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겹고 절망적인 일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다
'고슴도치의 우아함'은 프랑스 작가 뮈리엘 바르베리의 소설이다. 아름답고 유쾌한 순간들을 연결한 듯한 소설이라 일상에 지쳐서 생각이란 걸 하고싶지 않은 순간에 읽어도 부담이 없다.
르네는 54세의 프랑스 아줌마, 최고급 아파트인 그르넬 가 7번지의 수위이다. 곱사등이처럼 등이 굽어있고 오동통하고 젊었을 때부터 이미 노안이었던 그녀는 외형적으로 한번도 아름다웠던 적이 없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가끔 드는 생각이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나 그들의 인생에 관해서 제대로 보거나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세상과 그 속의 인간들에 대한 환상이 마치 현실인 것처럼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예를 들어 르네와 같은 수위 아줌마라면? 수위 아줌마도 펄펄 끓는 물이 아닌 85도씨의 녹차를 선호할 수 있고 비트겐슈타인이나 스피노자에 관한 책을 읽을 수 있다. 라틴어로 된 아이네이스를 읽으면서 디도의 유명한 대사인 vixi et quem dederat cursum Fortuna peregi (나는 살았고, 운명이 내린 길을 완수했네.)를 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다니는 학교 건물에 계신 수위 아저씨가 그런 분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만일 수위실에서 베르길리우스의 책을 발견하게 되면 나는 깜짝 놀랄 것이다. 그리고 묻겠지. "이 책, 아저씨가 보시는 책이에요? 이건 어떻게 읽게 되셨어요?" 학부생들이나 대학원생들에게는 묻지 않을 이 질문을 수위 아저씨에게는 아마 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어떤 사람의 학벌, 직업, 가정환경, 외모, 습관, 성격, 행동 등에 관한 범주가 있고 우리는 그 범주에 기대어 사람들을 평가한다. 평가뿐만 아니라, 그렇게 듣고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본다. 수위 아줌마가 대화 속에서 어떤 번뜩임을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걸 자연스럽게 무시한다. 수위 아줌마의 전형에 그런 모습은 포함되어 있지 않으니까.
르네는 우리들의 그런 환상에 부합하는 전형적인 수위 아줌마의 모습을 가장하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 르네는 일부러 맞춤법을 틀리고 하루종일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가난한 사람이 먹을법한 음식 재료들을 사들고 들어온다. 고급 아파트의 주민들은 르네의 그런 모습을 보고 안도하며, 만족스럽게 눈살을 찌푸린다("쯧쯧, 수위 아줌마들은 다 저렇지 뭐. 저 정도는 참아줄 수 있어."). 누가 오만한 건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르네는 텔레비전을 켜놓고 수위실 안쪽 방에 앉아 자두를 깨물며 훗설의 책을 읽고 레퀴엠을 듣는다. 르네는 스스로를 신들린 애였다고 말한다. 그녀는 고된 노동에 지쳐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는 외에 보살피는 데까지는 생각이 닿지 못했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그녀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지만 그녀의 이름을 부른 적은 거의 없었다. 집에서는 대화도 없었고 책도 없었고 웃음도 없었다. 르네는 학교에 가서야 비로소 이름을 불러주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의해 자신의 존재를 느기고 안에 눈송이가 날리는 유리구슬을 손에 쥐고 바라보면서 아름다움이란 걸 알게 된다. 그녀는 세상에서 처음 만난 아름다움과 지식에 목말랐다. 그녀는 극심한 허기를 느꼈다. 르네는 외부적으로는 못생기고 무식한 수위 아줌마의 삶을 살면서 내부적으로는 도서관에 가서 읽을 수 있는 모든 책들을 빌려와 읽고 아름다운 음악과 영화를 감상하는 즐거움을 추구하게 된다.
르네에게는 같은 아파트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마음은 진짜 귀족'인 친구 마누엘라도 있다. 그녀들은 수위실에서 마누엘라가 만든 과자를 먹고 차를 마시며 '제후들의 연회'를 즐긴다. 반면 현실의 귀부인들인 아파트의 주민들은 가정부들의 시급을 한푼이라도 깎으려고 애쓰고 질투심어린 눈으로 이웃들을 바라보며 천한 사람들을 경멸하는 천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다. 르네는 언어의 완벽성도 추구해서 맞춤법에 맞고 문학적으로 아름답고 정확한 말들을 구사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파트 주민인 팔리에르 부인이 르네에게 쪽지를 보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미셸 부인,
오늘 오후에
당신이, 세탁 박스를 수령해주시겠어요?
문제는 문법에 맞지 않는 쉼표의 사용 내지는 남용이다. 르네는 참을 수 없이 분노한다. (나는 맞춤법이나 문장의 아름다움이 그렇게까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이쪽 분야의 문외한이지만 르네의 분노는 재미있었다.)
르네는 이렇게 말한다.
