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고 미안하면서도 밉다
수험생활 중에도 우울증 관리를 위해서 소모임에는 계속 나가고 있어요. 소모임에 시간을 쓰는게 약간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면 우울증이 재발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아직 있네요. 그래서 상담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셈 치고 시간을 투자하고 있어요.
오늘 번개 모임에서는 비누 만들기를 했어요. 어성초 비누와 녹차 비누를 만들었는데 제가 만든 비누 자랑을 하려고 글을 쓴 건 아니고요......
몰드에 녹인 비누를 붓다보니 갑자기 가족 생각이 나더군요. '나'라는 건 이 비누처럼 부모라는 몰드에 부어진, 부모에 의해서 기본 모양이 형성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모양이 조금씩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우리의 (외모는 물론이고) 성격, 성향, 취향, 살아온 배경, 선입견, 편견, 세계관, 가치관... 이 모든게 부모로부터 비롯되었죠. 닮았든 아니면 저항하면서 멀어지든.
제 우울증도 부모님의 기질, 성향, 부모님들 서로의 관계 등에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다른 분들도 가족이 우울증에 영향을 미쳤거나 현재진행형으로 심각하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경우가 있으시겠죠. 부모 문제, 가족 문제는 자기 내면의 우울증의 원인을 들여다보기 위해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 같아요.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eeojsh&logNo=220976078534&navType=tl
얼마 전 서밤님의 블로그를 보다가 이 포스팅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부모님이 할머니 문제로 싸울 무렵이 다가오면 그걸 예방(?)하기 위해서 서밤님이 일부러 아버지랑 자기 문제로 싸울 일을 만들고, 그래서 서밤님이 한바탕 하고나면 아버지도, 어머니도 갈등이 어느정도 해소되어 할머니 문제는 적당히 넘어가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게 딱 제 이야기였어요.
저희 부모님은 평생 단 한가지 이유로 싸우셨어요. 엄마는 원래 말수가 적은 성격이고 대화를 즐기지도 않고, 감정표현도 적극적으로 하는 성격이 아니에요. 외가쪽 식구들이 다 그래요. 무뚝뚝한 곰같은 성격이죠. 반대로 아빠는 항상 집안 분위기가 밝아야 하고 대화를 활발하게 해야 하는 사람이에요. 화제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대화를 해야하는 성격이죠. 그래서 엄마가 밥 먹는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으면 아빠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해요. (외갓집 식구들 기준으로는 굳이 대화할 일이 없으면 대화를 왜 해야 되냐, 웃을 일이 없으면 왜 웃어야 되냐는 마인드니 당연한건데 아빠 기준에서는 '화가 난 걸로' 보이는거죠. 엄마가 실제로 화가 나서 말을 안 할때도 많아요. 아빠는 대화로 풀어야 되는 성격인데 엄마가 입을 꾹 닫고 침묵시위를 하면 분노가 1에서 100까지 단숨에 올라가버리죠.)
그러면 저는 눈치를 보면서 아빠가 엄마가 말을 한 마디도 안 하고 있다는 걸 잊어버리도록 일부러 없는 화제도 지어내가면서 두배는 활발하게 말을 하게 돼요. 밥을 먹으면서 할 말이 없을까봐 인터넷 뉴스에서 미리 이야깃거리를 몇개 찾아서 나올 정도죠. 때로는 일부러 아빠 성질을 건드려서 화를 나게 만들기도 해요. 그러면 아빠의 분노는 저를 향하게 되고 저와 크게 싸우고 나면 엄마와 아빠 사이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가라앉거든요. 엄마가 화가 나서든 원래 성격때문이든 입을 다물고 있는건 고쳐질 수 없는 문제인데, 그것때문에 아빠가 격렬하게 화를 내고 욕을 할수록 엄마는 화가 나고 자존심을 다쳐서 더 말을 안하게 되고, 그런 악순환이 반복되니까 차라리 제가 화살을 맞는게 나은 거죠. 저는 아빠랑 비슷하게 대가 세서 아빠가 화를 내거나 막말을 해도 잘 견딜 수 있으니까요. (...는 개뿔...)
