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렌지나무 Feb 04. 2020

그가 나를 사랑한 방법

망한 연애 이야기1


#전남친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


1.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계속 부담스럽게 쳐다본다.

2. '좋아해'라는 말을 많이 한다.

3. '내가 이렇게 표현 잘하는 사람인줄 몰랐어!ㅎㅎㅎㅎ'

    이러면서 혼자 뿌듯해하고 기뻐한다.


 그 흔한 '밥을 사준다'는 선택지도 없었다. 아...... 물론 우리가 만났던 시간의 대충 절반 동안 그는 밥을 샀다. 하지만 나도 절반 동안 밥을 샀으니 우리는 결과적으로 더치페이를 한 셈이다. 그는 그것을 밥을 사준 것으로 착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간혹 나는 내 차례가 아닌데도 밥을 사겠다고 한 적이 있다. 그러면 그는 지갑을 꺼냈다가도 '너가 낼래?' 이러면서 지갑을 고이 집어넣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너한테 쓸 돈을 아낀 적은 없어!'라고. 전남친은 내가 돈을 내겠다고 할 때 그걸 가로막고 자기가 돈을 낸다고 하면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할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연인 사이에 진짜 그렇게 생각했다고 해도 웃기는 일이지만, 그는 그렇게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나에게 자기가 유학간 뒤에 지방에 사는 자기 부모님을 가끔 찾아뵈어 달라는 부탁은 참 대범하게도 했었다. 말이 부탁이지 고맙다거나 미안하다거나 하는 말은 1도 안 붙인채.


 그건 핑계고 사실 그는 돈을 아낀게 맞았다. 어느 날 아침 데이트를 하려고 만났는데 파스타집이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우리는 스벅에 가서 기다리기로 했고, 스벅까지 걸어가면서 남친은 친구의 어떤 부탁을 들어줬더니 친구가 여친이랑 먹으라면서 스벅 기프티콘을 보내줬다는 이야기를 했다. 기프티콘 이야기를 안했으면 모를까 했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남친이 음료를 살 줄 알았다. 그날은 내가 점심을 살 차례이기도 했고. 그런데 남친은 뒤도 안 돌아보더니 자기 음료수만 기프티콘으로 주문하고 테이블로 갔다. 나에게는 음료를 마시겠냐, 나눠 먹을까 이런 말도 한 마디 없었다.


 그렇게 스벅에서 기다리다 파스타집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밥값은 내가 냈다. 그러고 나서 명동성당으로 이동해서 젤라또를 먹으러 갔다. 세 가지 맛을 고를 수 있었는데 남친은 나에게 자기는 어떤 맛을 골랐다고 이야기했고, 나는 남친과는 다른 세 가지 맛을 골랐다. 나는 내가 고른 것을 주문했는데 남친은 자기 것은 주문하지 않고 내가 주문한 2000원짜리 젤라또 컵 값만 계산하고 스푼 두 개를 달라고 해서 그것을 당당하게 나눠먹었다. 풋풋한 20대 커플도 아니고 30대 초중반의 남녀 둘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남친은 친구한테 받은 기프티콘으로 근처 스벅에 가서 이야기를 더 나누자고 했다. 그때 모든게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남친은 그날 자기가 살 커피값을 미리 계산해둔 거였다. 그래서 맨 마지막에 그 기프티콘으로 자기 몫만큼의 커피값을 낼 생각이었기 때문에 아침에 갔던 스벅에서는 딱 자기 것만 시켰고, 점심을 먹고 간 젤라또 집에서는 2000원짜리 컵 하나만을 시켰던 거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하니까 전남친은 자기가 연애가 처음이라 몰랐다고, 자기는 절대 계산해서 그런 거 아니라고 억울해했다. 나를 만나기 전에 롱디로 3년을 사귄 여친이 있었다니 연애가 처음도 아니거니와 이건 연애가 처음인거랑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다. 친구 사이에서도 그렇게 행동하진 않을텐데. 아마 그는 의식적으로 계산한게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계산했을지도 모른다. 의식은 모르는 일이고 무의식이 계산했으니, 의식 속에서 그는 여친을 위해주는 자상한 남친이 될 수 있었던게 아닐까.



