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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Feb 16. 2020

결혼 생활에는 저울이 없다던데...

망한 연애 이야기2 


 엄마, 아빠의 결혼 생활에는 저울이 없었다. 성격 차이로 인한 다툼은 잦았지만 엄마, 아빠는 성격 외의 모든 영역에서는 서로에게 헌신적이었다. 


 아빠는 외벌이지만 매일 새벽에 일어나 집안 청소를 하신다. 아빠는 엄마 힘들다고 화장실 청소도 본인이 해야된다고 고집하지만 엄마는 아빠 팔이 아파서 하면 안된다고 아빠가 없을 때 몰래 화장실 청소를 해놓으신다. 맛있는 반찬도 서로 더 먹이려고 투닥투닥 하시고.


 한번은 이유를 물어봤더니 아빠가 그러셨다. 부부 사이에는 내가 편하면 상대방이 힘든 거라고. 그리고 상대방이 힘들면 결국 내 손해라고.

 

  맞는 말이다. 우리 아빠가 타고난 성격이 좋거나 이타적이라서 엄마에게 헌신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아빠는 결혼생활의 본질을 뚫어보고 있었을 뿐이다. 결혼하면 부부는 한 배를 타게 되고, 한 사람이 지쳐 쓰러지면 남은 사람이 두 사람 몫의 노를 저어야 한다. 그러니 평소에 니 일 내 일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돕는게 결국은 나 자신을 위한 일이 된다.


 그래서 부부간에는 저울이라는게 없다. 생활방식이나 성격적인 문제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너의 이익이 내 이익이고 너의 손해가 내 손해인 관계니까. 이게 내가 부모님에게서 배운, 그러나 나는 아직 모르겠는 부부의 생활이다.


 남자친구와 결혼을 이야기할 때 나는 막연하게 우리의 결혼생활도 이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정확하게 어떤 부분이 이상한지는 몰랐지만 나는 점점 결혼이 부담스러워졌다.



 남자친구는 연애 초반부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결혼하고 나면 명절이나 제사 때 자기 아버지가 나를 오라고 부르실텐데 내가 힘들까봐 걱정된다고.

 

 남자친구는 6~7년 예정으로 유학을 앞두고 있었다. 결혼하고 그가 유학을 가고 나면 나는 명절에 혼자 그의 집에 내려가서 제사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힘들까봐 걱정된다는걸 보면 남자친구가 단순히 명절 전에 시댁에 인사만 드리고 오는 상황을 예정하는게 아닌건 분명했다.


 그의 집안은 보수적이었고 명절에는 오촌당숙이라는, 나에게는 낯선 촌수의 어른들도 오신다고 했다. 기혼 남성들은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제사를 지낸다는데 그런 집에서 여자들만 음식 장만에 동원되는건 당연했다.


 남자친구가 단 한번도 나에게 명절 때 자신도 눈치껏 같이 설거지하고 일하겠다는 다짐조차 하지 않은걸 보면 그는 여자들만 노동하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다. 하긴 명절 당일은 시할머니 댁에서 하루종일 있는다니 남편에게 설거지라도 시켰다간 고령의 시할머니가 쓰러지실지도 모른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와 결혼하려면 그의 집 관습도 받아들여야 하니까. 그와 함께 살기 위해서 내가 감당해야할 일이었다.



 사실 그런 명절은 낯설었다. 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몇달 전에 돌아가셨는데 그 뒤로는 명절이 흐지부지 되어버려서 우리 가족끼리만 명절을 보낸지가 20년 가까이 된다. 우리 가족에게 명절은 등산 갔다가 피자 먹고 돌아오는 그냥 평범한 휴일이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도 우리 엄마에게는 그런 명절(?)이 없었다. 한번은 아빠 회사일로 명절 당일 새벽에 내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자 넷째 큰엄마가 동서는 전날 버스로 내려오게 하라고 아빠에게 전화했다. 아빠의 형제들은 5남 3녀의 대가족이었고 그만큼 명절 준비도 큰일이었을 것이다. 아빠 세대 기준으로는 며느리가 먼저 내려가서 일을 돕는게 당연했다.


 그런데 아빠는 큰엄마에게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다. "식모 시키려고 데려온거 아니오!"

