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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사랑해야만 한다.

by 오렌지나무
사랑해야만 한다.

로맹 가리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의 맨 마지막 문장이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되는 일에 대해 '해야만 한다'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는다. 해야만 하는 일은 때로 하지 못할 가능성도 높은 일, 하기 힘든 일, 더 나아가 하기 싫어서 동기 부여가 필요한 일을 의미한다.


'자기 앞의 생'의 마지막 문장은 인생을 사랑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인생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이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며 인간이 하기 힘들고 하기 싫은 일일 수 있다는 전제에서 한 말이다.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로맹 가리에게 인생은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10살짜리 모모가 만나는 인생도 그렇다.


모모는 프랑스 벨빌의 엘리베이터 없는 7층 건물에 살고 있다. 이곳에서 모모와 여러 아이들을 돌봐주고 있는 사람은 로자 아줌마이다. 유대인인 로자 아줌마는 창녀였고 은퇴한 이후에는 창녀들이 맡긴 아이들을 대신 키워주는 일을 하고 있다. 69세의 로자 아줌마는 95킬로그램이고 뇌에 혈액공급이 원활하게 되지 않아 이따금 정신착란을 겪는다. 그녀는 비대한 몸으로 엘리베이터도 없는 7층 건물을 내려갈 수 없어서 방 안에서 죽을 날을 기다린다. 로자 아줌마가 죽으면 부모가 없는 모모는 빈민구제소에 보내지게 된다. 그래서 모모는 빈민구제소에 가지 않으려고 자신을 입양해줄 가정을 찾아 돌아다니거나 '엉덩이로 먹고사는' 직업을 찾거나 해야 하는 상황이다.


모모는 사랑과 보살핌에 목말라 있다. 모모는 엄마가 자신을 찾아오게 하려고 일부러 위경련과 발작을 일으키고 아무 곳에나 똥을 싸며 가게에서 물건을 훔친다. 모모가 여섯 살 때 관심을 끌기 위해 가게에서 계란을 훔쳤는데 가게 여주인은 그것을 알면서도 모모를 혼내지 않았다. 오히려 모모에게 계란을 하나 더 주고 뽀뽀를 해주었다. 모모는 그날 아침나절 내내 계란을 손에 쥔 채 그 가게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모는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몰랐지만 그건 아마 가게 여주인이 다시 한번 자신을 쓰다듬어주고 뽀뽀를 해주는 것이었을 것이다. 마치 엄마처럼. 하지만 그런 일을 벌여도 엄마는 오지 않았고 모모는 거실에 똥을 싸는 일을 그만둔다.


엄마를 오게 하는 일에 실패한 후 모모는 엄마 대신 자신을 사랑해줄 것들을 찾는다. 그는 새끼를 돌보는 암사자의 이야기를 듣고나서 어미 사자가 자기와 다른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침대 속으로 들어와 얼굴을 핥아주는 상상을 하고, 망가진 우산대를 사람 모양으로 휘게 만든 다음 양복을 입히고 모자를 씌워서 침대에서 같이 자기도 한다.


로자 아줌마가 모모를 잘 키워줬고 모모도 로자 아줌마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둘 사이에는 누군가가 모모의 양육비로 보내오는 송금 수표가 있기 때문에 모모는 로자 아줌마가 돈 때문에 자기를 돌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책에서 어느날 모모 앞으로 오던 송금 수표가 끊겨버리는데 모모의 걱정과 달리 그 후에도 로자 아줌마의 태도는 변한 것이 없었다. 더 나아가 로자 아줌마가 실제로는 모모를 굉장히 사랑했다는 것이 모모의 아버지가 로자 아줌마를 찾아오면서 드러난다. 모모의 아버지는 여러 창녀를 둔 뚜쟁이였는데 그 중 한 창녀와 결혼을 해서 모모를 낳았다. 그런데 모모의 어머니가 계속 몸을 파는 일을 하자 질투가 난 모모의 아버지는 모모의 어머니를 살해하고 정신병원에 갇혔다. 로자 아줌마는 그 일이 있기 전에 모모를 맡아 길렀는데 모모가 성인이 되어 자기를 떠나버릴까봐 두려워 모모의 나이를 실제보다 4살이나 어리게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로자 아줌마와 모모의 사랑은 그들의 인생이 엉망이기에 인생에게 배신당한 채 난파선에 매달린 사람들 사이의 우정에 가깝다. 모모는 송금 수표가 끊기고 나서 입양 가정을 찾아보려고 하던 때 영화 녹음일을 하는 한 아름다운 여자, 나딘을 만나게 된다. 그녀의 남편은 의사이고 그녀에게는 아이들도 있다. 백화점에서 어릿광대 놀이를 구경하고 있을 때 그 여자가 말을 걸자 모모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간다. 하지만 그녀의 집에는 아이들이 있고 모모는 정상적인 가정과 자신 사이의 벽을 느낀다.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을 만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집으로 돌아오던 모모는 이렇게 말한다.