 난 전남친과 만나면서 단 한번도 나는 싼 데서 사면서 전남친에게는 비싼 데서 밥을 사게 한 적이 없었다. 안쪽 쇼파 자리도 양보한 적이 더 많았다. 나는 남친과 평등한 관계였으면 했고 남친에게 남자라는 이유로 부담을 더 지워주고 싶지 않았다. 그랬더니 남친은 나와의 관계에서 마음껏 돈을 아꼈고, 아낀 돈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레코드 판을 실컷 사들였다.


 나는 전남친의 생일에 그가 원했던 선물과 직접 만든 앙금 떡 케이크를 가져갔지만 그는 내 생일에 내가 자신에게 준 선물과 가격대가 비슷한 선물만 포장없이 가져왔을 뿐, 흔한 조각 케이크 하나 사오지 않았다. 선물을 사온게 고마워서(?) 내가 밥을 사겠다고 했더니 그는 그걸 사양 한번 없이 받아들였다. (남친의 생일에는 식사 없이 내가 만든 케이크를 나눠먹었다.) 커피도 내가 사려고 하자 그는 '너가 낼래?' 이러면서 지갑을 닫고 내가 내 생일날 저녁과 커피를 계산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나는 항상 아빠는 엄마에게, 엄마는 아빠에게 맛있는 반찬을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서로 얹어주고 양보하는 것을 보면서 자라서 연인관계에서도 그런 마음 씀씀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남친이 낼 차례에도 가끔은 내가 내겠다고 했고 그런게 연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남친은 달랐다. 생일 저녁에조차 그가 사오는 케이크를 먹고 그가 사주는 밥을 먹으려면 나는 그에게 '내 생일이니까 케이크를 사와라', '내 생일이니까 밥과 커피는 네가 사라'라고 지시해야 했나보다.


 처음에는 방식이 나와 다른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해봤다. 여친이 '내가 낼게'라고 말할 때 자기가 그걸 만류하고 계산해버리면 여친의 자존심이 상할 거라고 생각하는게 그의 방식이고,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여친을 존중했던 거라고 생각해봤다. 그런데 그런 경우라면 여친이 '내가 낼게'라고 말하지 않는 때에는 자기의 차례가 아니더라도 밥을 사거나 뭔가를 해주는 것들이 있어야겠지만, 전남친은 그런 것도 없었다. 자신이 낼 차례가 아닐 때는 절대 먼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나에게 사랑을 표현한 방법은 딱  가지였다.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부담스럽게 쳐다보는 거랑 '좋아해'라고 자주 말하는 것, 그리고 자기가 이렇게 표현 잘하는 사람인줄 몰랐다면서 혼자 뿌듯해하고 기뻐하는 것.


 차라리 내가 힘들었을 때 밥 한번을 사주는게 나한테는 진짜 애정으로 느껴졌을 텐데. 물론 그가 잘못한 것은 없다. 나는 내 밥값을 냈고 그는 그의 밥값을 낸 거니까. 하지만 계산하는게 눈에 보이는 그의 행동에서 애정을 느끼는 건 쉽지 않았다. 행동 없이 말 뿐인 그의 사랑은 공허했다.


 

 전남친과 사귀었던 작년에 나는 꽤 힘든 시간을 겪고 있었다. 아빠의 우울증이나 집안이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운 것, 몇년째 불합격하는 시험 문제 등등.


 알바를 열심히 했던 것도 단지 우울증을 견디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친과의 데이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돈이 없어서 기프티콘이 아니면 커피 한잔 못 사마시는 상황이 몇년째 계속되고 있었는데 남친이 없을 때는 괜찮았지만 (커피를 원래 좋아하는 편이 아니긴 하다) 남친이 생기니 한달에 몇 만원이라도 돈이 필요해졌다. 더군다나 남친은 곧 유학갈 예정이었다. 남친이 떠날 때 없는 형편에나마 50만원 정도라도 들려보내야 할 것 같은데 그때 나는 통장에 잔고가 0원이었다. 그래서 하루에 5만원 벌자고 김포나 의정부 같은 곳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나는 불안장애가 있는 전남친을 힘들게 하지 않으려고 나름 밝고 기운찬 목소리로 이런 어려운 사정들을 조금씩, 조잘조잘 이야기하곤 했다. 자존심 때문에 다 말하진 못했지만 남친도 내가 일당 5만원 벌려고 멀리 돌아다니고, 거기서 버스 환승비라도 아껴보려고 한두시간 거리는 걸어다닌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 목소리가 밝아서인지 그는 그런 내 이야기들을 들으면서도 항상 예의 그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나를 넋놓고 바라보기만 했고 내가 재잘대는게 귀엽고 너무 좋다고 행복해했다. '혼자' 행복해했다.