 

 만일 아빠에게 저울이 있었다면 아빠는 저울 한쪽에는 자신이 벌어오는 생활비를, 다른 한쪽에는 엄마의 시댁에서의 가사노동을 올려놨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빠에게는 그런게 없었다.


 아빠에게 엄마의 가사노동은 당연한게 아니었다. 엄마의 가사노동은 아빠가 버는 돈에 대한 대가가 아니었다. 아빠는 자기가 요리를 하기 힘드니까 엄마가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하셨다. 아빠와 함께 명절에 할머니댁에 방문해서 엄마가 일을 돕는건 엄마가 아빠를 도와주는 것이지만, 아빠 없이 일을 하러 내려오라는 건 아빠에게는 엄마를 식모 취급하는 걸로 느껴졌나보다.



 '그럼 형수들은 식모냐...!'는 생각이 들지만 아빠는 페미니스트라서 불평등한 명절 문화에 대해 화를 내신게 아니었다. 아빠는 단지 자기 아내에 대해서 책임을 다하려고 했을 뿐이다.


 할머니가 마흔에 얻은 귀한 막둥이 아들인 우리 아빠는 친가를 좌지우지하고 있었고 아빠의 성질머리는 아빠를 키운 큰엄마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아빠와 할머니는 엄청 돈독한 모자지간이었지만 할머니도 아빠의 성질은 어쩌지 못했다.


 그렇게 든든한 자기 편이 있는 시댁에서 엄마는 큰엄마들이 조금 남겨준 일들을 하면서 명절을 보냈다. 오히려 큰엄마들은 성격이 불같은 남편과 사는 엄마를 항상 안쓰럽게 생각하셨다고 한다. 큰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엄마가 아빠 없이 매주 열무김치나 큰엄마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만들어서 지방에 내려갔다 오시곤 했는데 그것만 봐도 엄마의 '명절'이 괜찮았다는걸 알 수 있다.



 엄마, 아빠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나는 남편 없이 독수공방하면서 직장 다니는 (그때쯤이면 수험생활은 어쨌든 끝나고 뭐든 일을 하고 있을 테니까) 며느리에게 명절이라고 일을 시키려고 내려오라 할 거라는 그 상황이 잘 이해되지는 않았다. 어른에게 이런 표현을 써도 괜찮다면, 내 기준에서는 좀 '무례한' 요구였다.


 남자친구의 말에 따르면 그의 집에서 여자들은 제사라는 의식에 참여하지 못한다. 부엌에서 음식만 하고 절을 하는 곳에는 못간다나. 그럼 내가 내려가서 할 역할이란 오로지 음식 장만과 설거지, 시어른들  접대하는 것 뿐인데 이건 나 자신에게 의미있고 보람있는 노동이 아니다. 며느리들도 제사라는 행사에 가족의 일원으로 참여한다면 이건 새로 생긴 내 가족의 행사지만, 그냥 부엌일만 하는건 달랐다.


 하지만 나는 이런 명절도 이제는 나와 남자친구가 함께 꾸릴 '우리 가정'의 일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남자친구 집안의 관습이나 제사가 아무 의미가 없지만 그의 부모님에게는 의미있는 행사이기 때문이다.


 그의 부모님은 남자친구가 사랑하고, 효도해야할 분들이다. 결혼하면 나는 남자친구와 그 짐을 나누어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부당하게 느껴졌지만 우리가 함께 경험해야하는 결혼생활의 일부라고 생각했고 용감하게 도전해보려고 했다.



 나에게는 우리만의 가정이라는게 정말 소중하게 느껴졌다. 결혼에 대한 환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무시하고 욕해도 내 편이 되어줄 사람,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서 함께 노를 저으며 투닥투닥할 사람이 생긴다는게 나에게는 의미가 컸다.


 더이상 외롭고 싶지 않았다. 혼자서 가시를 곤두세워야 하는 삶이 아니라, 둘이 맥주 한잔 하면서 세상쯤 가볍게 비웃어버리고 우리끼리 즐겁게 살다가면 그만이라고 해버릴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


 남자친구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유학 가기 전에 결혼하기로 했으니 결혼은 1년 남짓 남아있었다. 우리는 몇달간 결혼 생활에 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나에게 여러가지 짐을 지워주었다. 그 없이도 나 혼자 참여해야할 명절이나 제사, 양가 부모님 생신 같은 것들, 그의 부모님이 아이를 낳으라고 강요하실 거라는 것 등등(우리는 각자 딩크가 확고한 상황). 우리가 같이 헤쳐나가야 할 일들이었다.


