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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Apr 12. 2023

카프카와 나의 아버지들

처음으로 하고싶은 이야기를 했다


카프카도 아버지와의 관계가 힘들었다고 한다. 억압적이고 통제적인 아버지. 아버지가 정해준 장래, 아버지에게 인정받아야 의미있는 삶. 자식에게 소중한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 소통 불가능한 억압자.


카프카는 아버지에게 부치는 편지를 썼지만 실제로 보내지는 못했다고 한다. 나는 한번도 써본적이 없다. 어차피 이해하거나 설득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화나 안내면 다행이지...


나와 카프카는 대충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 둘다 결국 아버지를 실망시켰고 우리가 원하는 길을, 상당한 우울과 마음의 짐과 쪼그라든 자아를 가지고 나아가게 됐다.


언젠가 '비폭력 대화' 공부방에 참여한 적이 있다. 줌으로 진행됐는데 오늘의 기분인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아버지와 뭔가를 주제로 싸우고 기분이 다운되어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나의 기분을 묻는 순간 갑자기 아버지와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게 됐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진행자 선생님이 나에게 이 자리에서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셨다. 역시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너무 솔직하게 진짜로 내 아버지에게 하고싶은 말을 해버렸다.


"아빠, 나는 내가 원해서 가고있는 길을 아빠가 받아들여줬으면 좋겠어. 나는 그동안 아빠 인생을 대신 살아주느라 최선을 다했어. 그러느라고 나는 너무 힘들었고 할만큼 다 했다고 생각해. 이제는 제발 나는 아빠와 다른 사람이라는걸 인정하고 내가 가는 길을 존중해줘."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거기 계신 분들 중 한분이 내가 아빠한테서 듣고싶은 말을 대신 해주셨고... 나는 조금 울었다. 그때는 아빠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작년 말, 올해 초에 연달아 심리상담을 받았다. 무료 상담이었고 8회기씩 두번 진행했다. (나중에 상담 내용만 따로 모아서 한번 글을 써보려고 한다.)


상담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핵심 문장은 "오렌지나무님은 그동안 아버지 인생을 대신 살아줬어요. 오렌지나무님의 인생을 산 적이 없어요."였다.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내 평생은 아버지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생활에서의 통제, 친구관계에서의 통제, 취미에서의 통제, 전공에서의 통제, 직업에서의 통제, 먹는 것 통제, 운동 통제, 방 정리 통제, 집안에서의 온갖 규칙 통제... 아버지는 불안도가 굉장히 높은 사람이고 통제되지 않는 사건이 있으면 확 폭발하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나는 비위를 맞춰서 "이 귀신을 달래려고", 무당의 심정으로 통제에 따라왔다.


통금 8시 반(근무 제외하고 9시가 넘으면 나가 죽으라는 카톡이 온다), 친구가 있다고 말 못함(무슨 친구냐, 어떤 사람이냐 물어보고 걱정하고 친구 만나는 것 자체가 쓸모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짜증냄), 일주일에 사적으로 나갈 수 있는건 며칠(개인적인 일로 외출을 자주하면 짜증냄. 공부할 시간 줄어든다는 이유도 있고 그냥 싫어함.), 이동할 때마다 카톡해야하고 좀 오래 있어도 중간에 잘있다고 카톡해야됨(낮시간인데도 납치된 줄 알고?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욕하면서 나가 죽으라고 전화옴), 취미는 시간낭비고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해서 짜증냄, 전공이나 직업에 관해서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만 맞고 자기 뜻에 따라야 함(어릴 때부터 하도 익숙해서 내가 원하는게 뭔지 모름), 건강 생각해서 싫어하는 견과류도 매일 먹어야하고 아침밥상도 거의 환자밥상 수준이고 가끔 밥에 콩 적게 넣었다고 소리지름 등등.


반박하면 눈을 부라리면서 개소리라고 하고 내 집에서 나가라고 하고 뭔가 박살을 낼 것 같은 제스쳐를 취한다.


어차피 말을 해도 소용없기 때문에 겉으로는 원하는대로 생활습관을 맞춰주고 뒤로 거짓말하고 내 할 일을 한다. 도서관 간다고 하고 친구 만나고 프로그램 참여하러 가고 등등.


그럴 땐 카드를 못쓴다. 내가 쓰는 카드는 가족카드라 바로 아빠에게 문자가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금을 갖고 다니고 어쩔 땐 식당 이름 때문에 카드를 못쓴다. 예를들면 우리동네 도서관에 있다고 해놓고 '명동 돈가스'에서 카드를 쓰면 거짓말인걸 아니까... 그럴 땐 현금을 쓰거나 염치불구하고 얻어먹게 된다.


부모가 이렇다는게 너무 창피한데, 이제는 포기도 했고 내가 좀더 당당해지기도(?) 해서 주위에 솔직하게 말한다. 밤 8시반쯤 되면 "아, 집에서 문자왔는데 아빠가 나가 죽으래요. 아빠가 불안장애가 심해서 제가 밖에 있으면 잠을 못자요. 죄송한데 가볼게요."라고 말하며 일어선다.


진심으로 미쳐버리겠고 나는 엄마가 이혼해서 나를 진작 데리고 나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런 아빠 때문에 본인도 괴롭다고 나한테 아빠 욕을 하면서도 이혼은 안하는, 그런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는 대신에.


