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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May 09. 2021

출소

우울증이라는 감옥

소금쟁이처럼 우울의 바다 위를 걸어가기...


 우울증이라는 감옥에서 출소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울증에서 낫는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는 사실 잘 몰라요. 청소년기, 어쩌면 초등학교 때부터도 우울증이 있었기 때문에... 전 우울증이 없는 삶이라는걸 살아본 기억이 없거든요. 그래서 객관적으로는 제 판단이 틀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제가 요 몇년간 꾸준히 삶을 경험해왔다는건 분명해요. 망해버린 인생 속에서 살지도 죽지도 못하고 산송장으로 기어다니고, 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내 몸뚱이가 너무나 버겁고 혐오스럽고 질식할 것 같았던... 그런 날들이 끝난지는 좀 오래됐어요.


 요즘은 우울증에 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아요. 우울증이 저에게 남아있는지 아닌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더이상 우울증에 갇혀있지 않기에 관심이 가지 않아요. 그냥 방 어딘가에 두고 평소에는 잊어버리는 물건들처럼, 우울증도 어딘가에 치워둔 느낌이에요.



 '나는 우울증에서 완치되었다'라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면서 억지로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건 아니에요. 그랬다간 나중에 우울증에게 몇배로 되갚음당한다는걸 잘 아니까요. 항상 조심스럽게, 의심하면서 저를 잘 관찰하고 있어요. "너 정말 괜찮아? 진짜? 속이는거 아니지?" 이렇게 물어보면서요.


 브런치에 오랫동안 글을 못 쓴건 그런 의심이 계속 있어서였어요. 브런치에서 제가 이제는 우울증이 괜찮아졌다고 성급하게 써버렸다가 그 글에 얽매이게 될까봐 두려웠어요. 그러면 우울증이 더 커져서 돌아오게 되니까요. 조금씩, 천천히, 이제는 특별한 일이 없는한 예전으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이 강해져서 글을 다시 쓰게 됐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뭘 입을까, 오늘은 무슨 재밌는 일을 할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어요. 물론 오늘 직면해야 하는 불유쾌한 일들도 생각이 나지만 '에잇, 어떻게든 되겠지. 한번 해보자!'라는 구명조끼가 툭 튀어나와줘요. 그럼 전 저만의 안전장비들에 의지해서 안좋은 일들 속으로 나아가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매일매일이 가슴벅차게 행복하고 마냥 즐거운건 아니에요. 기쁨, 행복감, 설레임도 느끼지만 우울감, 불안감, 슬픔, 좌절 같은 감정들도 느끼면서 살아요.


 인생은 우리를 우울증 속으로 빠트릴만한 일들 투성이인 것 같아요. 무슨 일이 안돼서, 나쁜 사람과 얽히게 돼서, 실직하게 돼서,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병이 생겨서, 돈이 없어서... 고통도 느끼고 욕망도 느끼는 저 자신이 있는 한, 인생엔 힘든 순간이 많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누군가는 운이 좋아서 힘든 일을 덜 겪고, 누군가는 운이 나빠서 힘든 일을 더 겪는다는 차이는 있겠지만요.


 그래서 저도 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닥쳐온다면 다시 우울증에 빠질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줄 수 있고, 그럴 수 있게 마음을 많이 바꿔왔으니까 우울하지 않아요. 그동안 전 현실이 지하 10층에 있는데 마음은 지상 10층에 있었고, 마음은 그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현실을 끌어올린다면 해결됐을수도 있었지만 그게 안되니까 저는 마음을 조금씩, 힘겹게 내려놓았어요. 그리고 지금은 마음도, 현실도 같은 곳에 있고, 마음이 예전에 바랐던 것보다 훨씬 행복한 삶(내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울증이 없어요.


 하지만 다시 현실이 지하 20층, 30층까지 떨어져버린다면 마음이 또 쫓아가기까진 시간이 많이 걸리겠죠? 그러면 전 마음이 현실을 따라잡을 때까지 다시 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을 거예요. 그리고 다시 빠져나올수도 있겠죠. 지금까지 해온 방식으로,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알게된 방향으로.


 지금은 그게 인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우울의 바다 위를 조심스럽게 건너가는 소금쟁이의 삶. 때로는 발목이 잡히고 파도에 묻혀 쓸려가는 순간들도 있지만 또 다시 떠올라 걸어갈 수 있게 되는 날도 오는...     


 요즘 저는 매일 방정리하듯 감정들을 정돈하고 청소도 해요. 저장강박에 걸린 사람처럼 감정들을 쌓아두다보면 언젠가는 썩다가 우울증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제때 다 갖다 버리기로 했어요.


 페트병은 라벨을 떼고 밟아서 구긴 다음 버리고, 음식물이 묻은 비닐은 세제로 씻어서 버리는 것처럼 번거롭지만 매일 감정들을 분리수거해서 잘 버리고 있어요. 제가 하고싶은 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이것저것 프로그램에 지원하고 사람들도 만나요. 그리고 일도 하죠.


 다음 번에는 경력없는 30대 은둔형 외톨이가 어떻게 취직을 하고,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에 관해서 써볼게요. 저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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