 그런데 나는 점점 결혼이 부담스러워졌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던 어느날, 나는 문득 우리 가정을 위해서 내가 감당해야될 일은 많은데 남자친구가 감당하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걸 알게 됐다.



 우리 결혼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이거였다. "왜 유학을 같이 안가? 어떻게 6년씩 떨어져 살아?" 이유는 하나였다. 우리 둘 다 돈이 없었다. 그가 가진 전재산은 2000만원 안쪽이라고 들은 것 같다. 그가 유학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부모님의 지원과 장학금이 필요했다. 그의 부모님도 여유가 있어서 지원해주시는게 아니라 건강도 좋지 않으신데 일을 해서 도와주시는 거였다. 그는 비자 문제 때문에 내가 현지에서 일을 하는게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3년간 받은 월급의 반 이상을 레코드판이나 턴테이블 오디오를 사는데 썼다고 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모으지 못한 것을 그도 아쉬워했다. 그때는 나와 연애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결혼 생각도 없었으니까 그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지금부터 같이 돈을 모아서 유학 3~4년차 쯤에라도 함께 살자는 계획 자체가 없었다.


 작년 한해 동안 그는 직업이 없었고, 학교를 다니지도 않았다. 유학 준비를 하는 과정이 힘든건 알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렇게 열심히 준비하는 것도 아니었다. 매일 친구를 만나서 밥을 먹고, 주말에는 친구들과 약속을 세 개씩 잡을 때도 있었다. 아침에는 10시쯤 일어나서 친구들과 점심을 먹을 때까지 뒹굴거렸고 저녁 때는 집에 와서 음악을 들으면서 뒹굴거렸다. 가끔 알바를 하는 것 같았지만 그건 레코드판을 사기 위해 하는 알바 정도였다.


(뒹굴거린다는 건 그의 생활을 폄하하는 표현이 아니라 그 자신이 나에게 직접 말했던 것이다. 내가 아침 저녁으로 뭐하는 중이냐고 물으면 그의 대답은 거의 항상 "음악 들으면서 뒹굴거리고 있어ㅎㅎ"였다.)


 나는 그렇게 뒹굴거리거나 친구들과 매일 밥 먹고 커피 마시면서 몇 시간을 보낼 시간이 있다면, 나중에 살림을 합치기 위해 돈을 벌 시간도 있다고 생각했다. 파트 타임으로 그도 돈을 좀 벌고 나도 단기알바가 아니라 좀더 많이 벌 수 있는 알바를 해서 같이 돈을 모으다가 그가 내년에 유학을 가고 나면, 그때는 나도 수험생활을 접고 여기서 취직해서 2~3년 정도 벌면 그의 유학 4년차부터는 함께 살 정도의 여유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도 장학금을 받을 테니까.


 그러나 그는 빈말로라도 같이 가자거나, 함께 살 수 있는 계획을 세워보자거나 하는게 전혀 없었다. 그냥 당연히 자기 한 몸 챙겨서 유학을 떠나는 걸로 생각하면서 유학 생활 때문에 자기의 우울증이 심해지지 않을까 하는 것만 걱정했다. 돈을 모으지도 않았다. 그는 여전히 판을 사들였고 친구들과도 매일 만나며 밥값, 커피값을 아끼지 않았다.


 떠나기 전에 장학금을 확보해둘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 그걸 위해서는 어학 시험 성적이 필요하다고 다. 그 중요한 시험 전날, 그는 나에게 데이트를 하자면서 하루종일 졸라댔다. 그러더니 결국 한 과목에서 낙방했다. 그는 괴로워하면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학금은 현지에 가서도 많이 있대. 어떻게든 되겠지 뭐. 지금은 생각 안할래." 결혼하자면서,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는 기회에 대해서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혼자 유학을 하고 올 거라면, 6~7년간 한국에 혼자 남아서 내가 어떻게 살지에 대한 계획이라도 생각했어야 했다. 우리는 항상 그의 유학 생활, 그의 주거 문제, 그의 식사, 그의 논문, 그의 우울증 관리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그는 내가 어떻게 먹고 살지에 대해서는 한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고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는 아마 지금처럼, 내가 우리 아빠 집에 살면서 나와 우리 아빠가 버는 돈으로 먹고 사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결혼하면 내가 지금 사는 부모님 집은 '내 집'이 아니라 '친정집'이 된다. 아빠는 나의 1차적인 부양 의무자가 아니다. 나를 1차적으로 부양해야 되는 사람은 남편이고, 남편을 1차적으로 부양해야 하는 사람은 내가 된다.