가장 나쁜 면만 모아놓으니 미친 인간으로 보이겠지만 좋은 점도 많다. 어쨌든 어릴 때부터 육아에 적극 참여한 것, 어릴 때는 내 의견을 존중하고 내가 하는 것을 지지해준 것, 칭찬해주고 아낌없이 사랑해준 것. 분명히 문제 많은 사람인 증오하면서도 사랑한다. 가족이 이런건지.


상담에서는 이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리고 이제 아빠 인생은 그만 살고 내 인생을 살아야 된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상담 끝에 늘어난건 분노였다. 한동안 내 안에 아빠에 대한 분노가 가득차서 그냥 아무 일 없는데도 얼굴 마주치는게 싫을 정도였다. 작은 일에도 악을 쓰며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아빠는 내가 시민사회쪽 활동에 시간을 많이 쓰는걸 싫어한다. 지금 업무에 관한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데 봉사를 왜 하냐, 니가 호구냐, 그만해라, 널 이용하는거 아니냐, 니가 '상록수'냐...


요새 그걸로 엄청 싸웠다. 내가 격렬하게 맞서 싸우니까 아빠도 시민사회 일을 좀 받아들이는가 싶더니 다시 싸울 일이 생겼다.


사건은 내가 퇴근 후에 **역 인근에 있는 의료사협 회의에 갔을 때였다. 저녁 7시쯤이었고 도무지 걱정할 시간이 아니었다. 사전에 카페 위치도 지도로 보내줬고, 카페가 **역 인근에 있어서 "**역 도착"---1분 후---"목적지 도착" 이렇게 두번 카톡을 보내기 귀찮아서 그냥 "도착"이라고만 보냈다.


도착한게 **역인지 최종 목적지인지 궁금하면 카톡을 하면되지 30분간 아무 카톡도 없다가 (평소 핸드폰 중독이라 5분에 한번은 본다) 하필 안보고 있는 5분안에 전화 5번, 카톡 하나를 보내더니 개난리를 쳤다. 욕을 퍼부으면서 당장 그만두라고. 부모 둘다 내가 실종된 줄 알았다는 거다.


이럴 땐 솔직히 절망스럽다. 물론 더 정신이 이상한 부모도 많다는건 알지만 왜 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이번엔 그냥 집을 나갈 생각이었다. 직장이 좀더 탄탄해져서 나가 사는게 어렵지도 않았다.


집에 와서 끝장을 볼 생각으로 싸웠다. 나는 내 인생 망친게 다 아빠 때문이라고 악을 썼다. 상담받을 때 들었던 것들, 평소에 말도 못하고 눌러온 것들을 다 이야기했다.


왜 친구도 못만나게 하고 취미생활도 못하게 하고 공부만 하게 했냐, 그래서 우울증 오고 시험 다 망했던거다, 아빠가 망친거다, 난 사람답게 살고싶다, 친구도 있고 모임도 나가고 이런게 인간다운거지 그동안 난 사람같이 살지도 못했다, 우울증 있으면 치료를 받게 해줘야지 왜 우울증은 개소리라면서 방치했냐, 내가 고등학교 자퇴하고 7년간 집에만 있을 때 그게 이상하고 병원에 데려가야 된다는 생각은 못했냐, 난 지금까지 내 인생도 못살고 다 아빠 인생만 살아주다 이렇게 망했다...

 

대충 이런 내용으로 악을 썼다. 아빠도 마찬가지로 난리쳤고.


나는 이런 이야기를 평생 못할 줄 알았다. 그냥... 내가 그럴만큼 강하지 못하기도 했고 화를 낼 아빠가 두렵고 그 이야기 자체가 나한테 상처라서 못했다.


그런데 이번엔 해버렸다. 물론 아빠가 받아들인건 아니다. 자기는 친구 못만나게 한적이 없단다. 중학교 때부터 친구 만나고 오면 내가 호구잡힌건 아닌지 체크하고 바보같은 소리했다고 난리치고 그딴 대접받고 가만 있었냐고 날뛰고... 아무튼 본인이 매사에 화를 내서 내가 모든걸 눈치보고 숨기고 포기하게 된건 모르거나 인정하기 싫은 듯 했다.


그런데 그건 별 상관없었다. 나한테는 내가 당당하게 내 주장을 했다는게 좀 자랑스러웠다.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나의 우울증과 시험 이야기, 아빠가 뭘 잘못했는지를 대놓고 이야기한게...


이건 우리 가족에게 엄청 큰 상처(?)라 그동안 언급을 거의 안했는데 그게 아빠 탓이라고 화까지 낸건 금기를 깨는 일이었다.


아빠한테 많이 상처가 됐을 것이다. 자기 때문에 내 인생을 망쳤다는 이야기. 그리고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거. 아빠는 겉으로는 절대 인정 안하고 자기만 옳아도 속으로는 다 생각은 한다. 그리고 다음부턴 좀 조심을 한다. 아마 어느정도는 내 말이 맞다는걸 인정했을 것이다. (이런 면도 있어서 100% 싫어하게는 안된다) 그러더니 며칠을 두통과 몸살에 시달렸다.


그래도 나는 할 말을 해야만 했다. 이건 진짜 꼭 한번 말하고 싶었다. 다 부모 탓을 하려는게 아니라, 나 자신에게, 세상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내 과거의 실패는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건 내 인생이 아니라 아빠 인생을 대신 살아준 거니까, 그 실패도 내 실패가 아니라고.



지금은 화해를 했다. 서로를 좀더 조심스럽게 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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