아니야, 너 인생 망한거 아니야, 지금이라도 우울증 치료받으면 무수한 기회가 있어, 모임도 나가고 사람도 만나고 돈도 쓰고 제발 재미있게, 즐겁게 살아, 죄책감 버려, 너 쓰레기 아니야, 세상에 길은 진짜 많아, 네가 보는게 전부가 아니야, 힘내, 제발... (병원 가, 인간아... 약 먹으라고!)
그때로 돌아가서 바꿀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불행하지는 않아요. 그 10년이 버린 시간이 아니라 저를 바꿔놓은 시간이기도 하거든요. 바닷가재가 성장할 때 기존의 껍질이 바닷가재의 사이즈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면 엄청 아프대요. 그러면 바닷가재는 아프니까 더 큰 껍질을 만들려고 바위 밑으로 들어간대요. 그래서 기존의 껍질을 벗고 새 껍질을 입고 나오는 거죠. 그리고 더 자라면 더 큰 껍질을 다시 만들고요. (전문가 아님 주의.)
우울증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지금 내 가치관, 인생관, 상황... 이런 것들이 현재의 나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일종의 신호에요. 아프지 않은 새 껍질을 만들라는 거죠. 저는 그걸 깨닫는데 오래 걸렸고 기존의 껍질을 부수는데도 정말 오래 걸렸어요. 지난 10년 넘는 세월은 그 작업을 해나가는 과정이었네요. 지금 돌아보면.
지금 아픈 이유는 우리가 뭔가 변화하고 성장할 때라서 그런거지 이유없이 아프고 고통스러운게 아니에요. 다들 잘 견뎌내시고 빛 한 줄기 없는 바위 밑에서 자기만의 답을 찾아내시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에게 평화를 빌어요.
더불어 수능 말고 다른 시험을 준비하시는 많은 분들과 저도 화이팅! 우리 꼭 합격해서 자유를 얻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