 지금은 내 집에 내가 사는 거지만 결혼한 이후에는 나는 친정집에 얹혀사는게 되어버린다. 남편이 책임져야 될 것을 아빠가 대신 맡아주는 상황이다. 그는 명절에 며느리 도리를 다하는 것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반대로 처가에 대해, 아내에 대해 그 자신이 어떤 부담을 지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개념이 없었다.


 나도 안다. 그가 여기에 신혼집을 차려놓고 가거나 내 생활비를 대줄 현실적인 여건이 안 된다는거. 나도 부양의무가 있으니까 오히려 내가 열심히 벌어서 그의 부모님 대신 유학비를 보조해줘야 할 상황이라는 거.


 그런데 내가 원했던 건 현실적인 능력이 되든 안 되든 이것도 우리 가정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관심을 갖고, 같이 고민하려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그의 부모님을 챙기고 도와드리는 것은 우리 가정의 일인데, 왜 결혼 후의 내 생계는 우리 가정의 일이 아닌걸까.


 섭섭했다. 물론 그도 결혼이 처음이니까 결혼하면 생길 책임같은 것에 대해 깊게 생각을 못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가부장제 전통에 따르는 명절이나 제사 문화를 나에게 가져오면서도 남편의 역할에 대한 개념이나 책임의식은 전혀 없었던 그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상대방에게 짐을 얹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결혼 후의 자기 역할에 대해서도 더 깊게 생각했어야 하는게 아닐까.


 아빠는 내가 그런 결혼을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까? 그는 자기 부모님에 대해서는 눈물 흘릴 정도로 깊은 죄책감을 느낀다면서도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는 늙으신 부모님 돈을 받아 유학간다는 것 때문이다) 딸이 결혼해서도 친정에 얹혀살고 명절이나 제사에는 시댁에 내려가서 '식모'처럼 일해야되는걸 지켜보는 우리 아빠가 무슨 감정을 느낄지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아빠를 달래고 설득하는 것은 생각만해도 힘든 일이었다. 가장 두려운 건 아빠가 남자친구에게 자존심 상하는 소리를 하는 상황이었다. 그도 남의 집 귀한 아들인데 나로 인해서 그런 소리를 듣는 상황을 내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빠를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아빠와 연을 끊을 정도로 싸우더라도. 이런 고민을 털어놓아도 그는 그냥 '응응ㅎㅎ'하고 듣기만 할 뿐이었다.


 젠장. 결국 다 내 일이었다. 우리의 일은 없었다. 결혼이 아니라 입양을 하는 기분이었다. 사랑이 빠르게 식어갔다.

 


 그때 알게 되었다. 우리 부모님의 결혼 생활에 저울이 없었던 것은 두 사람 다 헌신하려는 마음이 있때문이었다.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이 힘든걸 알아주고 자기가 해줄 수 있는게 뭔지 고민하고, 할 수 있는건 다 하는 그런 마음이라야 가능한 이야기였다. 내 오해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친구는 그런 마음이 없었다.


