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작가
부모의 다툼은 아이에게 상처가 된다. 그래서 아이 앞에서는 큰소리도 내면 안 되고, 방금 전까지 냉랭하게 아무 말 않고 있다가도 아이가 나오면 잠깐 다정한 부부를 연기하고, 본격적인 싸움은 카톡방에서. 요즘 바람직하다고들 이야기하는 부부 싸움 방법이라고 한다.
밥그릇, 수저 탁탁 놓고 침묵만 흐르는 속 얹히는 저녁 식사, 그리고 이어지는 안방에서의 고성.
그런 경험 없이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 싶다.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기억에도 없는 갓난아기 시절부터 사춘기 내내, 마침내 대학에 가고 취직을 해서 집을 떠날 때까지 그런 나날들이 돌림노래처럼 흘러간다. 아이들은 그 노래가 어느 순간 깨어질까봐, 자기들이 깃든 둥지가 산산조각 나버릴까봐 두려워하면서 조심스레 귀를 기울인다.
우리집도 그랬다. 나의 부모님은 내게는 한없이 사랑을 퍼부어주셨지만 두분 사이의 바구니는 항상 가난했다. 아빠는 사람 사이의 감정적인 교류, 대화를 통한 애정 표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었다. 아빠가 생각하는 가정은 각자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고 즐겁게 웃으면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발전소같은 곳이었다. 실제로 아빠는 평생을 그렇게 사셨다. 아주 화날 때를 빼놓고는. 아빠는 직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 좋은 기분으로 식탁에 앉으셨고 활기차게 대화를 나누는 분이었다. 서로의 일상에 관해, 사회 문제에 대해, 관심있는 책에 대해, 새로운 요리법에 대해, 건강식과 운동에 대해, 하다못해 녹슨 쇠는 치약으로 닦으면 된다는 생활의 지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게 우리 가족이다. 나는 아빠의 그런 성격을 닮아서, 그리고 가족의 유대와 평화를 위해 지금도 식탁에 앉을 때는 미리 몇 가지 화제거리를 준비해간다. 그런 대화에는 장점이 있다. 힘들고 짜증나고 만사 귀찮은 날에도 아침에 방에서 나올 때는 활기차야 하니까 저절로 감정 조절이 된다. 그래서 가족에게 함부로 틱틱거리거나 짜증을 내지 않게 된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런 짜증스러운 기분은 어차피 하루를 넘지 않을 별 볼일 없는 것들이다. 내가 조금만 참으면 모두가 행복하고, 또 참는다고 해서 전혀 해롭지도 않고 곧 잊어버리고 마는 사소한 화들. 그런 감정들을 가족들에게 하나하나 풀다보면 가족들도 감정이 상하고 결국 모두가 짜증스럽게 되어버리는 상황이 온다. 그렇게 되면 결국 가장 손해를 보는 건 나 자신이다. 가족들에게서 에너지를 충전받을 수 없게 되니까. 뉘앙스는 조금 다르지만 무라카미 하루키가 '태엽감는 새'에서 한 이야기와 비슷한 상황이 된다. 천박한 섬에 천박한 원숭이가 사는데 천박한 원숭이들은 천박한 물과 천박한 먹이를 먹고 천박한 똥을 싸고 그 똥이 쌓이는 그 천박한 섬은 더 천박해지고 원숭이들도 더 천박해지게 된다는 이야기. 악순환.
엄마는 조금 다른 분이다. 우리 외가는 대화가 별로 없고 웃는 표정을 남발하지 않는, 전형적인 유교 스타일 가정이다. 공자왈: 교언영색선의인(巧言令色鮮矣仁). 말을 교묘하게 꾸미고 얼굴빛을 좋게 지어내는 사람 중에 어진 사람이 없나니.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말씀도 잘 하시고 술도 잘 드시는 화끈한 분이었지만 일제 시대에 태어나서 6.25 전쟁에도 참전하셨던 우리 외할아버지는 근엄의 화신이었으며 외할머니를 틀어쥐고 가정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셨던 외증조할머니도 계셨다. 딸들의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으면 좀 곤란한,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 엄마는 연애 한번 못해보고 우리 아빠와 결혼하셨다.
그렇다고 엄마가 고리타분한 분은 아닌데... 엄마의 특징은 '그냥 진심의 사람'이라는 거다. 엄마는 항상 진심이고 순수하다. 엄마가 하는 말은 말 그대로일 뿐 숨겨진 뜻이나 감정이 없다. 엄마는 왜 말을 꾸며서 해야 하는지, 왜 웃는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왜 많은 대화를 해야 좋다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입장이셨다.
