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또 오해영: 삶이 두려울 때

인생이 완벽해야 한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by 오렌지나무


삶은 정말 놀랍다. 사는 게 축복이고 즐거움이라고 하면서도 때로는 한 발 내딛기가 이렇게 두려우니 말이다. 오늘 브런치에서 본 글에서 어떤 분이 이렇게 쓰셨다. 내가 잘 몰랐을 뿐 기회는 매순간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고.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그래서 삶이 싫어질 때가 있다. 기회가 매순간 다가오고 있었고 내가 몰라서, 내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서 그 기회를 놓친 거라면 결국 잘못한 것은 누구일까? 나 자신이다. 나를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려 이런 아픔 속에서 신음하게 만든 것은 결국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자책감 속에 숨도 쉬지 못할만큼 파묻혀버릴 때는 삶이 참 아프고 두렵다는 생각만 든다.


'또 오해영'을 몰아보다가 이 대목에서 문득 멈추게 되었다. 박도경의 주치의가 신기 있어보이는 자기 선배(우현 분)에게 박도경을 데려간 장면이었다. 선배는 박도경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죽는 순간 득도한다는 말 들어봤나? 모든 사람은 죽는 순간 분명히 알게 돼. 두려울 건 아무 것도 없었다는 거. 인간의 감정은 딱 두 가지로 수렴돼. 두려움 아니면 사랑. 하나는 가짜 하나는 진짜. 자네는 진짜를 알아버렸고 그래서 사랑으로 아낌없이 돌아섰을 때 상황은 바뀌었던 거고. 그런데 왜 주춤해? 두려움으로 상대해서는 시나리오는 안 변해. 마음 편히 먹고 끝까지 가봐."


이 대사를 듣는 순간 그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죽는 순간 나는 알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나에게 휘몰아치고 있는 이 순간의 어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 두려움은 내가 삶을 살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가짜일 뿐이라는 것을.


사랑이라는 말을 살아간다는 말로 바꾸어보면, 재미있는 관점에서 박도경의 말을 음미할 수 있다. 죽는 순간 이 타이밍을 되돌아본다면. 아낌없이 살자. 그리고 선배(우현 분)의 말은 이렇게 치환될 수 있다. 삶으로 아낌없이 돌아섰을 때 상황은 바뀌었던 거고. 그런데 왜 주춤해? 두려움으로 상대해서는 시나리오는 바뀌지 않아.


아낌없이 살고 싶은 마음을 잡아채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이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망할 거야 라는 두려움, 반대로 내가 이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끝장날거야 라는 두려움, 혹은 이미 늦은 일일지도 몰라 라는 두려움.

그런 두려움들이 내 머리 위를 스쳐지나가기 시작하면 나는 한없이 작아지고 초라해진다. 그리고 이미 인생을 망쳐버린 사람의 회색빛 시선으로 내 삶을 관조하게 된다. 죽음을 단지 연기할 뿐인 삶이 그곳에 있다.


삶에 대한 두려움이 거짓이라면, 내게 이 두려움을 주입시킨 것은 누구일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죄송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첫 수업 시간에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 그 뒤의 단추들도 다 잘못 끼워지게 돼. 그래서 첫 단추가 중요한거야."라고.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고 교육받고 간 학교에서 처음 들은 그 말은 내 머릿속에 꽉 박혔다. 다음해 2학년 교실에서도 다른 선생님이 같은 말씀을 하셨다. 지난 1년간 숙제 게을리하기, 불량식품 사먹기 따위의 자잘한 죄를 지었던 나는 그때 벌써 내 인생은 첫 단추를 잘못 끼웠으니 앞날이 큰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이게 조금도 우습지 않다. 왜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인생이 잭슨 폴록의 작품같은 거라고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내 캔버스를 채우는 물감들은 내가 의도하지 않은 문양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캔버스 위에 내가 실수로 물감을 쏟아버리는 날도 종종 있다고. 심지어 남도 내 캔버스를 멍청한 물감 투척으로 망쳐놓을 있다고. 그래도 그 캔버스 자체가 나의 예술작품이라고. 그 캔버스의 아름다움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뿐이고 어느 누구도, 세상의 그 어떤 기준도 아니라고. 왜 그런 것들은 가르쳐주지 않았던 걸까. 첫 단추에 관한 비유는 언제나 나를 숨막히게 만든다. 그 기준에서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는 거니까.


