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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May 01. 2023

불안, ADHD, 강박 약 후기

한달 좀 넘은 복용기


맨 처음엔 ADHD약 효과로 좀 흥분하고 들떴다. 이직하고 첫 직장에 적응하느라 더 흥분했을 수도 있다.약 자체가 그런 약은 아니라고 하는데 경험상 오랫동안 안먹다 먹으면 한동안은 그런 기분이 든다.


그래서 직장생활 적응이 첫 2주 동안은 쉬웠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완전 Enfp로 보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농담을 따라가거나 들떠서 같이 휩쓸리거나 하는게 어려워졌다. 사회성 문제도 물론 있겠지만...


이번에 병원에 갔을 때 의사 선생님이 기분이 어떻냐고 묻길래 그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기분이 다운된게 아니라 차분해진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생각해보니 그게 맞는 것 같았다.


나에게는 우울, 불안, ADHD, 강박... 이렇게 4형제가 있었는데 우울은 무지개다리를 건너 보내고 이제는 셋만 남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항상 높은 불안감 속에서 긴장하고 살았기 때문에 차분해본 경험이 거의 없다. 그래서 약이 가져다준 지금의 차분함, 침착함, 느긋함을 기분이 가라앉은 것으로 착각한 것 같다. 지금의 나 자신이 좀 생경하다. 이렇게 긴장감 없다는게...

 

나는 사실 기준이 너무 낮아서 지금으로도 만족한다고 했는데 의사 선생님은 약 용량을 더 올려줬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바뀐 약을 처음 먹고나서 내가 지금까지보다 더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용량을 올리길 잘했다.


강박은 조금 나아진 것 같기도 하다. 원래 나는 퇴근할 때 지문을 찍고도 인식이 잘 안된 걸까봐 불안해서 그 장면을 찍어놓고 돌려봐야 할 정도의 사람인데 요즘은 딱 한번 눈으로 확인하고 돌아선다. 강박행동을 하려고 할 때 뭔가가 내 뇌를 스윽 감싸서 잊어버리게, 그만두게 만드는 느낌이 든다.


요즘은 나인데 내가 아닌 존재로 살고 있는 것 같다. 약 덕분에 좀더 업글된 나를 체험하고 있다. 우울증도 약을 먹었더라면 이렇게 쉽게 나았을까? 아마 많은걸 잃기 전에, 초기에 먹었더라면 괜찮았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처럼 인생 한가운데에 거대한 심연이 있는 상황에서라면 약만으로는 낫기 어려웠을 것이다. 내 인생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근본적으로 나을수가 없으니까.


아무튼, 덕분에 직장생활을 잘 버티고 있다. 직장은 참 희안한 곳이다. 따뜻하면서도 평가받고 같이 놀다가도 경쟁하고 절친같다가도 뒷담화로 돌아오는... 매순간 냉온탕을 오가는 곳이랄까. 약 없이는 적응이 안됐을 것 같다.


요즘 일 배우느라 주말에도 출근하고 있는데... 이런 나를 칭찬한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고 그 다음엔 배째라 하는걸로. 약이 불안감을 끊어주니까 진짜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진짜 살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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