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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게, 길상사

법정스님의 의자

by 오렌지나무

'휘게(hygge)'는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 또는 혼자서 보내는 소박하고 아늑한 시간을 의미하는 덴마크어 단어다. 우리말의 '휴식', '여가', '여유로움', '아늑함' 같은 단어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어떤 느낌이 담겨있기에 '휘게'라는 말 자체를 가져다 쓰게 되는 것 같다.



'휘게'라는 건 어떤 시간일까.

덴마크어 단어를 써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상에는 없거나 별로 중요하게 의식하지 않는 시간인 것 같기도 한데... 과연 우리 인생 중 어떤 구간이 휘게인 것일까.


오늘은 근심이 많았고, 머리를 무겁게 하는 걱정들을 덜어내기 위해 무작정 집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다 정한 목적지는 길상사. 준비물은 운동화, 운동복, 약간의 현금.


길상사는 집에서 가깝기 때문에 걸어서 갈 수 있다. 빛을 뿜어내는 듯한 봄꽃들, 새파란 잎이 돋아나고 있는 나뭇가지들,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철쭉 꽃봉오리들을 지나 20분만에 길상사에 도착했다.


길상사는 의외로 구석구석 숨겨진 건물들이 많은 곳이다. 경내에 들어서면 보이는 설법전 쪽으로 가면 오른쪽에 탑이 하나 있다. 이름은 사사자석탑. 석탑을 받치고 있는 돌사자 네 마리가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무거운 탑을 머리로 받치고 있는 사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사자들의 표정이 다채롭다. 탑돌이를 하면서 기도보다는 사자들의 표정을 보게 된다. 어떤 사자는 '더워, 힘들어, 무거워'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사자는 힘들지만 당당하게 서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자 석상을 탑 하단에 세워도 되었을 텐데, 왜 사자들에게 돌탑을 머리로 받치고 있도록 한 것일까.


한편으로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자들이 불쌍하게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이 저 사자들과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통과 기쁨을 느끼는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 인생길을 걸어가는 모든 사람들의 머리 위에는 무거운 짐이 있다. 자신의 욕망, 자신에게 투영된 타인의 욕망, 욕망에서 비롯된 번뇌, 고통, 슬픔... 때로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서, 도박을 하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팽개치면서 그 짐을 던져버리고 싶어한다. 하지만 잠시 짐을 내려놓을 수는 있어도 아주 버리고 갈 수는 없다. 내 몸이 가는 곳에 내 욕망이라는 짐도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사자들을 보니, 사자들의 기개가 부러워진다. 사자들은 용감하게 짐을 지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도 저렇게 용감하게 살아가야지, 나의 몸과 나의 번뇌의 무게를 짊어져야지... 이런 생각을 하며 탑을 지난다.


설법전을 지나 앞으로 앞으로 걸어가다보면 평범한 길이 나타난다. 절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잡다한 건물들로 이어질 것만 같은 길이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 명상을 위한 건물이 나타난다. 침묵을 부탁하는 안내판이 있고 조용히 흔들리는 봄꽃들이 건물 밖을 장식하고 있다. 평범한 일층 건물인데 창문 너머가 보일 듯 길에 가깝게 지어져있다. 실제로 명상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숨죽여 조용히 지나간다.


명상하는 건물을 지나 길이 계속 이어진다. 그때 눈에 들어온 안내판은 법정스님의 진영각. 법정스님과 관련이 있는 곳인가 하며 길을 따라간다. 평탄하게 나있는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진영각이 있다.


진영각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툇마루에 잠시 앉았다. 법정스님이 보셨던 마당의 풍경도 이러했을까. 마당은 조용하면서도 운치가 있었다. 사람들이 제법 많이 있는 편이었지만 경내에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침묵이 가득한 진영각의 풍경을 즐기고 싶어서였는지 모두 조용했다. 사람들은 진영각 안에 들어가서 법정스님의 초상화를 보고 가만히 앉아있거나 툇마루에 앉아 마당을 보고 있었다.



진영각 앞마당에는 돌로 된 커다란 그릇이 있었다. 그 안에는 돌로 만들어진 작은 공이 있었는데, 이끼가 낀 그릇과 달리 공은 반질반질했다. 무슨 용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그 돌을 쓰다듬으며 소원을 비는 것 같았다. 어떤 엄마는 한손으로는 아기를 안고 다른 한손으로는 돌을 쓰다듬고 있었다. 아기 엄마가 떠나자 나도 손을 얹었다. 무슨 소원을 비는 것이 좋을까. 내년에 있을 시험에 합격하게 해달라고 빌까. 그러다 문득 여기가 법정스님의 거처였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어느 여름날 읽었던 법정스님의 '무소유'도 떠올랐다.


