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예방과 우울증 치료에 도움이 되는 게임중독?
*의사 기타 심리상담 전문가가 아님을 주의해주세요. 이하의 내용은 저의 경험에서 비롯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덧붙여서 이 글은 청소년, 일상생활이 가능한 정도 상태의 우울증 환자에게는 권하지 않습니다.
일단 중독 자체에 관해 이해하고 싶으신 분들은 이 영상을 한번 보고 오시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왜 병원에서 마약성 진통제를 투여받은 사람들이 마약중독자가 되지 않는 걸까요?베트남전에서 마약에 빠졌던 병사들의 대다수가 어떻게 집에 돌아가서는 마약을 쉽게 끊었을까요? 저는 전문가가 아니라 이 영상의 내용을 검증할수는 없지만, 이 영상에 따르면 사람들이 마약중독에 빠지는 이유는 마약 자체 때문이라기보다는 무너진 사회적 관계망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들과 교류하고 결속하는게 사람들의 본능인데 그게 좌절되고 소외되면서 중독에 빠질 수밖에 없는 심리상태가 된다는 거죠. 저는 경험상 여기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저는 사람들과의 교류가 왜 중요한지, 왜 그게 우울증 치유의 중요한 원리가 되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경험상 그게 가장 큰 도움이 된다는건 동의할수밖에 없네요. 아무튼 이 영상을 보면 중독이 멀쩡한 사람을 폐인으로 만드는게 아니라 이미 폐인에 가까운 사람이 중독에 빠지게 된다는걸 이해할 수 있어요.
제가 오늘 이야기하려는건 위 영상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에요. 저는 심한 우울, 불안에 중독 자체가 임시적으로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우울증 기간 중 약 4년 가량 게임에 중독되어 있었어요. 스마트폰 중독은 훨씬 오래 전부터 있었고 현재도 아직 진행중이고 끊을락 말락 하고 있는 단계입니다. 게임은 끊은지 좀 되었고 아직 금단증상(?)은 없습니다. 게임에 처음 빠지고 한동안은 게임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생각했어요. 게임때문에 가뜩이나 안 되던 일상생활이 더 무너졌거든요. 공부는 전혀 손도 댈 수 없었고 밥도 잘 안 먹게 되고 잠도 못 자고 게임이 잘 안 될 때는 우울증이 심하게 폭발하고... 게임이 해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저는 문득 몇가지를 깨닫게 되었어요.
(1) 어차피 게임을 안해도 나는 일상생활도, 공부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우울증이 나를 원래 해치고 있었던거지 게임이 특별히 나를 더 해치고 있는건 아니다. (게임 안할 때는 그 시간에 주로 자거나 누워있거나 인터넷 서핑을 했죠.)
(2) 게임은 나에게 일상에서 누리지 못하는 즐거움을 주고 자살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게임을 하고 나서부터 자살생각이 더 많이 줄어든게 사실입니다. 게임에 몰입해서 자살할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고 게임에서 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죽을 시간이나 이유도 없었어요.)
(3) 갑자기 불안, 긴장, 스트레스가 높아질 때는 게임에 몰두하면 기분이 나아진다. (게임은 쉽게 현실도피하게 도와주고 그 안에서 재미있는 생활이 있으니 거기로 옮겨가면 '안전하다'는 기분을 느꼈어요.)
그래서 게임중독이 그 당시의 저한테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다들 해롭고 나쁘다고 하는 게임이 우울증 환자인 저한테 도움이 되는건 왜 때문이죠... 그렇게 고민하다가 밑의 글을 우연히 보게 되었어요.
https://entertain.v.daum.net/v/20160107001217085
저는 공황장애가 약간 있었지만 게임으로 그걸 적극적으로 조절한 것은 아니어서 이 기사 내용이 꼭 저한테 맞는 경우라고 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이 기사를 보고 나서는 게임중독이 저와 같은 우울증 환자에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오히려 치료에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좀더 하게 되었습니다.
