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의 기록
출처: 랑야방 트레일러 영상에서 캡쳐 (https://youtu.be/Jkr2vy3X0-k)
중국 드라마는 대청풍운, 후궁견환전, 소년신탐적인걸 이후에 네번째인듯하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괜찮은 드라마였다.
랑야방의 장점은 일단 남주 매장소가 잘생겼다는 것? (종주님 덕질하는 분들이 은근히 계시더라..) 보다는 매장소의 뛰어난 지략과 쿨함, 시한부 인생에 대한 짠함, 그럼에도 목숨을 걸고 이뤄내려고 하는 눈물겨운 목표가 어우러져서 남주에게 애정이 간다는 점이다. 덧붙여서 어디 한 군데 어그러지지 않는 밀도있는 구성, 격조있는 대사들, 브로맨스 등이 관전 포인트이다.
단점은 물소를 보는게 좀 힘들다.... 랑야방에서 정왕은 한고집 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는데 앞뒤 꽉꽉 막힌 이 인간이 매장소 구박할 때는 정말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은.... 그러나 정왕의 아버지인 의심병 황제가 최고의 발암 캐릭터를 맡아주고 있고 정왕은 잘생겨서 음소거로 해놓고 화면만 봐도 좋다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의심병 황제가 자기의 절친이자 여동생의 남편이기도 한 임섭 장군과 사랑에 빠졌
이 아니라 임섭 장군이 반역을 꾀해서 황제의 맏아들이자 임섭의 조카인 (황제가 임섭의 여동생을 후궁으로 들여 맏아들을 낳았다) 기왕을 황제로 올릴 거라고 믿어버렸다. 황제가 이런 중증의 의심병을 앓게 된 내력은 황제 본인이 장자도 아니었으면서 황제의 자리를 찬탈해서 보위에 오른 데 있다. 황제는 조정 대신들과 백성들이 떠받드는 잘난 아들(기왕)에게 콤플렉스도 있던 참이었다. 황제에게 임섭 장군의 모반을 창작해서 꼰지른 건 현경사(국정원 비슷한 권력 기관) 수장인 하강과 리양장공주의 남편 사옥(임섭과 동서지간인데..)이었다. 하강은 기왕이 현경사를 폐지하려고 하자 현경사를 지키기 위해 기왕을 제거하려고 했고, 사옥은 아마 임섭의 권력을 자기가 갖기 위해 하강에게 가담했던 것 같다. 황제는 아들 기왕에게는 독주를 내려서 죽여버리고, 사옥에게는 변방에 나가 대유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임섭을 몰살시키라고 명령을 내린다.
그 무렵 임섭 장군은 10만 적염군(임섭의 사병)을 이끌고 대유국과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었다. 임섭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임수(매장소)이다. 임수는 그 당시 소년장수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임섭과 함께 전장에 있었다. 임섭과 적염군은 결국 체력이 바닥날 때까지 싸우고 나서야 대유국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둘 수 있었는데, 사옥은 바로 그 타이밍을 노리고 적염군에게 덤벼들어 10만 적염군을 몰살하고 임섭을 죽였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황제에게 돌아가서 자기 군대가 대유국을 물리쳤다고 뻥을 친다. 황제는 사옥에게 호국주석이라는 간판(...)을 주고 기타등등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었다.
그런데 하강이나 사옥이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 수 없는 팔자인게 임수가 죽지를 않았다. 아버지 임섭 장군이 임수를 살리기 위해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렸고 (CG 많이 어색함) 임수는 살아날 수 있었다. 다만 온 몸이 불에 탄 채로 눈에 구른 다음 설개충이라는 화식 곤충에게 뜯겨서 화한독에 걸렸다는 게 문제였다. 화한독은 맹독 중의 맹독이라 뼈를 자르고 살을
바르는 고통이 있을 뿐만 아니라 수명도 왕창 깎인다. 화한독에 걸린 사람은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첫번째, 화한독에 걸려 온 몸과 얼굴에까지 흰 털이 나고 벙어리인 상태로 천수를 누린다. 둘째, 화한독을 제거하고 완전히 다른 얼굴과 몸을 얻은 후에 말도 자유롭게 하고 살다가 20년쯤 후에 죽는다. 단, 살아있는 내내 감기를 달고 살고 피도 가끔 토하며 무술은커녕 운동도 못한다. (간암이나 폐암이나) 임수는 복수를 해야 했기 때문에 정상인의 용모와 목소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임수는 두번째를 선택한다.
