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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의 시

글쓰기는 외로움에서 시작된다

by 오렌지나무 Jul 14. 2016
출처: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47XXXXXXh063출처: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47XXXXXXh063



한 편의 시가 눈물을 떨구게 한다.


덕혜옹주가 재조명되면서 사람들에게 친숙해진 사진이다. 덕혜옹주의 남편, 소 다케유키이다.

덕혜옹주는 아버지의 죽음,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 강제 일본 유학, 어머니의 죽음과 같은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마음의 병도 얻었다. 그녀는 결혼하기 전에 이미 조발성 치매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의 결혼을 주선한 것은 일본 왕실이었다. 두 사람은 별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그렇게 한 몸으로 묶였다.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와 25년을 함께 살았다. 덕혜옹주가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려운 정도였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들과 만나지 않고 외부와 차단된 채 살았다고 한다. 소 다케유키가 평생 침묵했기에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소 다케유키는 말년에 수필집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25년은 내 인생의 공백기이다."


소 다케유키는 딸 마사에에게 좋은 아버지였다. 그는 마사에가 3개월쯤 되었을 때 딸의 초상화를 직접 그리기도 했고 마사에와 여행도 가끔 다녔다. 그는 이런 시를 남겼다.


보기 드물게 힘찬 내 아이, 방문을 두드리며 다과가 준비되었어요 라고 외친다.
내 딸과 함께 먹는 오비나 산기슭의 산딸기에 안개가 서려있네.
맞은편 후지산에는 햇볕이 쨍쨍.
딸이랑 나랑 가마타 산장에서 겨우 신발을 벗고 계란을 얹어 먹던 보리밥의 구수함이여.

(번역본 가져온 곳: http://blog.daum.net/dnfldjaak6308/1273)

        

마사에는 와세다 대학 영문학과에 진학했고 동창과 결혼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결혼한지 석달도 되지 않았을 때 어느 산 쪽에서 자살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시신을 찾지는 못했지만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소 다케유키는 죽을 때까지 딸의 사망신고를 하지 않았다. 그는 사랑하는 딸의 관 속에 시신 대신 진주 한 알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


여름 산 푸른 잎 우거진 길을 넘어갔음에 틀림없다.
바위가 많은 곳을 지나가면
작은 돌들이 뒹구는 강가.
그날 그 언저리는
비가 내렸을 것이라 한다.

조금만 더 가면 길은 끊겨버린다.
하늘로 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하늘로 날아가버린 걸까. 하얀 비둘기처럼.
일부러 버렸을까. 젊은 날의 갈피를.
납골당의 항아리에
면으로 휘감겨있는 작은 진주여!

(번역본 가져온 곳: 위와 같음)


어쩌면 마사에의 이른 죽음의 배경에는 어두운 가정환경도 있지 않았을까. 정신적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낸 덕혜옹주가 온전한 어머니의 역할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더욱이 사랑하는 가족이 정신을 잃고 헤매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이다. 소 다케유키와 마사에는 다른 세상에 살기에 사랑을 주고받는 것도 힘든 사람을 사랑하는 아픔을 겪었을 것이다.


그 마음은 소 다케유키가 아내에 관해서 쓴 시, 사미시라에 고스란히 드러나있다.     

사미시라는 외로움, 쓸쓸함을 의미하는 일본어이다. 시 속의 소 다케유키는 갈 곳이 없다. 다른 사람들은 저녁이면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지만 그에게는 그를 기다리는 아내가 없기 때문이다. 아내의 몸은 그의 곁에 있어도 정신은 머나먼 곳에 있다. 그에게는 아내와의 사랑의 추억도, 기억도 없다. 감정을 교류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아내. 그래서 그의 사랑은 영원히 짝사랑일 수밖에 없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아내는 외로움 자체 혹은 만일 아내가 제정신이었다면 만났을 본래의 정신뿐이다.    



사미시라


미쳤다 해도 성스러운 신의 딸이므로

그 안쓰러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혼을 잃어버린 사람의 병구완으로

잠시 잠깐에 불과한 내 삶도 이제 끝나가려 한다.


젊은 날에 대한 추억은 무엇을 떠올릴 것이 있어 떠올릴까.