심리학 관련 인강을 듣는데 강사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불안이 너무 높아지면 사람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지고, 그게 계속 올라가다보면 몸이 공포를 이기지 못해 공황장애와 같은 증상이 일어나게 된다고요. 그렇게 불안이 높아져서 사람이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 사람은 중독에 빠진대요. 뭔가에 중독되면 불안으로부터 주의를 돌릴 수 있고 긴장을 낮출 수 있다는 거죠. 알콜중독, 게임중독, 인터넷중독, 쇼핑중독, 폭식하는 음식중독, 일중독, 공부중독(이건 인생에 한번이라도 걸려보고 싶...) 등등. 흡연도 어떤 의미에서는 스트레스나 긴장, 불안을 완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는 이런 부류의 중독 중 하나라고 볼 수도 있죠. (니코틴이 일으키는는 신체적인 중독도 있지만요.)
저는 이 설명을 들었을 때 제가 왜 게임중독, 인터넷중독에 빠졌는지 이해할 수 있었어요. 제가 왜 게임중독을 통해서 증상이 완화되는(?) 기분을 느꼈는지도 알 수 있었죠. 아마 우울증 환자분들 중에도 게임중독이나 인터넷중독에 빠져계신 분들이 꽤 되지 않을까요? 게임때문에 일상의 일들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을 느끼면서 어둠속에서 게임을 하시는 분들도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우울증 환자분들께 게임중독, 인터넷중독에 관해서 이런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어요. 순전히 제 경험에 근거한 이야기니까 무시하실 분은 무시하고 가셔도 됩니다.
우울증으로 아무 흥미도 없고 무기력한 상태에서 일상생활이 거의 무너진 분들, 외출할 힘도 없어서 밖에서 운동하거나 즐거운 일을 찾기 힘든 분들은 일단 게임으로 우울증 치료의 첫걸음을 시작해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미 우울증 상태에서 게임을 하고 계신 분들은 굳이 죄책감을 느끼지도, 끊으려고 애쓰지도 마시고 오히려 그게 우울증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임시적으로라도 생각하실 수 있지 않을지...
인터넷 커뮤니티도 비슷해요. 다른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거나 웃음을 주는 자료들을 주기적으로 보는 것도 도움이 되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인터넷 커뮤니티는 게임보다 즐거움은 좀 적으면서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나 키배 뜰 일(!)이 자주 생겨서 스트레스는 더 많이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괜찮을 것 같아요.
(긍정적인 쪽으로는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를 쓰는 브런치나 블로그 중 상처주지 않는 것들, 괜찮은 것들을 구독하는 것도 도움이 많이 돼요.)
(1) 우리가 게임이든 인터넷이든 뭔가에 중독되는 것은 우울증, 불안증 때문이지 중독 그 자체 때문이 아니에요.
중독은 우울증에 걸린 우리가 살기 위해 필요한 최후의 수단인지도 모르겠어요. 우리가 폭식하는 것은 음식 자체 때문이 아니라 불안하기 때문에 견딜 수 없어서 불안으로부터 주의를 돌리고 나를 안심시킬 뭔가가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음식이 그런 역할을 하는 거죠. 그래서 우울증으로 인한 폭식이 온 사람에게 식탐이니 다이어트니 하면서 음식 중독을 해결하라고 하는 것은 원인을 보지 못하고 증상만 제거하려는 거죠. 게임도 그렇고 인터넷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게임을 하면서, 폭식을 하면서, 하루종일 광적으로 인터넷을 들여다보면서 '죄책감'을 느끼는 건 불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죄책감이나 아직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정신적인 힘도 없는 상태에서 섣불리 끊으려다가 실패하는 과정들은 우울증을 더 깊게 해서 우리를 중독에 더 빠져들게 만들 뿐이에요. 저는 우울증이 나아지면서 중독증상도 함께 나아졌어요. 그렇게 좋아하고 매달렸던 게임도 어느순간 귀찮아지고 자연스럽게 끊게 됐어요. 우울증에서 진짜 회복되면 게임도, 인터넷도, 폭식도 필요없어지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지금 현재 내 마음 상태가 중독을 필요로 한다면, 그냥 마음을 편하게 먹고 우울증과 끝장을 보자고 생각하면서 중독을 이용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2) 게임 등이 주는 순간적인 즐거움이 결국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어져요.
