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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Mar 20. 2023

그래서 지금은 우울증이 없나요?

우울증에 별로 방해받지 않는 삶


도저히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느꼈던 시절에 다른 사람들의 우울증 수기를 참 많이 봤다. 브런치, 블로그, 커뮤니티에 쓴 글, 책... 우울증과 싸우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양했다. 심리상담, 정신과 치료와 입원, 운동, 감사일기 쓰기 등등. 


나는 주로 두 가지를 집중적으로 봤다. 첫번째는 우울증을 이겨낸 방법, 두번째는 그래서 결과적으로 우울증이 나아졌는지 여부. 그때 나는 너무 오랫동안 절망적이었기 때문에 우울증에서 자유로워지는게 정말 가능한건지 궁금했다.


물론 어떤 방법을 통해 나아졌다고 해도 그건 그 사람에게 맞는 방법이고 내 우울증이 낫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낫는 사람들의 사례를 보면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젠가는 나도 이 지옥같은 고통에서 해방될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이라도 갖고 싶었다.   


아무튼, 그때의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검색을 하다 이 글까지 닿게 될 누군가를 위해 나도 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나는 내가 우울증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지금은 우울증에 의해서 내 삶이 별로 방해받지 않는다는 것은 이야기할 수 있다. 내가 이전과 확실하게 달라졌다고 느끼는 부분들은 이런 것들이다.  



1. 부정적인 생각/감정의 흐름이 많이 줄어든 것


우울증일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부정적인 생각/감정의 흐름이 한순간도 쉬지 않고, 거의 질식할 것처럼 퍼부어진다는 거였다. 성공한 다른 사람들의 사례, 실패한 기억, 수치심, 신체에 대한 혐오... 다 기억은 안나지만 아무튼 매순간 그런 생각과 감정에 맞고 있다 보니 항상 아프고, (감정조차 메말라버리기 전에는) 눈물도 멈추지 않고, 차라리 자살해서 이 끔찍한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런건 확실히 없어졌다. 물론 부정적인 감정, 생각들이 아직 남아있고 쭈그러진 자존감을 조금씩 펴나가는 중이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상황속에 놓이지는 않는다. 폭우와 보슬비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폭우 속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비를 맞으며 무너져있을 수밖에 없지만, 보슬비가 내릴 땐 우산도 쓰고 장화도 신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지금의 나는 대체로 햇빛 아래서, 가끔은 보슬비를 맞으며 무너진 나를 하나씩 쌓아올리며 살아가고 있다.



2. 죽고 싶다는 생각이 안든다는 것


나에게 지난 2년은 우울이 없었어도 힘든 시간이었다. 우울증이 지나간 후에 폐허가 된 삶을 다시 복구하는 과정은 많이 힘들었다. 물론 우울증의 고통에서 해방된 것만 해도 마음이 홀가분하고 살 것 같았지만 그래도 '다시 살기'는 만만치 않았다. 불안정한 직장, 그 와중에 갑질하는 직장 사람, 은둔생활에서 벗어나 처음 해보는 사회생활, 내 직업과 앞날을 나보다 더 불안해하는 (그리고 부끄러워하는) 아버지, 언제 다시 우울증으로 끌려들어가 무너져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밑바닥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한없이 초라해보이는 나 자신...   


그럼에도 죽고 싶다는 생각은 안들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은 했어도 나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갑질하는 사람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는데 아무리 내 마음을 들여다봐도 죽고 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순간 뿌듯하고 좋았던 기억이 난다. 힘든 일이 많았지만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 이겨냈고, 열심히 찾고 노력해서 더 좋은 곳에 취업도 성공했다. 이건 정말 크게 달라진 부분인 것 같다.



3. 해야할 일을 안다는 것


우울증을 예방하기 위해 해야할 일, 그리고 우울증에 한발 담근 상황에서 바로 빠져나오기 위해 해야할 일을 안다는 점도 많이 달라진 부분이다.


매일 출근하기, 월급받기, 친구들과 대화하기, 취미생활 만들기, 새로운 곳 걸어다니기, 주기적으로 사람들 만나기, 맛있는 음식 마음껏 먹기(다이어트는 좀 포기했는데, 지금은 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게 체중보다 중요해서...), 길고양이 보기, 여러가지 교육 받기, 소소하게 부업해서 편하게 쓸 수 있는 돈 벌기, 저녁에는 아무것도 안하고 푹 쉬기, 상담이나 원데이클래스 등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기분전환 하기, 열심히 일하고 싶어질 때 조금 자제하기, 우울증으로 갈 수 있는 마음의 위험신호들이 보일 때 멈추기 등등.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했던 것들을 지금은 일상적으로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예전에는 찾아내고 노력해야 했는데 지금은 어느정도 습관이 된 것 같다. 이런 습관이 모여서 우울증으로 쉽게 빨려들어가지 않게 잡아주는 느낌이다.




그래서 지금은 우울증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 살고 있는 편이다. 우울증으로 인한 고통이 없어지니까 확실히 살만하다. 아직 일상을 살아낼 에너지도 부족하고 자존감도 구겨져있고 마음이 힘든 순간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재밌고 즐거운 것들이 많아서 살고 싶다. 나는, 천천히 회복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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