저희 할머니는 초등학교 때 돌아가셔서 고부갈등 문제도 없고 아빠는 칼같이 자기 식구들 챙기는 성격이라 바람, 돈 문제, 보증 등 아무 문제도 없었는데도 저 성격문제로 정말 지긋지긋하게 싸움이 났죠. 차라리 외부 문제면 그걸 제거하고 해결해보려고 하거나 아니면 외부에서 일이 생기는 그때만 참을 수도 있을텐데... 성격이 안 맞아서 싸움이 나는 건 매일, 매순간,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사람은 성격을 절대 못 바꾸니 답이 없었죠. 형제라도 있었으면 의지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외동이라 저 혼자 부모님 사이에서 눈치만 보면서 너무 힘들었어요.
저는 아빠를 닮아서 아빠가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됐어요. 저도 엄마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굉장히 불안하고 화가 났거든요. 물론 그게 아빠가 화낼까봐 저도 화가 난 것일수도 있지만 아빠 성향을 닮아서 그런 것도 있어요. 얼마전에 우울증 치료를 하면서 제 성격과 아빠 성격을 생각하다보니 아빠가 왜 그랬는지 논리적으로도 알겠더군요.
아빠는 원래 불안도가 굉장히 높은 성격이었던 거에요. 저랑 마찬가지로. 불안도가 높으니까 자꾸 대화를 많이 해서 서로 기분이 안 나쁘고 좋다는 것을 확인해야 하는거죠. 그런데 엄마는 말을 잘 하지 않는 성격이니까 엄마가 지금 기분이 좋은지 안 좋은지 모르겠고, 엄마가 말을 잘 하고 웃어서 안심을 시켜주면 불안이 가라앉겠는데 그렇게 안해주니까 불안이 폭발하고 화가 나는거죠. 자기가 불안하니까 상대방에게서 무슨 말이든 이끌어내려고 막말이든 욕이든 고함이든 수위를 높여가고 그렇게 자기 감정을 표출한 거에요.
엄마는 아빠가 화를 낼수록 입을 다물어버렸어요. 엄마는 아빠가 왜 화를 내는지 전혀 이해를 못했거든요. 엄마는 아빠가 자기 회사일이나 기분나쁜 일로 아무 문제없는 자기한테 화풀이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죠. 저는 엄마가 그런 모습을 보일 때 침묵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걸 실감했어요. 엄마는 아빠의 막말과 고함소리때문에 상처를 받고 자존감이 무너지고 많이 힘들어했어요.
저는 십몇년간 아빠의 별세계와 엄마의 달세계 사이에서 통역을 해주면서 살았어요. 아빠가 화난 이유를 엄마에게 설명해주고, 엄마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빠한테 설명해주고. 아빠, 엄마가 저를 학대하기라도 했다면 둘다 미워할 수 있었겠지만 두분은 각자 저한테는 끔찍하게 사랑을 베풀어주셨죠. 아빠도 저만 아니었으면 벌써 이혼했다고 울분을 토하고, 엄마도 저만 아니면 이혼하고 죽었을거라 하소연하고, 저는 아빠도 엄마도 사랑하고 이해되고 두분이 이혼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고...... 그러면서도 엄마, 아빠가 또 같은 문제로 싸울 때마다 저도 설득하고 중재하고 하다 신경줄이 너덜너덜해질 지경이 되면 나 핑계대지 말고 제발 이혼하라고 악을 썼죠. 이런 가정불화때문에 자살시도로 나아갈 뻔한 순간도 꽤 되네요.
뭐가 답이었을까요. 이혼하는게 맞았을까요. 이혼하고 아빠도, 엄마도 절대 행복하지 않고 자기 성격대로 신경질을 내고 버럭하면서 저를 키웠을텐데 그랬더라면 더 행복했을까요?
아무튼 그런 아빠의 기질을 물려받고 그런 부모 사이에서 눈치보면서 자란 저는 그 몰드에 맞는 비누가 됐어요. 어릴 때부터 우울증이 있었고 남 눈치를 굉장히 많이 보고 저 자신을 굉장히 감추고 억압하고 사람을 만날 때마다 긴장하는 사람이 됐죠. 자존감도 낮아요. 대신 사람들의 기분이나 감정, 상황을 잘 파악하고, 대립되는 상황에서 양쪽 당사자를 둘다 이해할 수 있는,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이 되었다는건 장점일수도 있을 것 같아요. 갈등상황에서 멘탈이 쉽게 나가서 갈등을 피하고 싶어하는건 단점같네요. 그밖에도 제가 미처 알지 못하는 여러가지 흔적이 저에게 남아있을 거에요.