유복한 삶의 혜택을 입는 자는,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에서 엄격함을 지킬 의무가 있다는 것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 인간의 재산인 언어와 그 언어의 사용, 그리고 사회 공동체의 형성은 신성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시간과 함께 진보하고 변화하고 잊혀지고 부활하고, 가끔 이 법칙의 위반이 더 큰 비옥함의 원천이 될지언정, 처음부터 성스러운 위업들에 장난과 변화의 권리를 주장하려면 일단 그것들에 완전한 복종을 신고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회의 선택 받은 자들, 즉 가난한 사람들의 몫인 노예상태로부터 운명이 제외시켜 준 그들은, 언어의 훌륭함을 숭배하고 준수해야 하는 이중의 임무를 갖는다.
부자들에게는 아름다움의 의무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죽어 마땅하다.
-'고슴도치의 우아함', 아르테, 158쪽-
카쿠로 오주라는 일본인 사업가가 그 아파트에 새로 입주하면서 르네의 삶은 전환점을 맞는다. 카쿠로 오주는 르네와 취향이 비슷하다. 음악, 영화 등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맞춤법에 관한 고상한 취향을 가지고 있으며 '안나 까레니나'를 좋아한다.
카쿠로가 처음 아파트에 온 날 아파트 주민인 로젠 부인은 르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것'에' 손봐주실 수 있어요?"
(원래는 "그것'을' 손봐주실 수 있어요?"인데 맞춤법에 맞지 않게 말하고 있다.)
그 순간 카쿠로와 르네는 소스라치게 놀랐고 그걸 서로에게 들켜버렸다. 르네가 진짜 수위 아줌마의 전형에 해당하는 무식한 사람이었다면 로젠 부인의 맞춤법이 틀렸다는 것도 알지 못했을텐데.
카쿠로는 르네가 평범한 수위 아줌마가 아니라는 걸 알아챈다.
르네는 카쿠로와의 대화 중에 한번 더 실수를 한다. 카쿠로가 들어올 아파트의 이전 주인들이 행복한 가정이었는지에 관해 이야기할 때 르네는 이렇게 말해버린다.
"아시다시피 모든 행복한 가정들은 서로 비슷하죠."
그랬더니 카쿠로가 이렇게 답한다.
"그러나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저마다 다양하지요."
르네는 또다시 소스라친다.
르네가 무의식중에 말한 것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었고 카쿠로는 그걸 알고 바로 그 다음 문장을 인용해서 답했던 것이다.
그렇게 르네는 '정체'를 들키게 되고 카쿠로와 함께 저녁 식사도 하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게 된다. 카쿠로는 르네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로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사람이 하는 말을 그대로 들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르네를 친구로 대하고 그녀를 존중한다.
카쿠로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르네를 여자로 좋아하게 되었던 것 같다. 르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카쿠로와 함께할 때만큼 자기 자신의 본모습 그대로를 드러내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어본 적이 없었다.
카쿠로는 르네에게 자기의 생일에 저녁식사를 함께 해달라고 초대한다. 그러나 르네는 카쿠로와 자신의 관계가 더 깊어지는 것을 깨닫고 물러나버린다. 르네에게는 자기보다 더 '신분'이 높은, 다른 계층의 사람과 어울리면 벌을 받게 될 거라는 편견 내지는 상처가 있다.
르네의 언니 리제트는 보기 드물게 아름다웠다. 그녀는 어느 부자에게 농락당하고 임신한 몸으로 버려져 집으로 쓸쓸하게 돌아왔다. 그리고 아이를 낳다 죽었다.
어렸던 르네는 그때 깨달았다.
이 비극으로 나는 두 가지 확신을 얻었다. 즉, 위계적 질서에 배당된 기쁨과 고통 속에서 강자는 살고, 약자는 죽는다는 것. 그리고 리제트가 예쁘고 가난했던 것과 똑같이, 나는 영리하고 너무도 가난했기에 만일 내가 우리 계급을 멸시해서 내 정신으로부터 이익을 얻기를 원한다면 나 역시 똑같은 벌을 받으리라는 것. 결국, 나는 내 과거의 모습으로 계속 살아야 했기 때문에 나의 길은 비밀의 길인 것처럼 보엿다. 즉, 나는 내가 과거에 어떠했었던가에 대해 입을 닫고, 다른 세계에 결코 섞여서는 안 되었다.
침묵하는 자는 그래서 숨어사는 자가 되었다.
-'고슴도치의 우아함', 아르테, 422쪽-
르네의 이런 생각이 작위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한창 젊을 나이에 이미 중년 부인의 분위기를 가졌다고 말할 정도의 못생긴 외모, 굽은 등, 뚱뚱함, 가난함, 낮은 학벌, 가진 게 없음, 무시받는 직업... 이런 것들은 현실에서는 당사자에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친다. 당사자의 자존감에, 그리고 생각에.