엄마의 말도 맞다. 그리고 진심의 사람인 엄마의 성품은 정말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나 아빠는 표현하지 않으면 서로의 감정을 알 수 없고, 적절하게 고른 말과 리액션과 웃음은 서로를 편안하게 해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
엄마는 조금만 힘들어도 힘든 티가 바로 난다. 힘들거나 기분이 나쁜 걸 조금도 숨기지를 못하신다. 그러면 아빠는 또 그걸 잘 못 견뎌서 기어이 싸움이 나고 만다. 이게 우리 부모님의 지난 30년간 부부 싸움의 단골 화두였다. 우리 부모님의 싸움 주제에 다른 이유는 없었다. 시댁 문제, 경제적인 문제, 식성 차이, 리모컨 전쟁같은 것들, 다른 수많은 가정들이 난파하는 그런 주제들은 우리집을 비껴갔다. 오로지 성격 차이가 문제였다.
부부 싸움은 엄마, 아빠에게도 앙금을 남겼겠지만 어린 내게도 상처였다. 아빠는 엄청나게 화를 폭발시키다가도 나와는 평소와 똑같이 대화를 하셨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 나는 엄마, 아빠가 다툼 끝에 결국 이혼을 선택하더라도 어느 쪽이든 나를 사랑으로 잘 키워줄 거라는 걸 의심하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집사들의 싸움을 내려다보는 도도한 고양이의 관점이 아니었나싶긴 한데. 그렇지만 아이들이 바라는 건 엄마, 아빠가 나를 버리지 않고 사랑해주는 것만은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엄마, 아빠가 서로 사랑하고 가족이 다같이 행복한 것, 아이들은 그것도 바란다. 이혼을 하더라도 부모가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아이 문제에서만큼은, 서로 연인은 아니나 최소한 친구이기는 한 공동체를 만들라는 것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그래서, 부부 싸움은 어떻든 아이에게 상처를 준다.
그런데 나는 그 상처가 나쁘니까 무조건 아이를 보호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부부 싸움은 때로 부모가 사랑 표현만 할 때보다 더 많은 것을 아이에게 가르쳐 줄 수 있다.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에 대해서.
부부 싸움이 아이들의 성장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 한 권 있다.
서론으로 쓰려고 했던 내용이 너무 길어지긴 했지만, 오늘은 원래 심윤경 작가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라는 책을 소개하고 싶었다. 심윤경 작가는 서울대 분자생물학과를 졸업하고 석사를 마친 독특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데 사람의 마음을 끄는 소재들을 맛깔스러운 글로 일으켜세운다는 느낌의 작가이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은 서울 인왕산 밑에서 자라나는, 70년대 생 남매의 어린 시절 이야기이다. 초등학생들도 읽을 수 있을만큼 쉽고, 아이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10살의 성장기를 담고 있는 이 책은 사실 어른들에게도 굉장히 필요한 책이다.
주인공은 한동구. 동구는 억세고 말을 함부로 하는 할머니와 그런 할머니를 편들어 어머니를 구박하고 손찌검도 하는 아버지, 모진 시집살이를 하면서 동구만 바라보고 사는 어머니와 함께 산다. 동구는 초등학교 3학년인데도 한글을 잘 읽지 못하는 난독증이다. 동구의 할머니는 며느리가 잘못 들어와서 아들내미를 바보로 낳아놓았다고 말할 정도의 인물이고 동구의 아버지는 한글을 못 읽는다고 동구를 후려친 사람이다. 고구마 백 개는 먹은 듯 답답한 집안이고, 또 의외로 흔한 가정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심윤경 작가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막장 주제, 토사물 위를 뒹구는 듯 진저리나는 주제들을 아무렇지 않게, 가볍게, 아름답게, 따뜻하게 풀어내는 신공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10살짜리 동구가 그런 할머니와 아버지를 이해하고 진짜 어른 역할을 배워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이다. 가정폭력 아버지, 동구의 동생이 죽었는데도 동구의 어머니에게 자식 잡아먹은 년이라는 욕을 하는 할머니, 이 두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고 손을 내밀 수 있는 건지? 남북 통일만큼이나 요원한 일이고 나라면 화가 치밀어서 다시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해버릴 일인데 동구는 그 문제를 해결한다.
동구는 부부 싸움, 고부 갈등을 매일 보고 자라면서 오늘은 저녁밥을 무사히 먹을 수 있을지를 아슬아슬해하는 아이이다.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는 그런 전쟁을 매일 치르면서 어린 동구에게도 거침없이 손찌검을 했고 동구는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대소변도 일찍 가렸다. 주눅들고 자란 동구는 말도 조리있게 잘 하지 못한다.