우울증 환자에게 제일 중요한 건 즐거움, 재미를 경험하는 거죠. 우울증 환자들은 장기간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기 때문에 즐거움이나 재미, 행복을 느낄 기회가 매우 적어요. (도파민이 뭐죠...?ㅜ) 그런데 삶에서 즐거움도 재미도 행복감도 없다면 살 이유가 뭘까요. 우울증 환자들이 삶의 의미를 못 느끼고 이런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생각하는 건 그런 이유인 경우가 많지 않을까요. 인생에 즐거움은 없고 오로지 고통스러운 일만, 상처들만 가득하니까 너무 아파서요.
저는 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자살을 시도할 무렵에 저 자신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쇠망치로 머리를 여기저기 얻어맞고 있다고 느꼈어요. 평생 그렇게 이리저리 쇠망치를 맞으며 끌려갈 것 같다고, 그게 인생같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너무 아프고 불행해서 죽는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살하는 것이 이 고통에서 저를 해방시켜주는 유일한 탈출구라고 생각했어요.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우울증이 심한 사람들은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순간적이고 헛된 것이더라도 '즐거움'이 정말 중요합니다. 우울증이 어느정도 낫고 나면 운동도 하고 호기심이나 관심도 돌아오고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덜 힘들어지기 때문에 이런저런 모임도 나가고 취미생활도 할 수 있어요. 건전한 방식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죠.
그런데 거의 폐인 상태로 있을 때는 그게 불가능하죠. 아무 의욕도 희망도 호기심도 관심도 없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을 찾아주기도 힘들고, 침대에서 일어나기도 힘들기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거나 운동을 하러 나가라고 등을 떠밀어도 소용이 없어요. 그럴 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건 누워서도 할 수 있는 게임이나 인터넷 커뮤니티 정도 뿐이에요.
게임이나 인터넷 커뮤니티를 하면서 조금이라도 즐거움을 느껴서 중독이 된다면, 그건 오히려 좋은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진짜 게임 중독자는 범죄를 저지를 수가 없다는 말도 있죠. 감옥에 가면 게임을 못하니까요. 이건 농담같지만 어느정도는 일리가 있는 말이에요. 게임에 중독되었다는 건 게임이 주는 즐거움과 쾌감을 느껴서 그걸 반복적으로 느끼고 싶기 때문에 계속 게임을 하려고 한다는 의미죠. 중독자는 이미 '즐거움'을 경험한 거에요. 그리고 게임을 계속 하기 위해서라도 살아야 된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죠. 게임이 주는 즐거움이 비록 덧없고 헛되고 순간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이 그 순간을 위해서라도, 그 순간만이라도 살고 싶다고 느낀다면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즐거움을 느끼다보면 알게 모르게,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것처럼 아주 조금씩 정신적인 힘이 생기는 것 같아요. 사실 사람이 살고 싶다는 의지만 있다면 우울증에서 회복될 가능성이 많이 높아집니다. 겉보기에는 폐인같은 게임중독자이고 우울증이 더 심해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저는 이 상태가 오히려 완전히 무기력해서 어떤 중독조차 원하지 않고 죽기를 바라는 상태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해요.
(3) 어차피 게임 안한다고 해도 일상생활도, 공부도,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손해보는 게 없어요.
반대로 말하면 게임을 안한다면 일상생활이나 공부나 일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우울증 환자분들은 게임을 하지 않는게 나아요. 조금 더 건전한 방법을 찾아가시는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운동중독, 취미중독, 모임중독, 학원중독... 더 외향적이고 건전한 것들을 찾아서 밖으로 나가세요.