인생이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것이 아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디에서도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오로지 로자 아줌마 옆에 앉아있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녀와 나는 적어도 같은, 똥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모모가 하도 담담하게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는 바람에 그 속에 담긴 모모의 고통을 처음 몇 번 동안에는 잘 느끼지 못했다. 로자 아줌마와 모모의 사랑은 아름다웠지만 그 밑에는 인생의 심연이 놓여있는데도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어머니는 창녀이고 아버지는 창녀인 어머니를 살해한 유흥업소 관리자이고 이따금 정신이 나가는 가난하고 늙은 창녀에게서 여러 아이들과 함께 자란 10살짜리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어떤 감정일까. 자신을 입양할 가능성이 있는 예비 양부모들이 자신이 정신병이나 성병균이나 기타 유전적 질환을 가진 게 아닌지 탐색한다는 걸 아는 그 아이의 눈에 인생은 어떤 것으로 보일까.


모모가 보는 자신과 자기 주위 사람들의 인생은 진흙탕이다.


로자 아줌마도 한때 어리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녀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나치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고 간신히 살아남아 창녀가 되어 먹고 살았다. 로자 아줌마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초인종 소리이다. 그녀는 독일 사람들이 자기를 잡으러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면서 평생을 살았다. 그녀가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눈 앞에 히틀러 사진을 놓아주면 정신을 번쩍 차릴 정도이다. 그리고 그녀는 암에 걸려 병원에서 죽지도 못하고 식물처럼 살아가는 것도 두려워한다. 그녀는 핏줄이 좁아져서 뇌에 피와 산소가 공급되지 않는 상태가 되는데 그게 암이 아니라는 것이 그녀가 인생에서 거둔 유일한 승리이다.


로자 아줌마가 열다섯 살 때에는 아름다운 다갈색 머리에 마치 그녀 앞에는 좋은 일만 가득하리라는 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열다섯 살 때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를 비교해보면 나는 속상해 배가 다 아팠다. 인생이 그녀를 속인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래서 모모는 나딘의 녹음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넋이 나가버린다. 나딘의 녹음실에서는 영화를 되감기하고 또 되감기하면서 영화 주인공들의 음성을 녹음하는 작업을 하는데, 모모는 그게 신기하고 감동적이었다. 모모는 생각한다. 만일 로자 아줌마의 인생도 되감기가 된다면. 그래서 로자 아줌마도 다시 아름다워지고 슬프지 않은 인생을 살 수 있다면...


모모의 장래희망은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경찰관과 뚜쟁이가 되는 것이다. 젊은 창녀들은 뚜쟁이가 있지만 늙은 창녀들은 뚜쟁이가 없으니까 모모는 늙고 못생기고 아무 소용도 없게 된 늙은 창녀들을 골라서 돌봐주는 뚜쟁이가 되고 싶어 한다. 그렇게 되면 다시는 늙은 창녀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7층 방에 내버려져 울고 있게 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한편 모모는 사람들이 결혼을 하면 서로 괴로움을 나누어 가지고 사랑을 만들 수 있게 된다는 말을 듣고 85세의 하밀 할아버지와 로자 아줌마를 결혼시킬 계획도 세운다. 모모는 두 사람 모두 사랑이 필요한 외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하밀 할아버지는 자신은 결혼을 하기에는 너무 늙었으며 결혼을 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며 거절한다. 하밀 할아버지의 말은 틀리지 않다. 하밀 할아버지는 혼자서는 화장실도 갈 수 없을 만큼 쇠약한 노인이기 때문이다. 그 상황에서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모는 무섭게도 살 날이 많이 남은 어린아이였다. 그는 인생을 어떻게든 살만하게 만들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모모는 마약을 통해 행복을 찾는 마우트의 방식은 거부한다. 모모는 있는 그대로의 인생에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가 행복한 때라면 상상 속에서 어미 사자를 만나거나 녹음실에서 영화의 되감기 장면을 보는 것뿐이다. 행복에 배신당한 경험이 더 많은 모모는 행복이란 감미로운 오물덩어리이고 횡포한 것이라고 말한다.


