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렌지나무 May 01. 2023

자퇴 할까요, 말까요

하지마, 근데 해도 돼


가끔 브런치 유입 키워드를 보다 놀라는건 '자퇴'를 검색하고 들어오는 독자들이 굉장히 많다는 점이다. 특히 고등학교 자퇴. 자퇴를 막는 방법을 찾는 (아마 부모님일) 들도 있고 자퇴 후의 인생을 궁금해하는 들도 있었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불안이 묻어나는 키워드였다. 우울증 브런치에 우울보다 자퇴 키워드가 더 많다는게 흥미로웠다.


하긴, 내 우울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건 고등학교 자퇴가 계기였으니 관련이 없지는 않다. 그런데 예전에 쓴 자퇴 글을 다시 읽어보니 너무 부모님들 위주로 쓴 것 같아서, 그리고 그때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있어서 다시 써보려고 한다.


먼저 소개를 하자면 나는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때 자퇴를 했고 이유는 집단따돌림이었다. 바로 검정고시를 합격했고, 그때부터 7년 정도 은둔형 외톨이 생활과 우울증 투병을 하다가 남들보다 5년 늦게 대학에 입학했다.


즉, 고등학교 3년+5수를 한 셈이다. 우울증으로 공부를 전혀 할 수 없었고 수시 논술로 우연히 명문대에 입학했다. 명문대라니 잘된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그 은둔형 외톨이 기간동안 얻은 우울증이 지속되어서 여러가지 많이 망했고 여러번 (스스로) 죽을 뻔 했고 30대 중후반에 처음으로 취직해서 지금 3년차 직장인이다. 당연히 집도 없고 학자금 대출을 열심히 갚고 있다.


이런 사람에게 자퇴해도 되냐고 묻...고 싶진 않겠지만 묻는다면 내 대답은 이렇다.


하지마,
근데 해도 돼


경험자로서, 20년 전쯤 검정고시 선배 꼰대로서 조언하자면 웬만하면 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특히 우울하거나, 학교 다니는게 정신적으로 힘들다거나, 친구관계가 어렵다거나, 학업스트레스가 버겁다거나 하는 이유들이라면 자퇴를 비추한다.


힘든 이유는 세가지다.


첫째, 학교밖에는 소속될만한 공동체가 별로 없어서 사회적으로 고립될 가능성이 높. 사람은 학교를 떠날 수는 있지만 사회를 떠날 수는 없다. 그래서 어딘가에 소속되어 주기적으로 사람들과, 특히 또래들과 교류하는게 필요한데 현재는 학교밖 청소년들을 위한 공동체나 지원이 제도적으로 충분하진 않다(예전보다 많아지긴 했지만).


둘째, 일상이 무너져서 우울증이 오기 쉽다. 며칠은 아침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대낮에 서점에 가고 하는 것들이 신나겠지만 곧 흐트러지게 된다. 점점 밤에 늦게까지 게임하고 점심 때 일어나거나 평소 수업하느라 바빴을 시간에 집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거나... 안그래도 소속감 없고 붕 뜬 상태라 마음이 취약한 상태인데 일상까지 무너지면 우울증이 올 수도 있다.


셋째, 원래 사람사는게 힘든건데, 피했다가 나중에 다시 마주치면 더 힘들다. (심한 학폭을 제외하고 이야기한다) 인간관계에서 따돌림, 부적응, 이상한 인간들... 이건 우리가 평생 마주치게 될 일들이다. 청소년기에는 가족이나 유년시절 잘 맞고 순수했던 친구관계와 비교하니까 지금 주변의 이상한 사람들이 특이해보일 수 있지만, 원래 이상한 사람들이 많다. 나쁜 사람들도 많고.


지금 잠깐 피할수는 있겠지만 그러면 다음에 또 비슷한 사람들을 만났을 때 더 두렵고 또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수밖에 없다. 차라리 지금 부딪치면서 상처도 받고 사회생활에 적응하는 방법을 배우는게 나을수도 있다.




자퇴를 결정할 때의 마음은 어떤걸까? 학교생활이 만족스러운데 자퇴를 선택하진 않을 것이다. 내 생각엔 학업, 대인관계 등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부분이 있고, 뭔가 잘못 가고있는 것으로 느껴져서, 이미 뭔가 돌이킬 수 없이 잘못된 것 같아서 리셋하고 싶은 마음이 클 것 같다. 우울증이 온 상태라 공부도, 인간관계도 감당할 힘이 없을수도 있다. (뭔가 진짜 원하는게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자퇴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그런데 우리가 놓치는 부분이 몇가지 있다.


첫째, 인생은 원래 완벽하지 않고 거지같으며 그건 자기 자신도 마찬가지다. 공부를 못하든 못생겼든 성격이 소심하고 노잼이든 가정환경이 이상하든 뭔가 망한 것 같지만, 괜찮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데 말을 안할 뿐이다.


둘째, 인생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안좋은 일들로 얼룩지는게 정상이다. 내내 잘보다가 우연히 장염으로 2 중간고사를 망쳤다는거, 정상이다. 앞으로 그런 일들은 수도없이 일어날 것이다. 그럴 때마다 리셋하는게 아니라 현실을 인정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계속 나아가는게 인생의 어쩔 수 없는 규칙이다.


셋째, 꾸역꾸역 나아가다보면 나도 모르게 경험치가 쌓여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다. 지금 친구들 사이에서 바보같은 행동하고 공부 못하고 그렇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하루하루, 열심히도 필요없고 그냥 대충이라도 버티다보면 나도 모르게 뭔가 쌓이고 배운다.


그래서 우리가 환경을 바꿀 때, 예를들면 고입, 대입, 취직, 이직 등을 할 때 좀 달라지고 괜찮은 나로 새로운 환경으로 들어갈 수 있다. 애벌레가 오랜시간 기다려 나비가 되는 것처럼.


난 자퇴를 결정할 때 이런걸 몰랐던 것 같다. 뭔가 리셋하고 싶었고 피하고 싶었다. 나 자신을 바꿔보고 싶었다. 그러면 새롭고 괜찮은 인생을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질 못했고 좀 힘든 길을 걸어오게 되었다.




여기까지 자퇴를 말리는 이유이고, 그럼에도 자퇴를 하고싶은 마음이 들고, 자퇴를 해버린 사람에게는 '해도 돼, 괜찮아, 안죽어'라는 응원을 보내고 싶다. 남들과 다른 길을 가는건 힘들지만 그것도 또 나만의 인생이고 절대 틀린 길은 아니다. 어떤 것을 선택하든 현재의 내가 옳다는걸 잊지말고 가줬으면 좋겠다.


조금, 아니 많이 방황해도 괜찮다. 여기 자퇴하고 7년 방황한 사람도 있으니까. 그래도 잘 살고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도주할 자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