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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수첩

르네상스인을 꿈꾸는 현대인

by 오렌지나무

겉은 웃고 다녀도 속에는 우울, 불안, 절망의 덩어리가 얹혀있는 요즘이다. 삶의 활력이 너무 없어져서 천장만 바라보다가 문득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떠올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에게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원하게 하라. 정말 훌륭한 말이다. 할 수 있는 것만 원하면 인생만사 고민이 있을리 없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하늘을 날기 위해 비행 기구를 설계하고 실험했던 사람이고 눈알을 해부해서 눈의 기능에 대해 연구했던 사람이다. 그가 현대에 태어났더라면 높은 확률로 그림 따위는 때려치우고 구글 딥마인드에 열렬한 자기소개서를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400년대 이탈리아는 그의 광대한 호기심에 답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할 수 있는 것을 원하게 하라는 그의 말에는 시대적 한계에 대한 답답함도 조금 엿보인다.


그래서 위로라도 받아볼까 해서 한 10년 전 쯤 읽고 내버려두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전기를 다시 집어들었다.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세르주 브람리 지음, 염명순 옮김, 한길아트)'라는 책이다.


르네상스라는 단어가 내 가슴을 설레게 했던 때가 있었다. 나는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메디치 가에 관한 책,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책, 체사레 보르지아의 전기, 미켈란젤로에 관한 책 등 르네상스에 관련된 모든 책들을 교보문고의 선반에서 쓸어오다시피 해서 읽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생업이 없었던 어렸을 때라 순수하고 격렬한 정열로 원하는 지식에 돌진했던 것 같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격에 생의 모든 것을 때려부수고 뒤 한번 안 돌아볼 치열한 충동의 체험'이랄까.


어쨌든 르네상스에 대해 그렇게 몰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나는 대표적인 르네상스인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만은 관심이 없었다. 교육과정과 일반인의 상식 속에서 다 빈치라는 이름은 이미 천재라는 단어의 다른 표현이었고 모나리자는 과자 상자에도 인쇄되어있을 정도였다. 그는 아무도 토를 달 수 없는 위대한 화가로 확고하게 자리잡았기에 진부했고, 그 당시 나는 나만의 생각이 뿌리내릴 수 없는 진부한 토양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십수년 만에 다시 잡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전기는 좀 뜻밖이었다.

그의 작품들을 떠나 레오나르도라는 한 사람에게 다가갔을 때의 느낌이 생경했다.


일단 나는 그가 어떻게 태어나 어떻게 죽었는지에 관한 개략적인 경로조차도 머리에 없었고 그가 미술 이외에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가졌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레오나르도는 생전에 일상을 기록한 방대한 양의 수첩을 남겼다. 그 수첩은 말 그대로 '돼지고기 300g, 대파 한 단 살 것'처럼 필요한 내용을 간략하게 적은 것이라 다 빈치의 인생을 통째로 재구성하기에는 부족하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힘든 날 수첩에 우연히 남긴 한 마디가 우리의 성향과 처지를 대변할 수도 있듯이 레오나르도가 수첩에 남긴 글들은 가끔씩 그의 인생의 단면들을 거울에 비춰낸다. 이 책은 다 빈치의 생애에 관한 다른 기록들(예를 들어 그의 할아버지의 세금 신고서나 그와 동시대에 속한 바사리의 다 빈치 전기 등)과 수첩의 글들을 통해 그의 인생을 엿보려고 한다.