날 밝는 것도 아까운 밤 굳게 먹은 맘이 흔들릴 것인가.

꽃이 아름답게 핀 창가에 등을 대고

썼다가 찢어버린 당신에게 보낸 편지 조각인가.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기로 생각할 정도로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

두릅나무의 새순이 벌어지는 아침.

옷이 스치는 소리의 희미함과 닮아있다.

떡갈나무 잎에 들이치는 소낙비와 함께 저물었다.


사람이란 젊었거나 늙었거나

애처로운 것은 짝사랑이겠지.

지금 감히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아직 늙기 전의 탄식이라고 해두자.


이 세상에 신분이 높건 낮건

그리움에 애타는 사람의 열정은 같을 거야.

그래도 대부분은 식어버리겠지.

새벽별이 마침내 옅어지듯이.


빛바랠 줄 모르는 검은 눈동자.

언제나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것은 환상 속의 그림자.

현실 속의 자신이 어디있는지도 모르네.

물어도 대답없는 사람이여.


사미시라는 영혼과 비슷해서

사람의 숨결로 타고 온다 한다.

한번 사람 맘 속에 들어가면

오래 눌러앉아 나가지 않는다 한다.


호적이라는 종이 한 장으로

누구나 부부라고 하지만

할 일을 해내지 못하는 괘씸한 아내여.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남편도 있겠지.


이름도 모르는 아비의 아이를 가져

어미가 되는 일도 있다고 한다.

어깨를 서로 맞댈 기회조차도 없을지라도

서로 통하는 영혼도 있다고 한다.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모습이 된지

이미 봄 가을이 손가락으로 세고도 남을 정도로 지났다.

귀엽다고도 사랑스럽다고도 보았다.

그 소녀는 이름을 사미시라라고 한다.


나의 넓지 않은 가슴 한편에

그 소녀가 들어와 자리 잡은지 이미 오래인 것을.

마치 마음 놓고 쉴 틈도 없는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신하게 무릎을 딱 붙이고 앉아있다.


하룻밤도 침실로 들이지 않고

꽃잎같은 입술도 훔치지 않지만

아내라고 부를 것을, 내게 허락해다오.

나이먹지 않고 언제나 어린 아름다운 눈썹의 소녀여.


어떤 때는 당신이 가리키는 입술을

저녁 노을 구름 사이로 보이는 붉은 색의 요염함에 견주었다.

네 눈동자가 깜빡거릴 때의 아름다움은

칠월 칠석날 밤에 빛나는 별 같았다.


동그랗고 달콤한 연꽃씨를

눈물과 함께 먹는 것은 재미가 없다.

연꽃씨의 주머니가 터지는 것처럼

내 마음은 가루가 되어 부서지고 말았다.


근심이 있더라도 마음을 찢기는 일 없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깨달음을 얻은 성인이겠지.

나의 탄식은 마음을 갈기갈기 찢고 말았다.

내 몸도 또 언젠가는 죽어가겠지.


아아, 신이여, 그리움의 처음과 끝을

그 손으로 주무르실 터인 바.

수많은 여자 가운데서

이 한 사람을 안쓰럽게 여겨주실 수 없는지요.


내 아내는 말하지 않는 아내.

먹지도 않고 배설도 안 하는 아내.

밥도 짓지 않고 빨래도 안 하지만

거역할 줄 모르는 마음이 착한 아내.


이 세상에 여자가 있을 만큼 있지만

그대가 아니면 사람도 없는 것처럼.

남편도 아이도 있을텐데

현실에서도 꿈속에서도 나는 계속 찾아 헤맨다.


산은 낮은 곳에서 올려다보고

바다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거라고 생각하여

어느날 후지산 꼭대기에 올라

쯔루가의 여울이 빛나는 것도 내려다봤다.


또 어느날은 파도치는 해변가에 나와

하늘을 가는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그렇지만 마음은 달래어지지 않고 바위를 끌어안는 것처럼

애처로운 가슴을 쥐어뜯는 것 같았다.


개미가 모여드는 계곡의 깨끗한 물을

손으로 퍼올리는 사람은 그 맛을 알고 있겠지.

