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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Apr 20. 2023

나의 ADHD 이야기

시간을 삽니다


요즘 병원을 열심히 다니고 있다. 우울은 아니고 ADHD가 핵심이다. 2020년 봄쯤, 우울이 많이 나아졌는데도 집중력 문제는 크게 개선되지 않는다는걸 느꼈다. 물론 변화는 있었다. 우울증으로 인한 집중력 저하와 ADHD로 인한 집중력 저하는 설명할 수는 없지만 느낌이 분명히 달랐다.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머릿속 안개는 걷혔는데, 그 안개 뒤에 큰 암벽이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때는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있을 때였고, 우울증이 어느정도 나아져서 병원을 갈 힘이 생긴 덕분에 처음으로 정신과 병원에 가게 됐다. 여러가지 검사를 했다. 우울증은 정상으로 나왔는데 ADHD가 심각한 걸로 나왔다.


결과지를 보면서 상담할 때 의사 선생님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좋은 대학교에 가신게 신기해요. 원래 안될건데 고지능과 엄청난 노력으로 극복하신 거예요."

"네... 제가 좀 노력을... 한건 아니고 수시로 우연히 붙었습니다..."


내가 앞날이 창창한 20대였다면 이런 진단을 듣고 슬프고 미래가 걱정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미 잃을거 다 잃은, 그래서 앞으로 잘될 일만 남은 30대니까 그냥 담담했다. 안심도 됐다. 아, 이제 약을 먹을 수 있겠구나 하고.


나는 어릴 때부터 특정한 것에 집중은 엄청 잘했다. 유치원, 초등학교 때부터 책읽기를 엄청 좋아했는데 그게 나한테는 게임중독같은 거였다. 책 속의 스토리를 암기해서 내 머릿속 세상에서 펼쳐놓을 때 엔돌핀이 나왔다. 그래서 책은 밤새 읽고, 버스에서 읽다가 정거장 놓치고 종점까지 가고, 책가방을 두고 내릴 정도로 미친듯이 읽었다.


대신 관심이 안가는 것들은 절대 할 수 없었다. 물건 잃어버리기, 약속이나 숙제 잊어버리기는 기본이었고 뻔히 해야된다는걸 알고 있는 문제집 풀기도 할 수 없었다. 책 외에는 집중력이 너무 낮고 산만해서 오죽하면 나에게 공부를 가르치던 엄마도 포기를 했을 정도였다. 무서운 방송반 선배들이 밤에 모아놓고 선배들 이름이랑 방송실 암기사항 같은 걸 못외우면 절대 집에 못간다고 위협(?)했을 때도 나는 머리에 하나도 넣을수가 없었다.


수업 시간에는 교실 안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어야 했고 (다행히 우리 학교는 그게 가능했다) 심지어 수업 중에 교실을 벗어나 교정을 걸어다니곤 했다. 나도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모든 시험은 미루고 미루다가 며칠 전에 벼락치기로 준비했고 너무 집중이 안돼서 죽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울면서 했다. 나는 평생동안 꾸준히 뭔가를 배웠던 기억이 없다.


소풍에서 다녀오면 가방 정리하는 것을 잊어버려 가방 주머니 한곳에서 하얗게 썩어버린 귤이 한두달 뒤에 발견되기도 했다. 내 방은 언제나 정리가 안되어 있고 아빠는 '미친년'이라고 할 정도였다. 엄마는 초등학교 어느 시점부터 나에게 방정리를 시키는걸 포기했다. 그냥 눈에 띄면 엄마가 정리를 해준다. 그리고 나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말로 해서 바뀔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걸 받아들이셨는지...


아무튼 그래서 어릴 때 많이 혼나고 위축됐었다. 나는 누가봐도 끈기없는 사람이고 게으른 사람이었다. 나는 능력없고 이상한 사람인 것 같았다. 재능을 낭비하는 사람이고... 의사의 말에 따르면 나는 ADHD를 고지능으로 극복해온 케이스라고 한다. 지능이 높기 때문에 ADHD로 못하는 것들이 크게 티는 나지 않는 케이스. 그런데 비슷한 그룹 안에서는 티가 날 수밖에 없다. 거기다 우울증까지 왔으니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병원에서는 내가 ADHD에 대한 방어기제로 강박을 갖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몰랐는데 강박도 약이 있었다. 강박 약도 추가되었다.) 검사를 했는데 강박이 굉장히 심각한 수준으로 나왔다. 나는 ADHD임에도 고등학교 이후에는 지갑이나 핸드폰, 우산을 잃어버린 적이 두어 정도밖에 없다. 잠시 놓고 온 곳을 몰라 헤맨 적은 있지만 결정적으로 잃어버린 적은 없다. 일을 할 때 숫자 같은 것도 거의(절대) 실수하지 않고 정확하다. 왜냐하면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강박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의 눈과 귀를 믿지 못한다. 보고서의 숫자같은 경우에도 한 20번쯤은 확인해야 마음이 놓인다. 그래도 믿지는 못하는데 결국 어쩔 수 없어서 전송하는 것뿐이다. 핸드폰, 지갑, 우산 같은 경우에도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꼭 확인한다.