자화상


출생


<다 빈치의 수첩>

"체외 사정을 하며 비열하게 정사를 하는 남자는 신경질적이며 신뢰감 없는 자식을 낳는다. 반면에 이 정사가 두 사람의 큰 사랑과 욕망으로 이루어지면 매우 총명하고 재능이 있으며, 활기 차고 우아한 아이를 낳게 될 것이다."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세르주 브람리 지음, 염명순 옮김, 한길아트, 110쪽-


단순한 연구 주제이거나 다른 가정의 가정사를 빗댄 글일 가능성이 높지만 이 구절이 그의 무의식의 반영이라고 볼 수도 있는 배경이 그에게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 4월 15일, 이탈리아 반도, 안키아노의 한 농가에서 피렌체의 공증인이었던 세르 피에로 다 빈치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카테리나는 그를 낳고 몇년 뒤 어떤 농부와 결혼했으며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어울리는 여성과 결혼했다. 레오나르도는 아버지의 집에서 자랐다. 그러나 어머니와도 인접한 마을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 카타리나가 이복 동생들을 키우며 사는 모습을 보면서 컸을 가능성도 있다. 그의 아버지는 새 부인이 죽자 다시 결혼했는데 그는 훗날 레오나르도가 24세가 되었을 때 드디어 첫 적자를 얻게 된다. 적자는 당시의 관습에 따라 할아버지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말년에 이 적출 동생들과 삼촌의 유산을 두고 다툼을 할 만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세르 피에로 다 빈치가 사망하자 레오나르도는 형제들에 의해 유산 상속에서 배제되었다. 그 후 세르 피에로의 동생이자 레오나르도의 삼촌인 프란체스코가 이를 보상이라도 하듯 죽으면서 유언으로 전 재산을 레오나르도에게 남겼는데 레오나르도의 적출 막내 동생이 이에 대해 반발하여 소송을 벌였다.)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에는 사생아가 흔했다. 그리고 사생아들도 높은 지위를 갖거나 부를 축적하는데 제약이 없었다. 예를 들어 교황 알렉산드로 6세의 사생아였던 체사레 보르지아는 아무 문제없이 추기경이 되었고 나중에는 발렌티노 공작이 되었으며,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사생아였지만 교황의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카테리나 스포르차와 같은 서녀라도 적출 자식들과 똑같이 교육받고 같은 신분의 적자와 결혼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신에게 인정받은 결혼 밖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때로 제약이 있었다. 비슷한 시대에 키프로스의 왕이었던 장은 적자를 두지 못했는데 그는 서출인 맏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출인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왕녀의 남편이 키프로스를 통치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가까웠던 예를 들면, 그는 공증인 조합에 가입할 수 없었다. 공증인 조합원의 자격은 적자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의 직업이었던 공증인을 이복 남동생은 가질 수 있었지만 레오나르도는 원해도 갖기 어려웠던 것이다. 화가 조합에는 그런 제약이 없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자신이 서출이라는 것을 완전히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회적인 한계나 모욕감을 떠나서라도 아버지와 결혼할 신분이 아니었던 어머니, 적출 자식을 원한 아버지, 비록 그가 집을 떠난 후이긴 하지만 그와 비슷한 또래의 계모가 낳은 적출 동생을 생각해보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는 확고한 소속감이 있는 가정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그의 평생의 성격을 형성하는데 부분적으로나마 기여했을지도 모른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가정사가 레오나르도에게 미친 영향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논문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성 안나와 성모자


역량에의 추구


<다 빈치의 수첩>

"내가 학식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어떤 잘난 체하는 무리들은 학식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면서 나를 비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우둔한 무리들이여! 그들은 내가 마치 마리우스가 로마 귀족들에게 한 것처럼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타인의 업적으로 치장한 자들이 내 업적을 부인하려 들다니! 어떤 토론에서 다른 작가들을 내세우는 자들은 자신의 재능이 아닌 기억력을 이용할 따름이다."

-앞의 책, 316쪽-


하지만 사람의 성격은 가정환경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때로는 후천적인 경험과 가치관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특히 역동적인 정신으로 충만한 시대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의 정신에 골고루 햇살을 비춘다. 다 빈치가 살았던 시대가 그러했다.