어른들은 우리에게 삶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줌으로써 우리가 좀 더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에 대한 두려움은 삶에 대한 경박함만큼이나 삶의 본질에서 멀리 떨어져있다.


인간의 삶에는 하나의 특징이 있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다. 평균 수명이 80세 위로 훌쩍 뛰어올라버린 뒤에는 자주 잊어버리게 되는 일이지만, 사람은 죽는다. 흔히 사람들은 이 죽음에서 인생에 대한 과도한 의미를 이끌어낸다. 단 한번뿐인 인생이기 때문에 우리는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거나 나에게 주어진 인생을 완벽하게 살아내야만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나에게 주어진 것이기에 인생이 소중한 것은 맞다. 삶은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의 기회이다. 그리고 이 기회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모든 생명들이 추구하는 근본적인 목표이다. 그런데 이건 의무는 아니다. 소중하기 때문에 열심히 사는 것과 내가 최선을 다할 의무를 진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또한 이건 완벽해야 할 당위도 없다. 인생이 완벽하고 완전한 것이어야 한다는 설명서가 인생에 붙어있었던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종종 그 두 가지가 인생에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인생에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다면, 인생이 완벽해야 하는 것이 당위라면 우리의 삶은 두려움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 어느 누구도 매순간 최선을 다할 수 없고, 그 누구의 인생도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의 끝에는 나의 인생은 이미 실패했다는 또 하나의 망상과 그렇게 만든 것은 나 자신이라는 미친 자책감이 있다. 그렇게 사람들은 우울증의 수렁 속에 빠져 점점 더 죽음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 두려움은 가짜, 허상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죽음이 두렵기에 삶에 집착하고, 삶에 집착하여 내 몸과 내 생활과 내 지위와 내게 다가오는 사물들에 집착하다보면 마치 그것들을 움켜쥐는 것이 이 삶을 내게 붙들어두고, 그럼으로써 죽음으로부터 멀어지는 방법이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 그것이 마치 진짜 삶의 본질인 것처럼 여기게 된다.


하지만 박도경은 죽음의 순간에 맞닥뜨렸기에, 차에 치여 죽음을 기다리는 그 순간에 인생을 돌이켜보았기에 그 허상들로부터 해방되어 비로소 진짜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래서 오해영을 생각하고 왜 더 마음껏 주지 못했나 하는 아쉬운 감정을 강렬하게 느꼈던 것이다. 삶도 그렇다. 만일 우리가 내일 죽게 된다면, 그 순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왜 더 마음껏 살지 못했나 하고.


삶에 대한 두려움의 문화는 가고,

삶이라는 놀이터에서 마음껏 놀고 경험해보려고 하는 문화가 왔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말.

지난주 방송된 '또 오해영'에서 어린 박도경이 '백일몽'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혹시 이 노래가 비극적인 결말의 암시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솔솔 나오고 있다. 하지만 백일몽은 삶에 집착하려는 사람에게는 비극이지만을 즐기려는 사람에게는 비극이 아니다. 인생 자체가, 박도경이 오해영을 아낌없이 사랑하려고 돌아선 마음 그 자체가 백일몽이다. 만일 백일몽을 그런 모티브로 쓴다면 우현 아저씨에게 저런 멋진 대사를 준 작가님에게 실망할 것 같은데...






keyword
작가의 이전글브렉시트: 다수결은 항상 옳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