임수는 전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하고 이름도 매장소로 바꾼다('소'자가 되살아날 소자이다). 임수라는 이름보다 발음이 쎄서 선택된 이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랑야방을 보면 매장소에 의해 나쁜 놈들이 하나 둘씩 사이좋게 몰락하는데 그들이 꼭 외치는 이름이 있다. 메이-챵-쑤우우--!!!!!(생략된 뒷말은 멍멍이 등등일 듯.)
매장소는 적염군의 살아남은 병사들과 함께 강호의 방파인 강좌맹을 접수하고 강좌맹의 종주가 된다. 매장소는 원래 장수이기도 했고 문무를 겸한 뛰어난 인재라 그런지 몇 년만에 강좌맹을 천하제일 방파로 만들어놓는다. 그리고 12년간 강호에서 힘을 기른 후 드디어 복수를 하러 금릉(양나라 수도. 의심병 황제가 있는 곳.)으로 간다.
(점점 줄거리 요약이 아니라 줄거리가 되어가는게 불안하네요. 드라마 첫 화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는..)
첫 화는 어색한 CG 비둘기가 랑야각(중국판 네이버 지식인. 모르는게 없고 비싸서 그렇지 돈만 내면 어떤 질문에도 답을 찾아줌. 예: 양나라 황제 머리털 수는 총 몇 가닥일까요? 100억 선불입니다.)에 도착하는 걸로 시작한다. 랑야각에 도착한 소식은 북연에서 가장 세력도 없고 별 볼일 없었던 황자가 황태자에 책봉되었다는 것. 이건 매장소가 무려 복수를 위해 황태자 메이커 연습을 한 거였다. (모의고사도 실전처럼... 공부 잘하는 애들은 다 이유가 있어요.) 매장소의 복수 계획은 다름아닌 자기의 절친 정왕을 황태자로 만들어 적염군 사건을 재조사하게 한 다음 아버지와 적염군의 누명을 벗기고 충신으로 역사에 기록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랑야방의 부제가 '권력의 기록'이다. 이 부분이 다른 수많은 드라마나 소설들과 좀 다르다. 에드몽 당테스도 20년 토굴 생활 끝에 한 복수가 원수들 망하게 하는 거고 지금 한창 뜨는 '천상의 약속' 이유리도 김혜리 망하게 하려고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웬 기록? 기록말살형을 최고의 형벌로 두고 있었던 로마 시대 사람들은 공감하는 이야기일까?
랑야방에서 후반부로 갈수록 드러나는 특이한 점은 매장소의 고원한 복수관이다.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동료나 다름없는 10만 적염군을 몰살한 황제-원수를 매장소는 아무 것도 아닌, 사탕 껍질 보듯이 본다. 매장소는 황제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매장소가 중요시하는 건 정왕을 태자로 만들기 위해 기존의 태자(월귀비의 아들)와 예왕 측 사람들을 제거하고 정왕을 띄우는 것, 황제가 재조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도록 무대를 잘 만드는 것, 짬짬이 변방의 외적 걱정 정도밖에 없다. 심지어 자기를 직접 칼로 찌른 사옥도 태자 측 세력을 제거한다는 차원에서 없애버린거지 사옥에게 특별히 이를 간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걸 주도한 하강에게조차도 쫌 마니 갖고 놀긴 했지만 증언을 받아서 재조사하는데 쓸 생각을 할 뿐 하강을 어떻게 처리한다는 건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 보통 드라마라면 능지처참 장면이 빠지지 않았을텐데 랑야방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재조사해서 결백을 밝힌 후 매장소가 아버지와 적염군 일동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서 향을 피우고 절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죽음의 위기를 여러번 겪고도 하강을 대놓고 조롱할 정도로 태연자약하고 냉정했던 매장소가 처음으로 흐느껴 운 게 그 장면이었다.
황제도 중요하지 않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오직 기록뿐. 기록은 즉 역사를 말하는 것.