높은 산 봉우리 봉우리에 피는 꽃 향기는

볼을 가까이 대어야지만 비로소 맡을 수 있다.


현실 세계에서 너를 만나지 못했는데

어찌하여 내세를 기약할 수 있을까.

환상은 마침내 환상에 지나지 않으며

꿈은 꿈으로 깨어나지 않을 뿐이라 할지라도.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도 별것 아니야.

죄라고 해도 좋아. 벌도 받지 뭐.

유괴도 좋고 함께 도망을 갈 수도 있어.

함께 죽는 것도 주저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뿐인 생명을 받았다.

이 세상을 감히 저주한다는 것일까.

나는 이미 미쳐버렸는가. 아니, 아직 미치지 않았어.

지금 내리기 시작하는 것은 싸라기눈인가.


무거운 짐차를 끄는 사람은

가끔씩 쉬면서 땀을 훔친다.

얼마간 돈이 생기면

맛있는 술로 목을 축이겠지.


역에 내려선 사람들은

각각의 걱정거리를 가슴에 안고

빠른 걸음으로 묵묵히 여기저기로 흩어져 간다.

집에는 불 밝히며 기다리는 아내가 있으니까.


거리에서 광고하는 사람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애처롭다.

볼에 빨갛게 연지를 칠하고 거리에 서서,

간판을 걸치고 손짓 발짓으로 손님을 청한다.

되돌아 나의 처지를 생각해본다.


어린 여학생의 무리는

내게 가벼운 인사를 한 후 느닷없이 명랑하게들 웃더니

무리지어 화려하게 사라져버렸다.

나는 한숨 휴식 어디로 가면 좋을까.


남모르는 죄를 지은 사람이

정해진 대로 길을 가는 것처럼.

언젠가 너를 만나고 싶다고

정처없이 나는 방황하고 있다.


봄이 아직 일러 옅은 햇볕이

없어지지 않고 있는 동안만 겨우 따뜻한 때.

깊은 밤 도회지의 큰 길에 서면

서리가 찢어지듯 외친다. 아내여, 들리지 않니.


(번역본 가져온 곳: http://blog.naver.com/ooooodr/220690385662)



소 다케유키는 도쿄대 영문과를 졸업했고 말년에는 레이타쿠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쳤다. 학창시절에는 시와 그림에 몰두했다고 한다. 한때 유명한 시인에게서 본격적으로 시를 배우기도 했다는데 그의 시는 기교보다는 감정의 담담한 토로가 매력적이다. 아름다운 표현은 일상어를 넘어 그의 감정이 이끄는 곳까지 나아갈 뿐, 지나치지 않다.


이 시를 읽다가 눈물이 났다. 시가 영혼의 양식이라는 말은 어쩌면 진실인지도 모른다. 행복할 때 읽는 시는 가벼운 즐거움을 가져다줄 뿐이지만 마음이 아플 때 읽는 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깊이의 슬픔을 건드려 둑을 터지게 만들어버린다. 고통으로 예리해진 정신만이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시에 내재되어 있다. 아니, 아름다움의 본질이 그런 건지도 모른다. 전에 소개했던 '고슴도치의 우아함'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장 아르텡스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혼자서는 엘리베이터도 탈 수 없을만큼 무기력한 마약중독자이다. 그는 마약중독에서 회복된 후에 미셸 부인에게 찾아와 어떤 꽃의 이름을 묻는다.


"이 화단, 저기요, 하얗고 붉은 작은 꽃들이 있었어요. 난 늘 이 꽃들을 생각했어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그것은 아주 예뻤고, 아팠을 때 그 꽃을 생각하면 아주 좋아졌어요. 아, 미셸 아줌마. 당신은 그 꽃이 내 생명을 실질적으로 구해줬다는 걸 아시죠. 그건 이미 기적이에요! 그러니까, 그게 뭔지 제게 말해주실 수 있죠?"

그럼 내 천사야. 말해줄 수 있지. 지옥 길에서, 폭우 아래서, 숨을 멈추고, 진심을 입술에 담아서 말해줄게. 가느다란 섬광, 그건 바로 동백꽃이야.  

