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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Jun 10. 2023

심리평가 보고서

우울증에도 후유증이 있다


생명의 전화 종합사회복지관에서 지원받았던 것 중 심리검사가 있었다. 한 3시간 정도 계속되었던 검사는 부담스러웠고 나를 지치게 했다. 상담사 선생님은 끊임없이 질문했고 뭔가를 시켰다. 나중에는 피곤해져서 대충대충 해버렸다.


결과는 그 다음주에 들으러 갔다.


상담사님은 내가 내재된 우울증이라고 했다. 표면적으로는 우울증이 드러나지 않고 문제가 없지만 자존감도 낮고 자아 방어기능도 낮다고 했다.


그럴만하다. 나는 사춘기 이후 우울증 없이 살았던 적이 없어서 '우울증 아닌 상태'가 어떤건지 모른다. 아마 내 정체성 자체가, 내 생각회로가 우울증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나는 인지기능은 아직 우수한데 스스로의 능력을 낮게 평가하는 상태라고 했다. 실제 내 가치와 내가 느끼는 내 가치 사이에 괴리가 크다고. 


그리고 아직도 많은 것을 할 수 있는데 다 포기하고 주저앉아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 나는 아직 우울증의 후유증을 겪고 있다. 아직 재건해야할 것들이 많다. 우울증이라는 태풍이 휩쓸고 간 것들을 하나씩 다시 만들고 세워야 한다. 예를들면 위에 언급된 자존감, 방어능력 같은 것들.

 

이런 상황에선 이렇게 나를 지키고, 이렇대 대처하고 하는 방법들. 떳떳하고 당당하게 '나'를 말할 수 있는 이야기 만들기. 그리고 사회생활 하는 방법들도 배워야 하고 독서도 연습해야 한다. 너무 오랫동안 책을 읽지 못했다. 영어 단어를 외우는 것도 아직은 버겁다.


나를 재건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시작한건 글쓰기이다. 지난 2년여 동안 나를 변화시켰던 작은 생각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수시로 들여다보려고 한다. 나의 인생 이야기도 쓰고, 또 매일 일상을 쓰면서 그날 하루의 내 마음을 돌아보고 싶다.


지금 가장 아쉬운건 우울증 기간 동안의 일기나 글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때는 아무 의미 없고 쓸모없어보였던 내 생각들, 경험들 하나 하나가 사실은 지금 내가 딛고 있는 돌다리를 만들어준 거였는데... 스스로를 무가치하다고 생각해서 지난 20년간 나는 꾸준히 나를 부정해왔다. 쓴 것들도 지우고 없애버리고. 


이제는 유치하게 느껴져도 뭔가 쓰면서 나아가보려고 한다. 나의 바보같음도, 지우고 싶은 기억들도. 글로 남겨서 그때그때 감정도 정리하고, 그 순간들의 나를 긍정해주고 싶다.


그리고 공부도 다시 시작하고 뭔가 아주 작은 성공이라도 이루고 싶다. 독서를 할 수 있게 된다거나 영어 단어를 50개 외운다거나... 이런 성공들 말이다. 그리고 지금 준비하고 있는 (생각만 하고 있는...) 대학원 생활도 잘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다시 살아가는 일, 쉽지 않지만 차근차근 하나씩 해보려고 한다. 우울증 이후의 삶이라는거...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안개속을 걷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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