하지만 게임을 안한다고 해도 어차피 일상생활이 다 무너지고 무기력하게 누워서 주무실 분들은 손해볼게 없어요. 음... 저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제 인생에는 우울증으로 인해 약 10년 넘는 시간이 통째로 날아갔어요. 우울증 하나가 치료되는데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는 거죠.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5년쯤 집에서 하루종일 게임을 하다가 6년째부터 우울증에서 회복되어서 7년째 되는 해에 많이 나아졌다면, 저보다 훨씬 빠르신 거에요. 우울증이라는 학교를 조기(?) 졸업하신 거죠. 웃프지만 정말 그럴수도 있어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게임중독에 빠져서 헤매는 우울증 환자인 가족을 바라보는 입장이든 그런 우울증 환자 본인인 입장이든 '느긋하게' 생각하셨으면 좋겠어요. 막말로 '죽는 것보다 살아있는게 낫다'는 생각만 하고, 마음의 여유를 갖고 낭비되는 시간들, 흘러가는 청춘(흑흑...)을 담담하게 바라보고 '이게 다 치유되어가는 과정이다. 치유되는데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리고 나는 아직 1/10 정도밖에 오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시는 것도 어떨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느긋할 수 있냐고 말씀하실 분들도 계시겠죠. 현실적이고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결혼, 육아 포기하면 인생에 10년에서 15년 정도는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아요... 저출산 시대에 좋은 방법은 아니겠지만요.ㅎㅎ)
(4) 극도로 불안하고 스트레스 받는 상황에서 몰입할 수 있는 게임이 있으면 사람을 살릴 수도 있어요.
이건 자살예방 방법으로 누구나 하나 구비해두면 좋은 응급상자라고 생각해요. 우울증 증상의 정도에 관계없이요. 평소에는 하지 않더라도 극도로 불안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 생길 때 바로 열어서 1시간이라도 머리를 식힐 수 있는 게임을 몇개 스마트폰에 다운받아놓는 것도 괜찮은 방법입니다. 어려운 게임보다는 어린아이들도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쉬운 게임이 더 좋고요.
예를들어 제가 응급용으로 구비해놓고 있는 게임은 '비내리는 단칸방'이라는 게임과 '살아남아라! 개복치'라는 게임이에요. 단순하고 몰입도가 좋아서 1시간 정도는 버틸 수 있는 게임들이에요. '비내리는 단칸방'은 저와 비슷한 우울증 환자가 앉아있는 단칸방에서 환자를 돌보는 게임이라 저 자신을 돌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도움이 되고, '개복치' 역시 저의 개복치 같은 상태를 은유하는 것 같아서 몰입이 좀 되는 편이에요.
불안감, 긴장감, 스트레스가 쭉쭉 올라갈 때 90정도가 공황증상이라면 100은 자살이겠죠. 순간적으로 버틸 수 있으면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1시간만 다른 것에 집중해서 불안, 긴장, 스트레스를 10 정도만 떨어뜨려도 자살까지는 가지 않을 수 있어요. 누구라도 붙들고 나와 1시간만 같이 있어달라고 부탁해도 되지만 그럴 수 없다면 게임 중독을 통해서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저는 자살 시도 경험자라 자살 직전의 오묘한 느낌을 알고 있어요. '아... 이제 더 견딜 수 없다. 이게 내 한계다. 죽어야겠다.'라면서 머리가 갑자기 개운해지고 차가워지면서도 심장에는 눈물이 차오르는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자해할 땐 머리가 뜨겁고 감정이 북받쳐오르는데 자살을 시도할 땐 반대로 머리가 차가워지고 감정도 가라앉더라고요. 그 느낌은 제가 불안, 스트레스, 긴장이 100에 다다랐을 때 찾아와요.