하지만 동구는 그렇게 상처받은 만큼 속으로는 굉장히 어른스럽고 성숙한 마음을 키워온 아이이기도 하다. 어린 동생 영주가 같은 상처를 받을까봐 걱정할 정도로.
동구를 처음으로 이해해줌으로써 동구에게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과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것은 동구의 담임선생님이다. 동구의 할머니가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동구와 동구 어머니를 집 밖으로 내쫓아서 하는 수 없이 동구가 집 뒤의 인왕산 바위 위를 미끄러져 내려와 집 안으로 떨어져 어머니를 위해 문을 열어줘야 했을 때, 동구의 아버지는 오히려 동구의 어머니에게 큰 소리로 욕을 했다. 애들이 보는 앞에서 동구의 할머니에 대해서 안 좋은 말을 하는 당신이 엄마 자격이 있냐는 식으로. 동구의 아버지는 동구의 할머니 편을 들 수도 없고 동구의 어머니 편을 들 수도 없기에 말꼬리를 잡아서 화를 낸 거다. 동구가 바위를 타다가 손을 다치기까지 했을만큼 위험한 일이라 동구의 어머니가 화를 낸 것인데도.
동구는 담임선생님에게 아버지를 이해할 수도 없고 좋아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때 담임선생님은 동구에게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담임선생님은 동구가 나중에 결혼했을 때 동구의 어머니와 동구의 아내, 그 사이에 있는 동구를 상상해보게 한다. (동구가 상상한 동구의 아내는 담임선생님이다.) 처음에 동구는 자기 엄마는 할머니처럼 심술궂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담임선생님은 동구의 어머니도 나이가 들면 심술궂은 성격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동구를 너무 사랑해서 동구의 아내를 못마땅해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자 동구의 머릿속에서 상상이 뻗어나간다. 동구는 자기 엄마가 자기 아내(담임선생님)를 쫓아내는 장면을 본다. 동구는 아내가 눈물을 흘리는 광경을 상상하자 가슴아파한다. 그런데 동구는 자기 어머니에 대해서도 가슴이 아리다. 자기 엄마는 할머니와 아버지에게 그 구박을 당하면서도 자기를 사랑으로 키워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동구는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자기를 발견한다. 동구는 자기의 아들도 상상한다. 동구의 아들이 동구의 아내를 위해 인왕산 바위를 타고 내려와 문을 열어준다. 동구는 아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동구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아들이 다쳤는지 살펴보려 하지만 동구의 아들은 자기 엄마를 못살게구는 아버지가 미워서 손을 감추고 외면한다. 동구는 가슴이 찢어진다.
그리고 깨닫는다. 그게 동구의 아버지가 어제 느낀 감정이란걸.
동구의 담임선생님은 그런 동구에게 그 상황이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는지도 알려준다. 동구의 아버지가 동구의 어머니에게 "당신이 수고가 많아. 참아줘서 고마워."라고 말한다면? 그러면 동구의 아버지를 사랑하기때문에 동구의 할머니도 견디고 사는 동구의 어머니도 훨씬 기분이 좋아지고 좀더 견뎌보려는 마음을 갖게 될 거라고. 그러나 동구의 아버지는 그런 말 한마디도 할 줄 모른다. 동구의 담임선생님은 이 다음에 동구가 커서 그렇게 행동하면 동구의 어머니와 동구의 아내간의 갈등도 잘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해준다.
여기까지라면 그냥 동화였겠지만 현실을 사는 동구는 잔인하게도 그 지혜를 바로 시험당하게 된다.
어느 날 할머니가 집을 비우고 동구의 부모님은 심한 부부 싸움을 한다. 동구는 그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동생 영주를 데리고 나온다. 상처받은 아이들은 자기들끼리라도 재미있게 놀아보려고 한다. 영주는 오빠에게 감을 만져보고 싶다고 한다. 동구는 영주를 어깨 위로 들어올려 감나무에 닿게 해준다. 그리고 그 순간, 바람이 불어 동구의 눈에 티끌이 들어가고 동구는 영주를 놓친다. 어린 영주는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찧고 죽는다.
영주가 죽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난다. 모진 할머니에게도, 가정폭력 아버지에게도 거리낌없이 손을 내밀었던 영주가 죽자 가족들은 다시 사랑하는 방법을 잊었다. 영주는 서로 충돌하고 상처만 주는 가족들에게 교통정리를 해주던 신호등이었는데 그 신호등이 꺼지자 아무도 길을 건널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셨고 할머니는 밥을 먹던 어머니에게 "새끼 목 부러뜨리고 밥이 넘어가냐. 니가 사람이냐."라고 소리지르며 국그릇을 엎는다. 어머니는 고추장독을 들고 들어와 할머니 앞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괴성을 지르고 집을 나간다. 할머니는 충격으로 쓰러지고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어머니는 할머니를 다시 보고 살 수 없어서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아버지는 할머니를 내보낼 수도 없고 어머니를 설득할 수도 없다.