나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가슴이 나오는 걸 감추고 다니려고 이렇게 어깨가 굽었니?'
초등학교 3학년 때였고 성징이 나타나기 전으로 기억한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그런 무책임한 말을 툭 던져놓고 가버린 거다. 나는 그때부터 내 어깨가 굽어서 보기 흉하다고 생각했고 남에게 내가 걸어다니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초등학교 3학년 때 1년간 매일 새벽에 등교했다. 거리에 아는 친구가 아무도 없어야 안심이 되었다. 아무도 내 등을 보지 않았으면 했다. 나는 누가 볼세라 땅만 보면서 빠른 걸음으로 교실에 들어서곤 했다.
내가 내 어깨가 굽지 않았다는 것, 내 외모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깨달은 건 중학교에 가서 전신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보고 꼼꼼하게 점검해본 후의 일이었다. 물론 지금은 내 어깨가 굽었다고 해도 무슨 상관이냐고 할 정도로 자존감이 생겼지만, 그 당시에 그건 굉장히 큰 충격이었고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래서 나는 르네가 이해가 간다. 평범한 사람들은 르네의 언니와 르네의 상황이 무슨 연관이 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람은 언제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두려워할만한 일에만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르네는 어쨌든 용기를 내어 카쿠로의 초대를 다시 받아들이기로 한다. 카쿠로는 르네의 비밀을 팔로마(르네의 12살짜리 친구로 아파트의 거주민이다. 르네, 카쿠로, 팔로마는 일종의 속물적이고 천한 세상에 맞선 '아름다움 추구의 동맹' 관계에 있는 친구들이다. 르네는 앞서 팔로마에게 언니의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에게서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카쿠로는 르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당신 언니가 아니에요.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마저도 될 수 있어요."
그 말은 르네의 껍질을 깨어버린다.
그러나 르네의 비합리적인 미신이 맞았는지도. 르네는 바로 그 다음날 간질 발작을 일으킨 거지를 도우려다가 세탁소 차에 치여 죽음을 맞게 된다.
남겨진 팔로마와 카쿠로는 끔찍한 고통을 겪는다. 그들은 고통 속에서 아름다운 음악에 귀기울인다. 카쿠로는 말한다. "나는 르네가 이 순간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르네는 절망적이고 일상적인 속됨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항상 추구하고 거기에서 행복을 느꼈으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특히 맞춤법이 맞는 아름다운 언어 구사에 관한 르네와 카쿠로, 팔로마의 열렬한 애호는 평소 나의 생각과 다른 점이 있기 때문에 더욱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감상적인 면도 많지만 주로 현실적인 사람이고 아름다움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지 않다. 아름다움은 느낀다. 하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나의 태도는 뭐랄까, 밥 안 굶는게 아름다움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라는 식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흔히 추구하는 아름다움을 통한 권력의 확인에도 부정적이다. 예를 들어 맞춤법을 틀리거나 거칠고 조악한 말투이거나 글을 잘 못 쓰거나 아름답고 고상하게 치장하지 못하거나 비싼 옷, 비싼 음식, 비싼 취미에서 심미안을 갖고 있지 않다거나 하는 이유로 누군가를 경멸하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 그런 수단으로 이용되는 아름다움이라면 개나 줘버려가 평소의 내 생각이다. 히틀러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털이 박박 깎이고 죄수복을 입고 짐승 대접을 받으면 대번에 사라질 그런 오만한 아름다움은 혐오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아름다움에 대한 내 관점들을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내게도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 있으며, 내가 경멸했던 그런 종류의 고상함이나 아름다움은 사실 진짜 아름다움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기 위해 사용되는 그런 수단은 결코 아름다움일 수가 없고 그런 것들을 아름다움의 범주에 포함시킨 것이 진짜 아름다움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왜곡시켰다는 걸. 그리고 인간에게는 때로 밥보다 아름다움이 더 소중하다는 걸 내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또 하나 더. 눈을 크게 뜨고 귀를 활짝 열자는 생각. 우리가 타인에 대해 가진 편견 내지는 선입견은 사실 예기치 못한 일들의 발생을 줄이고, 최대한 정확한 판단을 통해 상황을 통제함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기제이다. 뜨거운 커피가 든 컵에 손을 데인 적이 있는 사람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그냥 컵만 봐도 뜨거울 거라는 선입견을 갖는다. 그래서 손을 갖다대지 않고 조심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기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큰 장애가 된다. 우리는 우리 머릿 속의 편견, 선입견, 지식, 범주에 의해 형성된 사람을 보고 그런 사람들이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말들을 '듣는다'. 나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카쿠로의 눈이 놀라웠을 정도로.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 앞으로는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나 스스로가 만들어낸 허상에 속지 않고 실제의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게르망트 공작부인같은 수위 아줌마는 그런 점에서 흥미로운 소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