난초를 통해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는 법정스님의 깨달음과 내 소원의 간극. 나는 소원을 가지고 여기에 왔다. 소원이 이루어질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무거운 머리를 안고. 소원도 소유다. 소원은 비는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닌지. 소원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소원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이 무소유의 또다른 의미라는 '무소유'의 마지막 구절을 생각하면서 잠시 멍하니 돌을 만지고 있었다.



진영각 앞마당 한구석에 꽃이 예쁘게 피어있었다. 다가가보니 작은 부처님이 있었다. 소원을 비는 무수한 작은 돌들 사이에 부처님은 평화롭게 앉아계셨다. 이 작은 부처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걸까. 소원을 버려야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가져다놓은 돌들을 바라보면서. 부처님의 표정은 평온하다. 몸을 버릴 수 없듯이 욕망을 버리지도 못하고, 수많은 소원과 근심을 짊어지고 호소하는 인간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려고 하는 듯이.





마당 한편에는 법정스님의 유해를 모신 곳도 있다. 자연 그대로 소박하고 꾸밈이 없다. 꽃잎이 시들어 떨어지고 분해되어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고 해도 다음해에는 다시 봄이 오고 새로운 꽃이 피는 자연의 한 공간처럼.



마당에는 법정스님의 의자도 있다. 통나무를 덧대어 만든 의자.



진영각을 돌아나오는데 조그만 돌탑들이 보인다. 진영각 근처에는 이런 작은 돌탑들이 많이 있다.



길상사의 가장 큰 장점은 절 전체가 명상을 위한 공간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자가 놓인 공간이 도처에 있어서 가만히 앉아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바람이 불면 들리는 풍경 소리, 나뭇잎이 부딪치는 소리, 봄날의 새소리와 벌레소리를 들으면서 시간이 흘러가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일요일이라 제법 북적거리는 편이었지만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은 없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동행과 조용히 이야기하면서 나무 밑에 앉아있거나 혼자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문득 옆을 돌아보니 계곡에도 보살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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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서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했다. 조그만 다리에 이끌려 걸어가다보니 작은 사당이 나왔다.



사당 앞의 안내판을 보니 길상사를 짓도록 건물을 기증한 길상화 보살의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주인공인 길상화 보살. 눈이 많이 내린 날 자신의 유골을 뿌려달라는 유언이 와닿는다. 시를 읽으면서 한 여자의 삶을 생각해본다.



길을 내려와 다시 설법전으로 돌아갔다. 설법전 앞에는 선이 애처로운 보살상이 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최종태 교수가 조각했다는 보살상으로 성모마리아를 닮았다고도 한다. 이 보살상을 앞에서 봤을 때는 연약하면서도 사람들을 안아주는 강인함이 있는 보살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탑돌이를 하고 돌아나오다 본 보살상의 옆면은 애처롭도록 가느다랗다. 마치 자비심으로 충만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자식들에게 내어주고 뼈만 남은 어머니의 모습같다.



설법전을 지나 극락전으로 가다가 본 어린 부처님 조각상. 염주를 들고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천진하고 평화로워보인다.



극락전 밑에는 돌로 만들어진 그릇 속에 물이 가득 담겨있고 화분 하나가 잠겨있었다. 어떤 수중식물이 자라나고 있는 중인가보다.



극락전을 내려오다가 사람들을 따라 어떤 건물로 가게 되었다. 건물 앞에는 사람들이 둥그런 정원을 따라 길게 줄을 서있었다. 살펴보니 점심공양을 위한 줄이었다. 얼떨결에 줄 끝에 섰다. 둥그런 연못을 따라 난 길에 사람들의 줄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내가 서 있는 곳이 연못의 한쪽 끝이었는데 차츰차츰 연못의 반대쪽 끝까지 이동하게 되었다. 밖에서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기 위해 줄을 서 있을 때는 기다리는 것이 초조하고 지루했는데, 길상사의 풍경 속에서 기다림은 수행이 된다. 평소와 달리 가벼운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조금씩 나아갔다. 어느덧 내 앞사람은 건물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랬더니 내 뒤로, 내가 서있었던 자리까지 긴 줄이 이어져있었다. 사람들은 계속 줄을 섰던 것이다.