그런데 게임중독에 빠지면서부터는 불안, 스트레스, 긴장이 마구 올라가는 순간에 바로 게임을 하면서 머리를 식히고 그날따라 특별히 좋은 접속보상을 받고 (현실은 똥망인데 그깟 접속보상이 뭐라고 웃음이 나는지...^-^;) 같이 게임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그러다보면 불안이 조금씩 내려가서... 자살 시도에 진지하게 나아간 적이 한번도 없어요. 그리고 게임에서 유저들 사이에서 맡은 역할도 있고, 앞으로 받아야 될 보상도 있고, 캐릭터의 어떤 능력을 업시켜야 되는데 그게 90%쯤 완성되어가는 중이라서 기다려야 한다던가(!) 하는 사정이 항상 있었기 때문에 자살할 수도 없었어요. 아무튼 저한테는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5) 게임에서 형성하는 '임시 자아'는 현실의 '진짜 자아'를 치유하는데 도움이 되어요.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하는 게임을 하다보면 그 안에서 일종의 '임시 자아'를 형성하게 됩니다. 캐릭터를 생성하면서 직업, 외모 등을 고르듯 자기도 모르게 그 캐릭터에게 부여할 성격도 고르게 돼요. 게임속에서의 저는 현실에서의 저와 성격도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여러가지 보여주는 모습들이 달라요. 현실에서는 점잖은 사람이 키배 뜰 때는 굉장히 난폭한 사람이 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게임이나 인터넷 등 온라인에서의 자아는 현실에서의 '진짜 자아'와 많이 다를 수 있죠.
사실 저는 게임을 시작할 때 현실의 자아가 굉장히 위축되어있는 상태였어요. 오랜 우울증을 앓으면서 저는 제 현실의 자아를 많이 부정하고 죽이고 싶어하고... 그 모습을 보는 것도 느끼는 것도 견딜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어요. 제가 너무 싫었어요. 싫어서 죽이고 싶기도 했죠.
그래서 현실에서 삶을 시작(?)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게임을 시작해서 캐릭터에 애착을 갖게 되면서 그 캐릭터를 마치 저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어요. 제가 갖고 싶었던 성격을 그 캐릭터에게 부여하고 그런 성격의 사람인 것처럼 게임속에서 살아갔죠. 그렇게 만들어나간 '임시 자아'는 실제로는 현실의 '진짜 자아'와 같은 거였죠. '임시 자아'로 현실의 '진짜 자아'를 덮어놓으니 저는 초라하고 견딜 수 없는 진짜 저 자신과 마주할 필요 없이, '안전하게' 자아를 만들어가고 치유할 수 있었던 거죠.
실제로 폐인처럼 살아가는 우울증 환자들은 사람을 만날 기회가 적다보니 자아를 유지하거나 성장시키기가 어려워요. 사람들 속에서 갈등도 겪고 화합도 하면서 그 가운데에서 자아를 느끼고 발전시켜 나아가게 보통인데 그럴 기회가 많이 없으니까요. 어떤 사회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책임지면서 자존감을 키울 기회도 없죠. 그렇다고 현실에 뛰어들어 사람들과 만나자니 우울증이 심할 땐 그게 너무 힘들죠. 상처받고 오히려 병이 심해질수도 있고요. 그런데 우리의 자아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은 게임속에도 있어요. 게임속의 사람들은 현실적인 관련을 갖지 않기 때문에 안전하죠. 그런 환경속에서 안전하게 자아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이건 게임 말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가능하죠.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는 통찰력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든가 아니면 사람들의 분노를 낚는 솜씨좋은(?) 어그로꾼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여러 자아를 만들 수 있죠. 저는 두 가지 경험 모두 제 자아 형성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현실의 자아를 대면하는 것이 너무 힘들 때는 게임으로 시작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6) 게임중독에서 벗어나는 방법
마지막으로 가장 걱정되는건 게임중독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하면 결국 우울증 치료도 말짱 헛것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일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제 '진짜 자아'가 자라나고 외부활동을 늘리고 우울증에서 회복되면서 게임중독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났어요. 게임이 지겨워지고 게임을 하는게 오히려 힘들어졌어요. 그런 시간이 반년 정도 계속되고 중독에서 벗어나려고 힘들게 노력하고 실패하고 하다가 어느순간 끊게 되었어요. 인터넷 커뮤니티 중독은 아직 진행중이네요. 노력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 시험준비 중이라 불안한 순간이 많고 외롭기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끊기가 쉽지는 않고 줄이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중독일 때는 즐거움이나 쾌락이 훨씬 강하고 다른 생각은 나지 않는데, 중독에서 벗어나올 때는 의식적으로 제 행동이나 감정이 자각이 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게임이나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어가는게 즐겁지 않다는 기분을 확실히 느끼고, 다만 지금 많이 불안하고 스트레스를 받아서 즐겁지는 않지만 뭔가 다른 일에는 집중할 수 없어서 게임이나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어간다는 것을 자각하게 돼요. 중독인 상태에서는 게임이나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을 방해하는 외부활동이나 소모임, 취미활동이 오히려 귀찮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중독에서 벗어나는 단계에서는 소모임 등 그런 외부활동들이 훨씬 즐겁게 느껴져요.