행복에 관한 모모의 관점, 사실 이 부분에서는 모모보다는 작가의 관점이라는 생각이 더 드는데, 이 관점에는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행복이란 삶에서 얻어지는 결과물일 수는 있다. 그런데 행복 자체를 추구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만큼 삶의 고통과 삶 자체를 외면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바라는 행복이란 고통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돈을 많이 벌어서 돈에 쪼들리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 건강해서 아플 때의 고통을 겪지 않는 것, 아름다워져서 못생겼을 때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 높은 지위에 올라서 갑질당할 때의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는 것 등등. 하지만 그 일들이 다 이루어지는 것은, 행복의 연속들로 구성된 인생은 삶이 아니다. 거기에는 인간이 필요하지 않다. 눈부시게 아름답고 영원한 생명을 갖고 늙지 않으며 위대해서 전 세계를 지배하고 갖지 못한 게 없는 존재. 그 존재는 그러한 속성들만으로 충분히 기술될 수 있다. 구체적인 인간이 나타나고 삶이 생겨나는 건 그러한 속성들에 균열이 생기고 부족한 부분들이 퍼져나갈 때이다. 부족한 것이나 고통이 생겨야 비로소 그 고통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는 자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행복과 고통이 공존하는 삶 자체가 아닌 단지 행복만에 대한 추구는 삶을 대하는 태도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 극단적인 예로는 삶은 없어도 되지만 행복은 있어야 된다는 마약중독자들의 태도를 들 수 있을까.


모모는 행복만 추구할 때의 행복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는 백화점에서 기계로 만들어진 서커스단 공연을 보면서 행복감에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행복은 현실에 없는 것이고 삶이 없는 것이다.

그 구경을 하는 중에 제일 좋은 점은 그것들이 모두 기계로 조작된다는 것과 등장인물들이 모두 좋은 사람들이란 것이다. 그러니까 구경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들이 괴로워하지 않을 것과 또 그들이 늙지 않을 것을 알고 있으며 , 불행에 빠지는 일도 없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은 인간 세상의 모든 것과 아무런 상관없이 완전히 달랐다. 모두가 가짜인 이 서커스에 나오는 사람들은 전부 행복한 모습들이었다. 줄타기 광대는 언제나 절대 안전한 상태에서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내가 열흘 동안이나 가서 보아도 한 번도 그 광대가 떨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만일 그 광대가 떨어진다 해도 다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로자 아줌마가 식물에 가까운 상태로 병원에서 살게 된다면 그녀는 기계 서커스에 나오는 사람처럼 행복을 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자 아줌마는 그것을 두려워하고 거부한다. 모모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모는 신성한 자살권이라는 게 있지 않냐면서 의사에게 안락사를 시켜달라고 부탁한다. 로자 아줌마를 고통스러운 삶에서 구해달라고, 삶이란 것은 로자 아줌마를 엉덩이로 걷어차버렸다고. 하지만 의사는 그것이 불법이라며 거절한다. 오히려 병원에 보내는게 인간적인 일이라면서. 로자 아줌마는 자기를 안락사시켜주지 않고 병원으로 보내려한다는 말에 이렇게 대답한다. "그건 게슈타포야."


결국 모모는 최후의 선택을 하게 된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와 함께 아파트 지하의 은신처로 내려간다. 그 은신처는 로자 아줌마가 아직 계단을 걸어내려올 수 있었던 시절 종종 내려와 숨어있곤 했던 곳이었다. 그녀는 무엇이 무서워서 숨어있냐는 모모의 질문에 사람이 무서워하는데 꼭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로 대답했었다.


로자 아줌마는 곧 죽음을 맞게 된다. 모모는 하밀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이 없어도 살 수 있냐고. 하밀 할아버지는 예전에는 사람은 사랑없이는 살 수 없다고 했지만 정신이 흐려진 지금은 사랑했던 여자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의 시체가 썩기 시작하자 그녀의 모습을 지켜주려고 얼굴에 색깔을 칠해주고 향수를 부어준다. 모모는 3주 동안 로자 아줌마의 시체 옆을 지키고 있었다. 마침내 사람들이 냄새를 쫓아 지하실 문을 부쉈을 때 모모는 이렇게 생각한다. "살아 있을 때에는 냄새가 안 나니까 아무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자기 앞의 생(La Vie Devant Soi)'은 원래 '여생', 앞으로 남은 인생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책의 끝에 선 모모에게는 이제 남은 생이 있다. 사랑했던 로자 아줌마도 죽고 그의 아버지인지도 불분명한 정신병자 아버지도 죽고 창녀인 어머니는 오래 전에 살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생이 남았다. 그가 살아가야 할 삶. 그래서 모모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해야만 한다. 이 말은 두 가지를 다 지칭한다. 로자 아줌마와 같은 어떤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지탱해나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인생 그 자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 비록 사랑하기 힘든 인생이지만 살아있는 한 인생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게 망가지고 엉망진창인, 가진 것 하나 없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모모의 태도이다.




*참고: 이 책의 저자는 에밀 아자르이지만 로맹 가리는 1980년에 권총 자살하기 전에 남긴 유서에서 그가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소설을 썼음을 밝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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