개인적으로는 매장소가 명예를 회복한다는 것 이상의 관념에서 역사를 바라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역사의 '사( 史)' 는 활쏘기에 있어서 적중한 수를 기록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점복을 관장하는 사람이 점을 친 후 기록하는 걸 의미한다는 견해도 있다.)동양에서 역사는 곧 기록이다. 있는 그대로의, 거의 취사선택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만큼의 방대한 범위의 말과 행동의 기록. 그런데 그 기록은 어디론가 흘러내려가는 방향성을 가진 기록이라기보다는 연못에 고인 물처럼 면적을 가진 기록에 가깝다. 방향성을 가진 기록은 과거에 비해 현재가, 현재에 비해 미래가 진보하는 방향으로 설정된다. 이와 반대로 면적을 가진 기록은 변화하기는 하지만 어디론가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는 역사를 후자와 비슷하게 보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역사는 일치일란(一致一亂) , 한번 다스려지고 한번 어지러워지는 원리의 반복에 가깝다. 공자가 수레를 타고 떠돌아다닐 때 장저와 걸익도 온 천하가 모두 혼란한데 누구와 더불어 세상을 바꾸겠느냐고 말했다. 나라에 도가 있으면 나아가 벼슬을 하고 도가 없으며 물러나 은둔한다는 것도 비슷한 입장에 서 있다. 역사가 발전 내지는 진보한다는 관점에서는 세상이 혼란해졌다가 다스려지고 혼란해졌다가 다스려지는 일들은 상정하기 어렵다. 역사가 진보한다면 그 속의 사람들은 역사와 함께 진취적으로 나아가고,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쪽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오로지 역사가 고정된 물 위의 파문처럼 움직이는 경우에만 '때를 기다린다'는 생각이 가능해진다. 강태공도 진보적인 역사관 하에서였다면 강가에서 세월을 낚느니 바이킹처럼 배라도 만들어 어디론가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일치일란과 같은 원리의 순환에 가까운, 고정된 역사관에서 기록이란 건 어떤 의미일까? 진보하는 역사관은 늘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간다. 방향성과 시간, 속도가 있는 역사는 뒤에 긴 어둠을 남기게 마련이다. 기나긴 뱀은 꼬리가 어디까지 이어져있는지 알 수도 없고 아득히 멀리 있는 뒷쪽 꼬리는 보기도 어렵다. 그런 역사에서는 과거의 어둠 속에서도 살아남을만큼 빛나는 사건들, 동상들 정도가 남을 뿐 나머지는 잊혀진다. 더 나은 방향으로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현재나 미래에 비해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는 과거는 덜 중요할 수도 있고. 그런데 순환되는, 고정된 역사관에서는 기록 자체가 의미가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새로운 시간이 위에 덮인다고 해도 지금 이 자리, 이 역사의 판이 덜 중요해지는 건 아니다. 역사를 이루는 사람들과 사건들이 어떤 위치에서 어떤 행동을 해서 그 역사가 만들어졌는지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역사 자체가 진보하지 않는 대신 사람들과 사건들이 자기의 위치에서 얼마나 향상되었는지, 얼마나 꽃 피운 채로 고정되었는지가 그 시대의 원리를 정하기 때문에.
매장소에게 있어서 과거는 현재나 미래보다 더 중요한 문제이다. 매장소는 재조사에 성공해서 과거의 기록을 바꾸게 되었을 때, 한편으로는 임수로 돌아가길 거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임수로 돌아가겠다고 외친다. 태자가 된 정왕은 절친인 임수-매장소에게 임수로서 조정으로 돌아올 것을 권하려 한다. 하지만 매장소는 임수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한다. 권세를 농간하는 매장소의 모습이 아니라 원래의 임수(기록이 마쳐진 그대로의 임수)의 모습으로 남기는게 좋지 않겠냐고.
그러나 매장소는 매장소로 사는 것도 거부한다. 랑야각 각주 린신은 죽어가는 임수를 살려내어 매장소로 다시 태어나게 한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이고 매장소의 절친한 벗이다. 린신은 매장소가 자신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남은 몇 년이나마 더 오래 생을 누리기를 바란다. 하지만 외적이 쳐들어오고 양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매장소는 자신은 임수로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적염군이 있던 그 전장에 자기가 있어야 한다고. (매장소로서 참전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린신에게 말한다. 자네는 임수를 모른다고 했지만, 임수를 알게 되더라도 결코 실망하지 않을 걸세.
결국 매장소는 임수에게 있어서 기록을 바꾸기 위한, 그리고 기록을 바꾼 다음에는 사라져가야 할 껍데기일 뿐이었다. 13년간 매장소로 살았고 매장소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벗들을 사귀었음에도 매장소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12년간 결혼도 안 하고 자기만을 기다린 예황군주를 위해서라도 살아주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역시나였다. 처음에는 매장소의 그런 태도가 인생에 너무 깊은 상처가 있어서 회복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스스로를 아끼지 않는 것이 아닌가 했는데, 기록의 의미와 관련지어 보면 매장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임수를 원래의 임수대로 남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