레오나르도의 성격을 형성한 수많은 요소들에서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 당시의 일종의 시대정신이다. 신과 도덕에서 벗어나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기 시작했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인들은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활용해 만들어내는 모든 업적에도 관대했다. 그 업적에는 조각과 회화도 있고 훌륭한 정치적 기교도 있었지만 동시에 침략이나 찬탈도 있었다.


흔히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정신은 역량(virtu)에 있다고 한다. 마키아벨리도 '군주론'에서 운명(fortuna)과 역량(virtu)에 관한 이야기를 한 바 있다. 르네상스인들은 인간들과 사건들이 엮어내는 행운 내지는 불운의 존재를 긍정했다. 다만 이에 대한 대응은 중세처럼 신에게 기도하며 스스로를 신의 처분에 맡기는 것은 아니었다. 한때 로마인들이었던 이탈리아인들은 인간의 역량으로 이에 맞섰다. 'virtu'는 미덕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능력을 지칭하는 개념에 더 가깝다. 인간의 용기, 노력, 의지, 대담함, 불굴, 명석함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인간은 이 역량으로 자신의 운명을 감당하고 운명의 여신을 정복한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한다. '운명의 여신은 언제나 젊은이들에게 이끌린다. 젊은이들은 덜 신중하고, 보다 공격적이며, 운명의 여신을 더욱 대담하게 다루기 때문이다.'라고.


인간의 이러한 역량들이 최대한도로 발휘되는 것 자체가 아름다움이며 존경할 만한 일이었고, 역량은 어떤 면에서는 도덕을 넘어선 곳에 있었다. 그랬기에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동생을 암살하는 등 많은 도덕적 결함을 보였던 체사레 보르지아의 군사적, 정치적 역량에 감탄했고 그에게서 영감을 받아 오늘날 마키아벨리즘이라고 비판받는 그의 '군주론'을 완성했던 것이다.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자신의 역량을 펼치기 위해 그런 체사레 보르지아의 건축 기술 총감독이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토록 인간의 역량이 중시되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레오나르도는 역량에 관하여 자유로운 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위의 수첩 속의 말이라고 생각한다.


마리우스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평민 출신의 군인이었고 후에 집정관을 연임한 평민들의 영웅이었다. 그는 10만명에 이르는 게르만 족의 침략으로부터 로마를 지켜내는 등의 군사적 업적을 쌓았지만 학식이 부족했고 로마 귀족들에게 '촌뜨기'라는 경멸을 받기도 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를 인용하여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돌려주고 있다. 하지만 그는 마리우스와는 다른 면이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학식이 없더라도 업적이 있으니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다.


실제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동시대의 미켈란젤로와 달리 정규 교육과정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우지는 못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가 40대 이후에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 빈치가 업적을 이룬 후 학식을 보충하기 위해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 빈치는 평생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많은 것들에 매진했고 항상 시간이 부족했다. 그는 화가는 완벽한 그림을 위해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건축, 도시 설계, 해부, 태양열을 이용하기 위한 포물면경, 중력, 공기, 기하학, 수학, 식물학, 후두, 폐, 운하건설을 통한 수력 에너지 활용, 비행, 수중 공격을 위한 장치, 잠수복, 직조기계, 망원경, 굴절, 광학, 렌즈, 압착기, 분수, 대포, 전차, 외호에서 물을 빼기 위한 기중기 등 수많은 분야에 몰두했다. 그는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와 체사레 보르지아를 위해 기술자로서 일했지만 이러한 발명들은 그들이 요구해서가 아니라 다 빈치가 스스로 원해서 열중한 것들이다. 그들은 다만 그에게 재료를 제공하고 월급을 지불하고 그의 업적을 잘 활용해주는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우스갯소리이지만 자기를 기르는 인간들이 자기에게 봉사하는 자들이라고 여긴다는 고양이의 정신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런 그가 단순히 겉으로 보이기 위한 학식을 위해 라틴어를 배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 빈치가 시간을 쏟은 것은 라틴어가 필요해서였다. 그의 역량을 위해. 다 빈치가 수첩에 쓴 저 말은 학식에 대한 컴플렉스를 숨기거나 스스로를 변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다 빈치는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스스로의 업적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역량의 결과물만을 모방하는 자들에 대한 경멸을 표시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흉내낼 뿐이라는 점에서 르네상스인의 기준에서 볼 때 다 빈치를 비판할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다 빈치는 라틴어가 자신의 역량을 계발하는데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때는 배우지 않았다. 역량과 관련이 없는 단순한 학식은 그에게 삶의 귀중한 시간을 할애할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라틴어가 역량에 포함된 순간 라틴어도 다 빈치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다 빈치의 수첩에는 그가 30대 후반부터 어휘들을 수집한 흔적이 남아있다. 어쩌면 라틴어도 그의 어휘에 관한 연구에 포함되었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이 책에서 라틴어가 그에게 고대 과학을 직접 연구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역량의 결과라고 할 수 없는 모방을 경멸한 것은 수첩의 다른 글에서도 드러난다.