우울증이 한창 심했을 때는 제가 이런 모습으로, 망가지고 무너진 모습으로 만들어졌다는게 돌이킬 수 없게 느껴졌고 죽어서만 벗어날 수 있다고, 혹은 죽어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우울증에서 조금씩 회복되면서부터는 이런 현재의 제 모습이 우울증이 아닌지, 우울증의 후유증이 아닌지 고민하고 어떻게 나을 수 있을지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네요. 저는 그냥 지금 이대로가 저 자신인 것 같아요. 우울증도 무엇도 아니고 그냥 제 성격, 제 생각, 제 성향, 제 선입견... 이런 것들이 합쳐져서 남들과 구별되는 저 자신을 만든 것 같아요.
어느 누구도 완벽한 부모, 완벽한 가정에서 자라지는 못하겠죠. 사람은 완벽하지 않으니까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고, 성격도 다 다르고 부모가 살아온 환경, 부모가 살아가는 환경이 다 다르고, 부모의 그런 여러가지 특성때문에 자식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고 부부싸움도 할 수 있고... 그게 정상이겠죠. 상처의 정도는 다를 수 있겠지만요. 부모님에게 불만 1도 없는 분이 계실까요? 방어기제가 작동한 것 아니고 정말 순수하게 아무 불만도 없고 상처도 받은 적 없는 분들이 얼마나 계실지... 제 생각에는 흔치는 않을 것 같아요. 계시다면 정말 행복하신 거고 부모님께 효도 많이 하셔야 됩니다:)
자식은 부모의 기질과 성격을 타고나고, 부모가 제공해주는 환경 안에서 살아가면서 상처를 받고, 그러면서 '인간'이 되어가는 것 아닐까요. 이런 상처를 받으면 같은 방향으로 쓰러져버리거나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 튀거나 하는 자기 나름대로의 반응을 하면서 자기만의 성격을 만들어가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잘못된 일이고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그냥 그게 그 사람인거죠. 온 세상 사람들이 전부 다 이상적인 부모 밑에서 평생 싸움 한번 없이 평화롭고 화목하게 자랐다면 성격이 비슷해지지 않을까 싶어요. 사람마다 개성이라는게 있을까요?
저는 지금은 저의 이런 성격에 나름 만족해요.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게 자존감이 없을 땐 저 자신을 억압하는 성격이었지만 자존감이 다시 생긴 지금은 장점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사람들을 기분상하게 하는 행동을 덜 하고 상처도 덜 줄 수 있으니까요. 사람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아빠와 엄마 양쪽 모두 '옳다'는걸 알았던 저는 세상에 이유없이 화를 내거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그 이유를 모를 뿐이고 제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고 싶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게 마음의 여유가 충분히 있을 때는 제 분노나 짜증을 일단 유보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죠. 그게 저의 성격상 특징이고 저는 그런 제가 마음에 들어요. 단점도 많겠지만요.
부모님은 지금은 별로 많이 싸우지 않으세요. 2~3년 정도 전부터 싸움이 많이 줄었고 엄마도 변해서 지금은 적당히 웃고 이야기하고 하세요. 그러다보니 아빠도 안정감이 높아져서 심하게 화를 내는 일이 줄었죠. 가끔 부부싸움도 있지만 요 몇년간은 저도 그냥 신경꺼요. 이제는 그건 그들의 삶이지 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냥 방안에서 이어폰 꽂고 영화 몇편 보고 말아요. 예전처럼 중재하려고도 안해요. 그냥 알아서들 하라고 놔두고 저는 제가 재미있어하는 일, 불안한 순간에 제 불안을 완화시킬 수 있는 일들을 찾아 하면서 잊어버리는 편이에요. 전처럼 부모님의 부부싸움이 제 자존감을 심하게 흔들지는 못하네요. 제가 강해지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던 걸까요. 으으... 그래도 빨리 취업해서 독립하고 싶네요.ㅎ.ㅎ 저처럼 아직 독립 못하신 분들 같이 힘내요:)
*심윤경 작가 <나의 아름다운 정원>
혹시 어릴 때 부모님의 불화로 힘드셨던 분들은 이 책 한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런 불화가 자식에게 남기는 고통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된다는걸 은유적으로 보여주면서도 가족 구성원들이 그렇게 서로 상처주고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조금이라도 이해해나가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잘 나타나 있어서 저는 좋았어요. 그리고 아무리 '나쁜' 가족이라도 결국은 가족이기 때문에 봉합이 되면 되는대로, 안되면 안되는대로 깨진 조각이라도 주워모아 같이 갈 수밖에 없다는 것도... 조금은 먹먹하지만 받아들일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