그 줄을 보다보니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아까는 내가 줄의 끝에 있었고 늦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어느샌가 줄의 가운데에 있었고 목적지에 거의 도달해있었다. 늦었다고 생각했던 그때가 빨랐던 것이다. 아니, 길에는 늦고 빠름 자체가 없었다. 이 줄을 따라가면 밥을 먹고, 밥을 다 먹으면 다시 밖으로 나갈 것이다. 인생은 이런 길의 연속이다. 앞서 간 사람들이 더 대단한 일을 경험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늦게 출발한 사람들이 더 초라하게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길을 따라 걷고, 길이 보여주는 것들을 경험하게 된다. 앞서 간 사람들은 단지 몇분 먼저 더 경험할 뿐이고 뒤따라 가는 사람들은 단지 몇분 늦게 경험할 뿐이다. 인생의 길은 끝없이 이어져있다.


(라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줄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은 후식으로 참외를 받았고 줄 뒤에 있던 사람들은 포도를 받았다는 건 안비밀... 내 포도...ㅠ.ㅠ)



밥은 무료로 제공된다. 시주를 하는 함이 식당에 있는데, 나는 아까 탑에서 시주를 했...으므로 괜찮다고 생각하며 그냥 밥을 먹었다.-_- 비빔밥과 된장국, 떡, 참외가 나왔다.


탑에서 시주한 것은 내 마음을 담은 것이었으니 밥값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내게는 이 밥이 공짜였다. 공짜밥을 먹는 것은 처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지금까지 먹은 밥에는 다 대가가 있었다. 부모님은 나를 낳아주셨고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게 밥을 해주셨다. 초등학교때 급식으로 먹었던 밥은 부모님이 돈을 지불해서 나에게 배급된 것이었다. 선배나 친구가 사주는 밥은 나에 대한 호의와 우정에서 주어진 것이고 언젠가는 나도 갚아야 하는 밥이었다. 직장에서 먹었던 밥은 내가 일한 대가의 일부였다. 모든 밥에는 대가가 있었고, 그래서 나는 한번도 밥에 대해서 감사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밥은 달랐다. 이 밥에는 아무런 대가가 없었다. 절에 찾아온 손님이라는 이유만으로 누군가가 힘들게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들어 내게 건네준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밥이 굉장히 소중하고 감사하게 느껴졌다. 누군가가 아무 이유없이 내게 베풀어준 호의의 무게. 밥을 먹는 내내 이 밥을 만들어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무조건적인 호의와 봉사를 받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는 생각이 든다. 굉장히 따뜻하고 좋은 느낌이었다.


비빔밥은 엄청 맛있었다. 쌀 한톨,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맛있게 잘 먹었다. 사람들이 밥을 들고 자리를 찾지 못해 서있었기 때문에 빨리 먹고 일어나줘야 했다. 여유롭게 먹고 싶다면 밥을 받은 다음 아까 줄을 섰던 정원의 돌의자에 앉거나 돗자리를 펴고 앉아서 먹어도 된다.



물을 마신 후에는 물컵을 스스로 씻어야 한다. 사실 장소만 충분하다면 다 먹은 그릇의 설거지를 직접 할 수 있게 해주어도 좋을 것 같았다. 설거지를 하면서 잠시 평온해지는 시간.



배부르게 먹고 나오다가 가게에 들렀다. 합장주랑 친환경 수세미를 샀다. 소원을 버려야 자유롭다느니 하는 생각을 했으면서도 시험 합격 합장주를 골라든 나.ㅋㅋㅋ 나를 괴롭게하지만 기쁘게도 하고, 나에게 살아갈 이유를 주기도 하는 짐인걸 어쩌랴. (벽조목 부적 합장주라는데 효험이 있길 바랄 뿐이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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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환경 수세미 2천 원, 합장주 6천 원. 계산하고 나오면서 '맑고 향기롭게' 스티커도 한장 가져왔다. 책상 위에 붙여놓고 오늘의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


길상사에서 보낸 오늘 한나절은 맑고 향기로운 시간이었다.

'휘게'가 이런 의미일까.

파도가 해변을 휩쓸고 지나가는 것을 관찰하는 것처럼 멈춰있고 고요한 시간이었다.


한결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다시 나 자신이었다. 불안한 꿈과 소망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지친 초라한 모습이 아니라, 인생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 그저 이 순간 발걸음을 내딛을 뿐인 나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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