<다 빈치의 수첩>

"어느 누구도 타인의 방식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그는 자연의 아들이 아니라 자연의 손자라고 불릴 것이다. 자연의 형태는 풍부하기 때문에, 자연에서 배웠던 스승들에게 배우느니 차라리 자연에게서 직접 도움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앞의 책, 317쪽-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속했던 시대의 미술도 비슷했다. 그 당시 이탈리아의 미술은 중세의 상징과 기호, 관념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감정과 모습을 담아내는 방향으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 모두 인간의 육체와 근육, 움직임을 정확히 묘사하기 위해 당시에는 금지되었던 해부에 도전했고 그 결과가 그들의 그림과 조각에 그대로 담겼다. 기법에 있어서도 기존의 템페라화나 프레스코화에 비해 입체감을 살려 생동감을 불어넣을 수 있는 유화 기법(네덜란드의 얀 반 에이크-'아르놀피니의 결혼식'을 그린 화가-가 발명한 유화 기법을 제대로 받아들인 곳 중 하나가 다 빈치가 속했던 베로키오의 공방이었다.)이 발달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대표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는 그들의 역량의 최대한에서 이러한 발전을 이끌어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에는 터키의 화가가 인간과 사물의 모습을 실제에 가깝게 묘사하는 기법의 발전을 이루어내지 못한 터키의 현실에 좌절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 소설이 서양화를 칭송하는 맥락은 아니지만, 그와 별개로 이러한 기법의 발전이 당시 사람들에게 주었을 신선함과 충격을 이해할 수는 있다.)


변화는 성모자의 모습에서 가장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성모자를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에는 광배와 성스러움의 표상보다는 인간과 똑같은 모습의 예수가 등장한다. 아기 예수들에게는 젖살이 붙기 시작했고 십자가 형 직후의 예수들에게는 고통으로 뒤틀린 근육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모의 내적 갈등과 괴로움도 이야기의 중심으로 들어온다. 다 빈치의 작품인 '성 안나와 성모자'의 밑그림에서는 성 요한이 아기 예수와 놀고 있었지만 다 빈치는 이를 바꾸어 성 요한을 희생을 상징하는 양으로 대체한다. 성모는 양이 상징하는 희생의 운명으로부터 예수를 떼어놓으려고 손을 뻗는다. 그러나 성 안나는 인류의 죄를 대속해야 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녀를 만류하듯 품 안에 두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역시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구도였다. 성모가 예수를 내려다보고 예수는 관람객들로부터 얼굴을 돌린 채 성모의 품 안에 누워있는 모습은 성모의 감정에 보다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아들이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잉태를 받아들였고 다시 부활할 것을 알면서도 현재 아들이 겪는 고통에 괴로워하는 성모의 감정에. 그것은 인간의 감정이다. 그들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관객들의 마음에서 신성함을 끌어올리는 길을 추구했다. 그리고 그것은 모방이 아니었다. 인간을 통해 신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길이었다.