그건 아빠와의 관계 때문이기도 한데, 아빠는 완벽주의자이고 내가 물건을 흘리고 다니거나 실수를 하면 미친듯이 화를 냈다. 그걸 막으려고 노력하다보니 ADHD임에도 자기 물건은 참 잘 챙기는 사람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엄청 힘들게 살았던 것 같다. 그동안 익숙해서 의식하지 못했어도... 나는 좀 흘리고 다니고 실수도 자주 해야되는 사람인데 악착같이 완벽을 기하면서 살아왔으니 얼마나 노력하고 힘들었던 걸까. 


ADHD 약은 2020년에 몇달간 먹다가 끊었다. 새로 시작하게 된 일은 굳이 그정도로 강한 집중력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얼마 전 다시 병원에 찾아갔다. 보다 전문성을 요구하는 직장 분위기, 브런치 글쓰기, 대학원(박사과정) 진학 준비, 외국어 공부, 마을활동 두세가지, 우울증 예방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 참여하기, 인간관계 유지하기, 나의 마음 돌보기 등등. 마음도 급하고 내가 해야할 일이 너무 많아졌다.  


지금 직장에 들어오기 전에 이력서를 쓰고 업무기술서를 쓰고 전 직장의 경력증명서를 요청하는 일을 할 때도 맨 정신으로는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전에 먹다 남은 고용량 콘서타를 한알 먹고 작업을 시작했다. 약을 먹자 핸드폰과 웹서핑 중독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비로소 집중이 되었다. 그렇게 간신히 이력서도 쓰고 자기소개서도 쓰고 해서 지원을 했고 이곳에 합격한 것이다. 그때 느꼈다. 약을 다시 먹어야겠다고.


약이 없으면 업무효율 100%의 일상을 살아낼 수가 없다. 우울증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는데 ADHD같은 종류는 잘 안된다. 그리고 거기에 괜히 에너지를 더 쓰고 싶지도 않다. 약이 있으니까 약을 먹으면 된다. 먼길 돌아가면서 에너지 소모하느니 그게 백번 낫다. 우울증은 나의 인생과도 관련이 있지만, 이건 그냥 순수한 뇌의 문제니까.


그래서 요즘은 매일 약을 잘 챙겨먹고 있다. 아침 1번, 점심 1번, 저녁 1번. 강박증과 ADHD 약을 같이 먹고 있다. 그러면 전반적으로 머릿속이 개운하고 즐거운 기분으로 살아낼 수 있다. (단점으로는 약효가 떨어질 때쯤 피로감이 몇배로 밀려온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스물스물 올라오는걸 느끼면 저녁 약 먹을 시간이 다가왔다는걸 알게 된다. 그러면 약을 먹고 잔다. 잠은 깊게 자는 편이다.


추가적인 장점으로는, 약의 특성들이 식욕을 없애준다는 것이 있다. 요즘은 아침은 대충, 점심은 적당히 먹고 저녁은 굶는다. 그랬더니 66 옷이 약간 헐렁해지고 드디어 55 옷이 조금씩 맞고 있다!! 앞단추는 잘 안잠기지만:) 중성지방이 높아져서 건강을 위해 살을 빼야하는데 도저히 뺄 수가 없어서 이렇게 약의 힘을 빌리고 있다. 한동안 습관을 만들어두면 나중에는 약을 끊어도 체중관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다시 요요가 올 수도 있지만...


전에 만난 친한 선생님의 말도 맞다. 굳이 잘하려고 할 필요 없고, ADHD 약을 먹어야 해낼 수 있는 정도의 일은 안해도 된다고. 하지만 그게 잘 안된다. 좀더 느긋해지고 현재를 즐기고 여유롭게 살아가자고 자꾸 마음에 이야기를 하고는 있는데... 뭐랄까... 


할 수만 있다면 열심히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좀더 강하게 올라오는 것 같다. 그리고 어쩐지 당분간은 그 마음을 긍정해주고 싶은 기분이다. 내가 너무 공부를 '안/못'해서 시험에 실패했던 경험이 트라우마처럼 자리잡고 있어서, 이제는 우울증도 낫고 ADHD도 관리하고 있으니 좀더 열심히 해보고 싶은 마음을 긍정해주고 싶은게 아닐까. 그래서 매일 약을 먹으면서 버티고 있는 측면도 있다. 


대신 예전처럼 경쟁에 얽매이거나 성공하지 못하면 나는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혹시 가끔 그런 경쟁심이 들더라도 바로 알아차리고 마음을 아래로 내려보낸다. '우울증으로 누굴 또 죽일 일 있나...'하면서. 그냥 나의 페이스대로 나아가보려고 한다. 천천히, 놓치 않고 뭔가를 매일 하다보면 결국 뭐라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올해 개인적인 목표는 브런치 글 꾸준히 쓰는 것, 컴활 합격하는 것, 그리고 대학원 합격하는 것. 이렇게 3가지가 있다. (운전면허는 주변에서 자꾸 권유받고 있는데 이건 진짜 해도 안될 것 같다...ㅠㅠ) 하도 불합만 했더니 '합격'이라는 글자를 좀 많이 보고싶은 마음이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서 약 먹는 나, 화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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