 나중에 전남친에게 내가 그렇게 힘들었던걸 몰라주냐고 따졌더니 전남친은 당황하면서 너가 환승받으려고 동동거리고 이런걸 알았다면 자기가 밥값을 다 냈을 거라고 말했다. 환승 걱정 같은건 일상적으로 카톡하면서 정말 자주 이야기했던건데... 전남친은 자기의 감정에 도취되어 내 말의 대부분은 흘려들었던 것 같다.



 실제로 우리가 결정적으로 헤어지는 계기가 됐던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내가 너무 힘들어서 오랜만에 진지하게 자살을 고민했던 다음날, 우리는 데이트를 했다. 나름 즐거웠고 분위기도 좋았다. 내가 정신적으로 지친 상황이라 이야깃 거리를 생각해내는 것도 좀 힘들었고 나 혼자 재잘대고 남친은 평소처럼 '응응ㅎㅎ'하면서 나를 기쁜 눈빛으로 쳐다만 보는게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데이트였다.


 헤어지기 전에 저녁으로 카레를 먹으면서 나는 전날 자살을 생각할만큼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남친에게 했다. 전남친은 내 이야기를 듣고도 행복하고 기쁜 표정이었다. 밥을 먹고도 전남친이 일어나지 않길래 내가 계산을 했고 남친은 이번에도 '너가 낼래?' 이러면서 무심하게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때 머리로 피가 솟구치는 기분이었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파사삭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명상 수업을 들으러 갈 시간이었다. 전남친은 그날 데이트가 너무 좋았고 행복했다는 말을 계속 반복하면서 나를 안으려고 했고 키스도 하려고 했다. 그는 헤어지는걸 너무 아쉬워하면서 명상 수업에 안 가면 안되냐고, 같이 있고 싶다고 칭얼거렸다.

 

 만일 아까 전 내가 자살 생각을 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남친이 나를 걱정하면서 무슨 일 있었냐고, 지금은 괜찮냐고 물어보면서 내 이야기를 듣고싶어 했다면 나는 당연히 명상수업에 가지 않고 남친과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여친이 죽든 말든 데이트가 너무 행복했다며 방방 뛰는 이 남자와는 1분도 더 같이 있기 싫었다. 나는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고 전남친을 집으로 보냈다.


 그날 저녁 카톡에도, 다음날 아침 카톡에도 나에 대해 걱정하고 위로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너무 행복하고 기쁘다는 이야기를 계속 늘어놓았다.


  나는 폭발해서 그에게 따졌다. 걱정하는 말 한마디 없는 그가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랬더니 그는 당황하면서 무슨 말을 해야될지 몰랐고 조심스러워서 그랬다고 변명했다. 솔직히 정말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말주변이 없고 조심스러워서 위로하는 말은 못했어도 밥은 사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때도 '너가 낼래?'라며 지갑을 닫았다.

 

 싸우는 도중 나는 처음으로 그에게 징징댔다. 내가 힘들었던 이야기들, 미칠 것 같은 상황들에 대해서 전부 이야기했다. 화를 낸게 아니라 힘든 것들을 알아달라고 하소연을 한 거였다. 거기에 대한 그의 답은 이거였다. '나 버리지 말고 제발 고쳐써줘. 다른 남자 만나서 처음부터 맞추는 것보다는 나 고쳐쓰는게 너한테도 좋을거야. 제발.'


 그는 내 고통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이별당하지 않는 거였다. 자기 곁에서 즐겁게 재잘대는 여친이 있고, 그래서 자기가 행복해지고 남들에게도 정상적인 남자로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 그의 관심사는 그게 전부였다. 그는 처음부터 자기 연애감정에 도취되어 있었을 뿐 나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나를 알고 싶어하고 내 말에 귀기울인 적이 없었던 거였다......


 브런치에 연애를 끝낸다는 글을 쓰고도 전남친과 몇달을 더 사귀었지만 결국은 이렇게 끝을 보고 말았다. 이제는 내가 그를, 그와의 구질구질한 연애를 혐오한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 지나가다 전남친과 비슷한 스킨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고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자기 감정만 중요하고 상대방의 감정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공감하려고 노력도 하지 않는 것도 바람이나 신체적인 폭력 못지 않은 폭력이라는걸 전남친이 알려주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노들서가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