성 히에로니무스


미완과 절망


<다 빈치의 수첩>

"말하렴, 결코 아무것도 완성된 게 없는지. 말하렴..."
"말하렴, 내가 결코 한 게 있는지..."
"말하렴, 결코..."

-앞의 책, 612쪽-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수첩에 시필할 때 "말하렴"이라는 단어를 자주 썼다고 한다. 그는 도처에서 위와 같은 문구들을 썼다. 간단한 시필용 문장에 불과하지만 이 안에는 그의 좌절이 담겨있는지도 모른다.


위에서 다 빈치의 관심분야에 대해 언급했지만 그가 그 전부에 능통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미술과 그밖의 분야에서 많은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그만큼의 실패도 겪었다. 그의 호기심이 그를 몰아간 모든 곳에서 완벽한 성취를 이룰 수는 없었다. 비행 기구에 있어서도 "다 빈치는 시도했으나 헛일이었다(Vincius tentavit et frustra)." 지롤라모 카르다노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하던 일을 완전히 끝마칠 수 없는 점이었다. 그는 여러 해에 걸쳐 '성 안나와 성모자'를 작업했지만 미완으로 남았고 '성 히에로니무스'와 '동방박사의 경배', '안기아리 전투', '이사벨라 데스테의 초상'도 마찬가지였다. '안기아리 전투'를 그에게 의뢰하고 보수의 일부를 지급했던 피렌체 공화국은 그가 밀라노로 떠나버리자 그의 새로운 후원자인 쇼몽 백작 샤를 당부아즈에게 다 빈치의 처신이 옳지 않다고 항의하기도 했다. 만토바 후작부인인 이사벨라 역시 자신의 초상화를 완성해줄 것을 레오나르도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부탁하기도 하고 피렌체의 신부에게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신부는 이렇게 답장을 보내왔다.

"레오나르도의 생활은 아주 불안정하고 불확실해서 그는 그날 그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 신부는 그 후 다른 서신에서는 레오나르도가 현재 심취해있는 수학 연구 때문에 붓을 잡는 일에 진력이 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레오나르도가 한때 열광했던 밀라노의 청동 말 조각상 작업은 주조 방식을 고민하던 중 전쟁 때문에 작업에 쓰일 청동이 페라라 공국으로 보내져 완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것은 그 일을 더이상 하고 싶지 않아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창작의 열망에 불타오르고 있을 때는 기꺼이 자신의 생각에 현실의 힘을 불어넣어주지만, 어느 정도 형상화되어 자립할 수 있는 순간이 되면 자신을 필요로 하는 또 다른 생각에게 자신을 내어준 것이 아닌지. 수학에 열중하느라 그림 그리기에 진력이 나 있다는 신부의 서신 내용에서도 레오나르도의 이런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미켈란젤로는 '모든 돌 덩어리는 그 안에 조각상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조각가의 과업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미켈란젤로는 그 조각상을 '발견'한 후에는 또 다른 조각상을 차가운 대리석 무덤으로부터 구해주러 달려가곤 했다. 레오나르도도 그와 마찬가지로 구출의 순간까지는 미친듯이 열중하다가 그 발견이 끝났다고 판단되면 주저없이 다른 수인들을 찾아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충돌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이것으로 다 빈치에게 모욕을 준 적이 있다.

"당신이 설명하시오. 당신은 기마상을 모형으로만 제작했지 청동으로 주조할 능력도 못 되었잖소. 그러고는 창피해서 포기한 당신이 하란 말이오."