저는 외부활동을 하고 운동이나 취미생활을 하고, 일상생활과 사회적 관계들을 회복해가면서 중독에서는 자연스럽게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건 전문적인 소견도 아니고 어떤 연구결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마다 개인차가 클 수 있으니 이런 점에 대해서 잘 생각해서 결정하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이미 어떤 중독에 빠지신 분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겠지만요. 그런 분들은 게임이든 뭐든 중독되어있는 것에 대해 괜히 죄책감이나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대신 이 글을 읽어보시면서 좋은 점을 취해가셨으면 좋겠어요. 느긋하게, 언젠가는 벗어날 거라는 믿음을 갖고, 이 모든 것이 우울증에서 나아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시면서요.
다만 이건 전적으로 제 경험에 근거해서 쓴 이야기이고, 제가 게임중독에 빠진 것은 성인이 된 이후이기 때문에 저는 청소년분들에게는 이 방법을 권해드릴 수 없을 것 같아요. 저도 청소년기를 겪어봐서 알지만... 고작 나이 몇살이 무슨 차이가 있나 싶지만 정말 큰 차이가 있긴 해요. 청소년기의 저는 정말 제가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청소년분들은 좋든 싫든 매일 다녀야되는 학교가 있고 많든 적든 매일 보는 친구들이 있잖아요. 게임중독을 정당화하면서 깊이 빠져들지 말고 그 시간에 친구를 만나서 같이 '적당한 시간동안' 게임을 하거나 부모님에게 현재 힘든 점을 솔직히 말하고 도움을 구하는게 더 좋은 방법같습니다. 부모님들이 완고해보이고 전혀 내 말을 들어줄 것 같지 않다고 느끼는 경우도 많으시겠죠. 조금씩 말을 꺼내도 제대로 들어주지 않는 경험을 해보신 분도 많으시겠죠. 하지만 부모님들은 보통 자식의 고통을 잘 모르고 가볍게 생각하고, 단호한 태도로 너의 정신머리 문제라고 결론을 냄으로써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억압하듯 대처하시는 거고, 자식이 죽고 싶다고 말하는데도 문제를 가볍게 취급하거나 자식을 다그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자식이 죽겠다고 말하면 마음속으로는 겁을 먹어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걸 이해는 합니다. 억압의 끝판왕인 저희 아빠조차도 제가 죽겠다고 할 때 '나가 죽어라!'라고 세게 나갔지만 속마음은 제가 진짜 죽을까봐 두려웠대요. 그래서 엄마가 저를 자살하지 못하게 잘 달래주길 바랐대요.
그러니 이 글을 보고 괜히 공감이 갈만큼 힘들고, 뭔가에 중독된 청소년분들이 있다면 이 글대로 하지 마시고 부모님에게 도움을 꼭 청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 글이 오히려 해롭고 도움이 안 될 것 같다고 느끼시는 성인분들은 이렇게 우울증을 치유한 사람도 있구나... 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보고 넘어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