 우리 관계에는 저울이 생겼다. 물론 이건 우리 부모님의 방식이고 어떤 부부들은 저울이 있을 때 더 좋은 관계를 만들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닌 것 같다. 데이트 비용도 철저하게 반반, 생활비도 반반, 가사분담도 반반, 니 일은 니가 해야되니까 내가 대신 해주는거 기대하지 말 것, 니 부모는 니 부모고 내 부모는 내 부모니까 각자 셀프효도, 명절에는 각자 자기 집에 가는 걸로 하기... 저울을 놓고 따지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우리 관계에 저울이 생긴 이상 나도 그 없이 혼자 명절에 시댁을 방문할 생각이 없어졌다. 그가 처가에서 하지 않는 일을 나도 시댁에서 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부모님이 계속해서 아이를 강요한다면 나는 불쾌한 말을 들어줄 의무가 없으니까 차단해버릴 것이다. 나는 계속 돈을 벌어서 내 부모님에게만 효도하고 내 부모님의 일에만 관심을 가지겠지. 우리가 서로에게 뭔가를 부탁하려면 우리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정하고 그것을 이행해야 할 것이다. 몸은 더 편해지게 생겼는데 마음은 공허하고 외로웠다. 나는 혼자인 것처럼 다시 가시가 돋쳐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이게 더 편하고, 오히려 이렇게 할 때 관계가 더 좋아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런 관계를 가지기 힘든 사람인가보다. 그럴거면 결혼을 왜 하지 싶은 느낌이다. 내가 바라는 결혼생활은 이인삼각 경기처럼 혼자일 때보다 많이 불편하고 힘들지만, 동시에 서로에게 조건없이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행복이 있는 그런 거였다.


 전남친은 나에게 항상 이렇게 말했다. 너의 우울증을 맞들고 싶다고. 처음에는 그 말이 정말 고마웠다. 내가 생각하는 '우울증을 맞든다'는 것은 내가 우울증으로 일하기 힘들 때 외벌이하면서 가정을 받쳐주고 집안일도 할 수 있는 만큼 도와주는 그런 거였으니까. 내 아빠도 아닌 타인이 나한테 그런 사랑을 준다는 건 정말 고맙고 마음이 녹는 느낌이었다. 나도 그 고마움만큼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전남친을 돕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생각했던 의미는 아마 달랐던 것 같다. 그는 맞벌이를 당연하게 생각했고 내가 그의 집에 일하러 가는 것도 매우 깊이 걱정해주었으나 결국은 당연하게 생각했다. 내가 힘들 때 자기가 나한테 받은 만큼의 위로도 되돌려줄 줄 몰랐고 힘내라고 밥 한끼 사준 적도 없었다. 모든 짐을 나에게만 지워주고 자기 불편하고 힘든 일은 하나도 하지 않으려 하면서, 내 우울증을 맞들겠다는 자신의 말에 스스로 황홀해하는 전남친을 보면서 나중에는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다.



 내 우울증은 니 우울증에 비하면 새발의 피더라. 내 우울증은 맞들지 않아줘도 되니까 그냥 니 우울증이나 잘 챙겨줘. 그리고 가부장적인 너의 부모님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거면 너라도 가부장적인 책임감과 능력을 갖춰야 되는거야. 부모님을 바꾸자니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이 들어서 울고, 부모님의 뜻에 따르자니 아내가 힘들 것 같아서 괴로워서 울고, 가부장이 되자니 능력이나 책임감을 키우는건 힘들어서 울고.


 너는 그런게 힘들면 나나 너의 부모님을 위해서 뭘 할지를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게 아니라, 너의 우울증, 불안증이 터져나와서 주저앉아 우는 사람이었지. 그럼 나는 너 대신 모든 일을 처리하고 해결하면서 우울증, 불안증으로 힘들어하는 너까지 챙겨야 돼. 나 그런 결혼생활을 감당할만큼 너를 사랑하지는 않아. 니가 내 아들도 아니고.


 그래도 너한테 세 가지 고마운게 있어. 하나, 못난 나를 그렇게 사랑스러운 눈으로 쳐다봐준 거. 그건 진심으로 고마워. 둘, 네 덕분에 내가 어떤 연애, 어떤 결혼생활을 원하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어. 그것도 고마워. 셋, 비혼이면서도 비혼에 대해 확신이 없었는데, 세상에는 외롭고 공허한 것보다 훨씬 안좋은 상태가 있다는걸 네 덕분에 알게 됐어. 비꼬는게 아니라 진심으로 고마워. 비혼이 괜찮은 선택이라는 이유를 알게 되어서 마음이 한결 편해.


 너와의 이야기를 더 쓰면 뒷담화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우리의 연애를 정리하기 위해 나에게 꼭 필요했던 글 두 편만 쓰고 여기까지 할게. 시간이 지나서 너에 대한 분노가 가라앉으니까 이제는 슬픔이 올라와. 사랑했는데 우리의 관계가 이렇게 되어버린게 슬프다. 그 사랑도, 슬픔도 이 겨울과 함께 잘 떠나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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