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인을 만나면??
출처: tvN 또 오해영 14회 예고편에서 캡쳐
14회에서는 드디어 도경-해영 커플이 로맨스 폭발을 보여주었다.
"마음이 원하는 만큼 가자. 아끼지 말고 가자."
"나 못할 짓이 없을 것 같아. 살인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또 오해영' 14회 중에서-
라고 말하는 두 사람의 행복한 모습도 보기 좋았지만 14회에서만큼은 그들이 조연으로 보였다.
그보다 마음에 와닿았던 것은 수경의 사랑이다.
아침식사 시간에 진상은 꿈 이야기를 한다. 하늘의 별들이 물고기가 되더니 자기에게 떨어졌다고. 수경은 그게 태몽인 줄 알아채고 진상의 꿈 이야기를 열중해서 듣는다. 진상의 차에서 내려 회사로 들어가면서 수경은 속으로 이렇게 이야기한다.
'고맙다, 태몽 꾸어줘서. 기억해둘게. 별 물고기.'
-'또 오해영' 14회 중에서-
수경은 진상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이민가서 아이를 키울 생각이었다. 태몽에 기뻐하면서도 드러내지 못하고 혼자 떠날 생각을 하는 아기 엄마, 수경의 모습이 너무 슬펐다.
그날 저녁 수경은 진상과 저녁을 먹으러 간다. 그 자리에서 진상의 진상짓이 폭로되었다. 진상은 요일별로 다른 여자친구를 정해놓고 몰래 만나고 있었는데 월화수목금토 여자들이 그 사실을 알고 몰려와서 진상을 패려고 했다. 수경에게는 참담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수경은 일단 진상을 구해준다.
그리고 이야기한다.
"진상아, 난 너 고등학교 때 생각하면 다 이뻤던 것 같애. 교장 선생님 돌아가셨다고 집에 와서 통곡할 때도 이뻤고, 폐지 줍는 할아버지 대신에 리어카 끌고 동네 돌 때도 진짜 이뻤어. 도경이랑 공부할 때도 나 늦으면 꼭 둘이 같이 버스 정류장에 나와 있었다? 내려서 너네들 보면 아이고 참 이쁘다, 좋다 싶었어.
갑자기 왜 이렇게 변했는지 너만 알겠지. 뭔가 있었겠지? 그런데 진상아, 너 되게 괜찮은 애다. 이제 자학 그만하고 사랑하는 사람 만나서 차분하게 결혼 생활하고."
그리고 돌아서서 속으로 이야기한다.
'아이한텐 니가 아빠라고 말하지 않을 거지만 그래도 어딘가 있을 아이 아빠가 좀 괜찮은 사람이었으면 한다. 부끄럽지 않은, 멋진 아빠.'
-'또 오해영' 14회 중에서-
진상은 밝고 명랑하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으로 등장하긴 했지만, 사생활에 있어서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아마 현실에서 진상과 같은 사람이 주위에 있다면 드라마에서처럼 '좋게', '괜찮게' 그려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유부녀를 건드려서 남편에게 얻어맞고, 남자친구 있는 여자들과 사귀어서 욕 먹고, 매일 다른 여자랑 관계를 맺고 쉽게 헤어져버리는 진상과 같은 사람은 현실에서 나쁜 놈, 구제불능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스스로도 자기가 그렇고 그런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진상도 도경이에게 '내가 나를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수경은 진상이에게 실망은 했어도 그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건 우연히 서랍 속에서 발견한 명함이다. 작년 여름에 인턴을 했을 때 받아놓고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글귀를 보면서 나는 '자폐인을 만나면'이라는 부분은 불필요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자폐인과 소위 정상인을 가르는 기준은 뭘까? 자폐인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수많은 사람들도 할 수 없는 일이 있고,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낯선 곳에서 길 찾기를 잘 못하고 라면을 잘 못 끓인다. 책을 읽거나 소리를 듣는 일, 걷는 일은 할 수 있다. 아직. 소위 정상적이라는 건 하나의 상태일 뿐 언제든 변할 수 있으니까 '아직'이라는 말을 붙여야겠지.
자폐인 혹은 장애인과 소위 정상인을 가르는 기준은 내가 보기에는 현재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일들의 목록을 몇 퍼센트나 수행할 수 있는지에 있는 것 같다. 만일 다른 장소, 다른 시간이라면 그 기준은 또 바뀔 수 있다. 지하철을 탈 필요도 없고 옷을 입을 필요도 없는 사회에서라면 지하철을 타는 능력, 옷을 차려입는 능력이 요구되지 않는다. 아무도 소리로 의사표현을 하지 않는 수도원과 같은 공동체에서라면 듣는 능력이 필요하지 않다. 그런 사회에서라면 그런 능력이 없다고 해서 장애가 있다는 취급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정상인이라는 건 지금 우리가 이 시대를 이곳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능력들의 목록을 좀 더 많이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밖에 되지 않는다. 심지어 정상인도 그 목록을 100퍼센트 실현시킬 수 있는 건 아니다.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짜증내지 않고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와 같은 일들도 어려워하듯이. 정상인들은 그 중 과반 정도를 무리없이 수행하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의미할 것이다.
그래서 '자폐인을 만나면'은 맞는 표현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모두 서로를 만날 때 할 수 없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춰주어야 한다. 나도 남들을 만날 때 너그러워야 하고, 남들도 나를 양해해주어야 한다. 우리는 할 수 없는 것도 많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건 서로 너그러울 가치가 있는 일이긴 하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과 할 수 있는 일들은 각자 다 다르고, 바로 그게 우리의 개성을 만들어주니까.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나와 다른 그런 모습들때문이니까.
수경이는 진상에게서 그가 할 수 있는 것, 그의 좋은 면을 바라보고 그의 존재를 사랑해준다. 그리고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믿어준다. 수경의 동생 훈이가 평소대로 진상을 '개진상'이라고 부르자 훈이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건 단지 진상이 아기 아빠라서만이 아니라 진상에게 좋은 면들이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개진상'이라고 불러서 진상을 쓰레기같은, 무가치한 사람으로 매도하는 게 싫어서일지도 모른다. 나쁜 놈을 나쁜 놈이라고 부르면 좋은 면은 드러나기 어렵다. 나쁜 놈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자존감도 무너져서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이것밖에 안 되는 놈'이라고 생각하게 되어버린다. 그래서 나쁜 놈, 쓰레기, '개진상'같은 말들은 옳지 않다. 10퍼센트 없는 것, 10퍼센트 나쁜 것은 전부 없는 것, 전부 나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남은 90퍼센트가 있다. 그런데 '개진상'같은 말들은 스스로 90퍼센트를 부정하고, 남들도 90퍼센트를 부정하고, 남은 90퍼센트를 살리기 위한 용기도 버리게 만든다. 장난으로라도 좋은 말은 아니다.
진상은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술에 취해 괴로워하는 진상을 보면서 수경은 눈물을 흘린다.
종영까지 얼마 남지 않은 드라마 속에서 진상이 오래 반항을 하거나 멀리 이민을 가서 윌리엄 서덜랜드라고 개명하는 일은 불가능할테니 결국 진상은 마음을 정리하고 수경이와 아이에게 정착하게 될 것이다.
진상이 자신의 장점을 똑바로 바라봐주고 사랑해줄 줄 아는, '누나 마음'을 가진 수경이와 행복하게 살면 좋겠다.
나도 수경이와 같은 누나 마음을 기르고 싶다. 더 넓은 '인간'을 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