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
라는 제목의 문학 작품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제목이 신기해서 샀고 좋은 책이었어요. 하지만 역시 내용보다는 제목이 압권이죠.
학교에 가는 길에 꽃들이 누워있는걸 보고 찍은 사진이에요. 나는 죽었으니 이제 그만 나를 잊어주오, 세상을 따라 달리는 것이 갈수록 힘이 드니 나는 좀 풀어주오.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건 제 기분이었어요.
월요일부터 보기 시작한 모의고사가 오늘에서야 끝났어요. 예상은 했지만 5일간 아침부터 저녁 6시까지 꼬박 앉아서 문제들을 풀고 또 푸는 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좀 지치네요. 저녁 때 잠이 쏟아져서 브런치는 일주일동안 오지도 못했어요. 식욕, 성욕, 수면욕, 예술욕 등등 인간의 모든 욕망 중에 수면욕과 식욕은 막상막하이며 어쩌면! 수면욕이 더 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나마 이번 주가 맥모닝 위크여서 '맥모닝 먹는 재미로 다니자!'라고 활기차게 마음먹기는 했지만... 고3 때도 안 해본 공부를 요즘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반강제적으로ㅠㅠ
#천천히 가요, 엄마
제가 학교 가는 길은 마침 어린이집으로도 이어져있어요. 차도 거의 다니지 않는 이 길에 이런 표지판이 있네요. "서행하세요." 마치 아이들이 엄마랑 같이 어린이집에 갈 때 하고 싶은 말 같아요. 제발 천천히 갔으면, 엄마 손을 놓고 싶지 않은데, 저녁 때 엄마 올 때까지 오늘 하루도 어떻게 버티나.
유치원이 아닌지라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기들도 많이 보입니다. 이 길이 아기들에게는 엄마나 아빠랑 헤어지는 길이니 통곡의 길이 되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우는 아기들은 별로 없어요.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이미 눈물 콧물 다 흘리고 여기 올 때쯤엔 지쳐서 그런건지 아니면 사람은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 때 퇴근한다는 인생의 법칙을 몸소 체득했기 때문에 초연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요즘엔 아기들의 모습을 보면 뭔가 짠한 느낌이네요.
일찍부터 어린이집에서 사회생활하는 법을 배우고 조금 있으면 학습지를 시작하고 학원도 다니고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이제 본격적으로 글래디에이터 생활이 시작되겠죠? 사자와 싸워 이겨야만 노예 신분에서 풀려나는 검투사들처럼 학교라는 검투장에 가서 영어나 수학, 내신, 수능시험, 수시같은 사자들 앞으로 내몰리겠죠. 살 날이 많이 남았다는게 오히려 짠한 느낌이라는 거... 좀 슬프네요.
#오늘 비오는 날 동네 꽃들
오늘 아침에 학교에 가다가 꽃들이 보기 좋아서 찍은 사진들이에요. 저희 동네는 식물 기르는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많아요. 화려한 꽃, 상추, 고추, 방울 토마토, 호박 가릴 것 없이. 제가 어릴 때 한창 뛰어놀고 지금은 위험하다고 쓰지 않는 놀이터가 있는데요, 들리는 바로는 저희 동네 할머니들이 그 놀이터를 접수하고 성토 작업을 마친 뒤 거기서 농사를 짓고 계시다고 합니다.-_-
저희 동네 구성원들은 주로 나이많은 어르신들이에요. 서울에서는 보통 명절 첫날 집들이 많이 비는데 저희 동네는 오히려 차들이 몰려옵니다. 아들들은 하나 둘 나와서 담배태우고 며느리들은 집에서 전 부치는 시월드의 귀기가 가득한 동네입니다. 그러고보니 명절 당일날 오후쯤에 차가 빠지는 걸 보면 정말 처가보다는 시댁인 집이 더 많은가 보네요.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를 명절 때 아니면 듣기 힘들만큼 조용한 동네입니다. 식물들과 어르신들이 한가로이 지내는. 가끔 어느 집에서는 치매에 걸리셨다고 하는 노인 한 분이 나와 햇볕에 앉아계시기도 하죠.
나이들면 어린애가 된다는 말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오히려 나이들수록 마음을 쉽게 열고 편하게 손을 내미는 분들도 계세요. 70대 할머니가 80대 할아버지에게 여기 자리에 앉으시라고 호들갑스럽게 손짓도 하시고,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도 "좀 드셔봐요."하면서 떡이나 과자를 주섬주섬 꺼내십니다. 그러면 금방 친해지셔서는 마치 초등학교 동창회라도 되는 듯 주위의 어르신들이 한데 모여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시죠. 그리고 헤어질 때는 선뜻 "잘 가세요."하고 털고 일어나시고요. 그런 모습을 보면 산티아고 순례길같은, 여행지에서 하룻밤 이야기를 나누는 여행자들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분들께는 이제 인생이 여행처럼 느껴져서 경계심 없이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걸까요? 나이듦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본 꽃들의 근황
누워있던 꽃들 기억하시나요? 오늘 아침에 가보니 모두 이렇게 묶여서 똑바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으아...
살아있는 한 지쳐도 쓰러질 권리가 없나 봅니다.
저도 누가 묶어놓은 듯 바짝 정신차리게 되네요.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는 그냥 기분으로만 남겨두고 다시 인생을 살러 가야겠습니다.
그래도 금요일이라서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