어린 동구는 그 참혹한 고통의 한복판에서 담임선생님을 떠올린다.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상상 속의 선생님은 동구에게 할머니를 이해해보라고 말한다. 동구는 처음에는 그건 불가능하다고, 할머니가 밉다고 거부한다. 하지만 상상 속의 선생님은 동구를 설득한다. 할머니가 그렇게 함부로 말하고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는 건 할머니에게 꿈이 없기 때문이라고. 동구의 부모님은 동구를 잘 키우는 꿈이 있지만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에게는 그런 꿈이 없다고. 즐거움이 없다고.
동구는 할머니를 이해한다. 동구의 할머니는 어린 시절 살았던 노루너미에서 다시 농사를 짓고 흙 속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동구는 할머니를 이해하고 용서한다.
동구는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괴로워하기만 하는 '어린' 아버지를 위해 자기가 손을 내민다. 동구는 할머니에게 노루너미로 가서 살자고 말한다. 할머니가 왜 갑자기 거기로 가려고 하냐고 하자 어른스러운 동구는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엄마랑 할머니는 더이상 같이 살 수가 없잖아.' 동구는 할머니에게는 영주 생각이 나서 이 집에서 살지 못하겠다며 노루너미에서 할머니는 농사를 짓고 자기는 고등학교까지 거기서 살겠다고 말한다. 할머니는 다시 활력을 되찾았고 동구의 어머니더러 돌아오라고 한다. 아끼던 닭을 잡아 몸보신시켜주겠다는 말을 하면서. 가장의 권위만 가졌을 뿐 가장 역할을 하지 못하는 아버지는 이 뜻밖의 선물에 안도했다. 동구는 그런 아버지를 동정하듯 바라본다.
영주의 죽음은 가족들에게 치명상과 같았지만 동구는 이렇게 가족들을 일으켜세우고 자신도 일어난다.
동구가 소설 속의 허구의 인물이기 때문에 전지적 권능을 가진 작가의 필력을 받아 이렇게 의젓하고 씩씩한게 아니냐고 하는 의문이 생길 법도 하다. 물론 동구 정도의 공력이면 큰스님 자리 정도를 꿰어차도 부족하지 않아보인다.
하지만 동구 정도는 못 되어도 내 경험상 부모의 극한 대립과 갈등을 보면서 자란 아이들이 사람 사이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 치열한 탐구를 하게 되는 건 사실인 것 같다. 나는 엄마와 아빠의 갈등을 보면서 인생에서 이렇게 괴로운 일을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고 도대체 무엇때문에 싸우고 있는건지 '쟁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뭐가 문제인지 알면 해결책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다행히도 우리 부모님은 아이들은 어른들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무시하는 분들도 아니었고 아이들에게 싸움을 숨기고 좋은 것만 보여주려는 분들도 아니었다. 그리고 특히 아빠는 100의 강도로 화가 난 상황에서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말을 들으면 바로 화가 풀어지는 이성적인 분이었다. 나는 아빠가 왜 화가 났고, 엄마는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했으면 좋았을지, 아빠는 무슨 행동을 잘못했는지 논리적으로 풀어내면서 두분 사이를 중재했다. 나는 아빠의 자식이라 아빠의 언어를 알지만 엄마의 자식이라 엄마의 언어도 아니까. 금성과 화성의 중간 행성에서 태어난 나는 금성의 언어를 통역해서 화성에 전달하고, 화성의 언어를 추측해서(엄마는 화가 나면 입을 완전히 다무는 성격이라) 금성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아이의 어린, 그리고 어리석은 행동으로 보이겠지만 나는 그 역할을 10년 넘게 했다. 엄마를 위로하고 엄마 대신 엄마의 말을 통역하고, 아빠의 말과 행동을 오해하는 엄마에게 아빠의 속마음을 전달하고, 사랑받는다고 느끼지 못하는 아빠의 마음을 위로하고. 그리고 그건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동구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어린 자식이 행복한 가정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 자체가 부모님에게 이 가정을 꼭 지켜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부부 싸움을 보고 자라는 다른 가정의 아이들처럼 상처를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 상처를 이겨내기 위해 동구처럼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사람을 이해하는 법, 사람들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같은 것들을. 부모가 자식에게 세상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면 꼭 좋은 것만 보여주고 좋은 것만 들려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부부 사이에도 갈등이 생길 정도로 힘든 세상이라면 치료법도 가르쳐주는게 정말 인생에 도움되는 산 지식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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