그 이전에 다 빈치가 미켈란젤로를 모욕할 의도는 아니었지만, 조각보다 회화가 우월하다고 다른 자리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 미켈란젤로가 이를 전해듣고 화가 난 것이 이 모욕의 배경일 수도 있다. 두 사람은 같은 피렌체인이었고 서로를 예술가로서 존경했으면서도 다른 점이 있었다. 예를 들어 미켈란젤로는 외모에 컴플렉스가 있었고 옷차림에 관심이 없었던 반면 레오나르도는 잘생겼고 몸 치장을 잘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미켈란젤로는 미술과 문학에 주로 집중했던 반면 레오나르도는 다종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도 차이점이다.


레오나르도는 모욕과 절망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다 빈치의 수첩>

"옷이 추위를 막아주듯 인내심은 모욕을 막아준다. 추위가 심해질수록 옷을 더 많이 껴입으면 추위를 이길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심한 모욕을 접할 때에는 더 많은 인내심을 가져라. 그러면 그 모욕이 정신까지는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앞의 책, 612쪽-
<다 빈치의 수첩>

"절망한 사람에게 칼을 주어라. 그리고 손으로 옷을 졸라매게 하라.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상처를 할퀴게 하라."

-앞의 책, 308쪽-
<다 빈치의 수첩>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고개를 수그린 채 커다란 아가리 속에서 헤엄치는 것 같고, 또 죽어서 알아볼 수 없게 변한 나는 거대한 뱃속에 파묻혀 있는 느낌이 든다."

-앞의 책, 597쪽-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자신의 모든 작품들이 완성본이라고 평가했을 수도 있다. 그 이상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코가 낮은 것, 쌍커풀이 한쪽만 있는 얼굴이 결코 미완은 아닌 것처럼. 아니면 작품들을 완성시키고 싶었는데도 다른 관심사로 달려가버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성향을 미워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르네상스인의 기준에서 바라본다면 작품의 미완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의 작품에 착수해서 얼마나 자신의 역량껏 생각을 실현시켰는지,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가슴 속의 불을 다 태워버렸는지가 중요하고, 업적은 결국 사람을 통과하여 역사에 부산물로 침잠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남는 것은 인간의 역량과 경험과 그 모든 것을 거쳐온 인간 자신이다. 그 기준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르네상스인으로서 완벽한 삶을 살았다.


그로테스크한 다섯 사람의 얼굴 습작


현대인에게 르네상스인이란

<다 빈치의 수첩>

"대기를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푸른빛은 하늘 고유의 색이 아니라 미세하게 흩어져 있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미립자로 이루어진 더운 습기에서 나오는 색으로, 이것이 햇빛에 부딪히면 뚜껑처럼 덮어쓰고 있는 거대한 암흑 상태의 어둠 아래에서 빛나게 된다..."

-앞의 책, 483쪽-


불완전한 지식이기는 하지만 마치 대기에 관한 현대의 교과서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무의 상태에서 오로지 관찰과 실험, 독서와 추론으로 사물들에게 다가갔다. 그의 통찰력은 현실적으로 유용한 기계로 나타나기도 했고 수첩 속에서 살아남아 현대인들을 감탄하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 분야를 전공으로 선택하지 않은 현대인의 수첩에서는 먼 훗날 누구도 발견하지 못할 내용이기도 하다. 현대에서 르네상스인은 그다지 권장되지 않는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르네상스인이란 단어는 다재다능한 사람, 다양한 분야에 능통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르네상스인의 개념은 '인간은 자신이 하고자 한다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는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이자 인간의 역량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하지만 르네상스인이었다고 일컬어지는 알베르티나 다 빈치같은 사람들이 천재였기 때문에 종종 잊혀지는 사실이지만 르네상스인은 결코 다재다능이나 능통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르네상스인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삶의 방식일 뿐 재능과는 관련이 없다.


인간이 가진 무한한 호기심이 인간을 이끌어 거대한 바다에 던져넣고 인간의 역량이 그 속에서 자라나 헤엄치는 법을 배워 모래사장으로 살아나오는 것, 그리고 더 넓은 시야를 제공해줄 다른 바다로 달려가는 것, 그 과정에서 스스로에게 완전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 그게 르네상스인의 삶의 방식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천재였지만 그가 천재라서 가슴을 뛰게 하는 일들을 쫓아가는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다 빈치를 태웠던 불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평범한 불꽃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모든 분야에 도전해도 대체로 성공할 수 있는 천재가 아니라면 자기가 할 수 있는 좁은 범위의 일들만 해야 한다는 생각, 하나라도 잘하게 된 다음에 다른 일에 도전하라는 생각이 사람들의 불꽃을 꺼트린다.


현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다. 오늘날 우리는 전문 분야의 시대에 살고 있다. 개인의 능력으로는 자기 전공이 아닌 다른 전문 분야의 최신 논의를 따라잡을만큼 공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전공의 장벽도 높아서 문외한이 함부로 그 전공이 다루는 주제들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가는 악타이온의 운명을 맞게 될 수도 있다. 본질적으로 장벽이 없다고 혹은 없어야 한다고 볼 여지가 있는 예술에서조차 사람들은 위축된다. 어릴 때는 누구나 크레파스를 쥐고 거침없이 그림을 그렸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부터는 서툰 그림을 부끄러워하고 그리는 일 자체를 어려워하게 되어버린다.


하지만 이러한 장벽들은 인터넷과 함께 이미 실금이 생기기 시작했고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는 완전히 무너져버릴지도 모른다. 그 모든 장벽을 뛰어넘어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전문성에 이를 수 있는 알파고와 같은 인공지능때문이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 당시 많은 사람들은 허탈감을 느꼈다. 우리가 수십년에 걸쳐 습득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지식들과 그 과정에서 생기는 창의성을 알파고는 단 몇 분만에 배울 수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미래에 인공지능에게 어떤 전공의 최신 논의에 대한 요약을 해줄 것과 심지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말로 풀어줄 것까지 요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터넷의 컨텐츠만으로도 유사 전문가가 될 수 있다면 전 세계의 책과 논문 등의 컨텐츠,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사고 회로를 습득한 인공지능을 통해서는 무엇이 될 수 있을지.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기계가 우리를 육체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주었고 앞으로도 해방시켜줄 것으로 기대되듯이 인공지능은 우리를 어떤 분야에 능통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해방시켜주지 않을까 하는. 지금까지는 인간이 전문성을 획득하는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었고 그러한 전문성이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는데 반드시 필요했다. 인간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댈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지능뿐이었기에 인간이 그 막중한 책임을 지고 한 분야에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그 역할을 대신해준다면 인간은 다양한 분야로 나아갈 수 있는, 뜻밖의 자유를 얻게 될 지도 모른다.


기술이 인간의 능력을 앞질러서 나아간다고 하더라도 기계가 인간을 파멸시키지 않는 한 인간에게는 인간이 중심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보다 나은 기계를 활용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인간에게는 생명과 역량과 삶에 대한 열정이 있으니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보여주는 르네상스인의 삶의 방식이 한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세례자 요한


종말


<다 빈치의 수첩>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다주듯이, 잘 이용한 삶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다준다."

-앞의 책, 710쪽-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프랑스에서 말년을 보냈다. 그는 프랑수아 1세의 수석 화가이자 기술자이며 건축가였다. 왕은 그를 자신의 어머니 소유인 클루의 저택에 자리잡게 했는데 앙부아즈 성과 이어진 지하 통로를 통해 자주 그를 방문했다고 한다.


다 빈치는 팔이 마비되는 등 신체의 노화와 질병을 겪었지만 끝까지 쓸모있기를 원했고 기력을 유지하려 했다.

그는 죽기 1년 전쯤, 수첩에 이런 글을 남긴다. "나는 계속하리라."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519년 5월 2일에 긴 여정을 끝내고 완성되었다.





*글 중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관련된 사실들은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세르주 브람리 지음, 염명순 옮김, 한길아트, 1998]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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