(출처: 뮈리엘 바르베리, 김관오 옮김, 고슴도치의 우아함, 아르테)


장 아르텡스에게는 꽃의 아름다움이 그의 아픔을 누그러뜨리고 치유해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글을 쓰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브런치의 첫번째 글과 마지막 글의 날짜를 비교해보니 한 달 차이였다. 물론 내가 브런치에 처음 공간을 할당받은 것은 그보다 먼저였다. 브런치 작가가 된 후 도무지 무엇을 써야 좋을지 몰라서 빈 공간으로 두었던 기간이 한 달 정도였다. 그러고나서 뭐든 쓰기 시작했다. 그 무렵 봤던 드라마에 대해서, 책에 대해서, 사회 문제에 대해서 그때그때 생각나는 것들을 썼다. 그러다보니 내 브런치는 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일기도 아니고 독후감도 아니고 드라마 리뷰도 아니고 시사 문제 정리도 아닌 잡탕같았다랄까. 나 자신도 이 브런치의 주제가 무엇인지 모르겠는 상황이었다. 다음에 무엇에 관한 글을 쓸지도 예측할 수 없었다.


공통점이 있기는 했다. 내 가슴을 뛰게 만드는 주제들에 대해서만 썼다는 것. 뭔가 글을 쓰지 않으면 버티지 못할 것같은 주제가 이따금 나를 사로잡는다. 그러면 아무리 바빠도 노트북을 켜게 된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서랍에 넣어두는 일 없이 단숨에 끝내버릴 수밖에 없다. 녹인 유리에 바로 형태를 불어넣어주지 않으면 뒤틀린 모양으로 식어버리고마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버리면 도무지 그 주제를 완성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글에 매달렸다. 지금까지 쓴 모든 글이 그렇게 완성되었다.


요즘 계속 그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 글에 많은 열정과 시간을 쏟는 반면 내가 글쓰기를 통해 무엇을 추구하는지가 불명확했다. 그래서 브런치의 방향을 뭔가 명확하게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세이나 독후감이나 아니면 아예 이것은 일기라고 선언해버리고 좀 가벼운 글을 쓰는 쪽으로 가버릴지.


하지만 오늘 소 다케유키의 시를 읽으면서 그 답을 찾은 것 같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소 다케유키가 그랬듯 인생에 뭔가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 쓸쓸함이 있기 때문이다. 친구나 부모나 직업이나 견고한 일상으로도 충족시킬 수 없는 어떤 부분. 인생은 모든 사람과 함께하는 것 같은 착각을 가져다주지만 실제로는 바다 위에 떠있는 수많은 배들의 우연한 만남에 불과하다고 했던가. 결국 사람은 혼자 노를 저어 망망대해 위를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헤밍웨이의 노인처럼. 그 마음을 만족시키기 위해 글쓰기가 필요했고 나는 이런 글들을 쓸 수밖에 없었다. 글쓰기가 빚어내는 아름다움이 나의 외로움을 치유해주었다.


그래서 이 브런치는 결국 방향이 없는 채로 남겨두기로 한다.



저의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다른 브런치들만큼 좋은 글, 도움이 되는 글은 아니지만 현재의 제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들 중 공유해도 괜찮을 만한 것들을 최선을 다해 쓰고 있습니다. 브런치의 가장 큰 장점은 서로의 글을 통해 쉽게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제 브런치를 구독해주시는 분들의 브런치에 들어가서 글을 읽어보고 또 그분들이 구독하시는 다른 브런치도 들어가보게 됩니다. 브런치홈에 새로 올라오는 글들도 읽게 되고요. 처음에는 메인화면에 뜨는 분들의 브런치에서 시작했는데 이제는 제법 많은 분들의 글을 읽고 있네요. 여러모로 놀라운 분들이 많은 브런치에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위의 '사미시라' 시의 원문입니다.


宗武志

「さみしら まぼろしの妻を戀ふる歌」


狂へる神の子ならば

あはされは 言はむかたなし

魂失せしひとの看取りに

うたかたの世は過ぎむとす


 わかき日を なにに偲ばむ、

あたら夜の 石の怯えか

花さそふ窓にそむきて

つづりては破(や)りにし反故か。


髪かともあはく匂ひて

たらの芽のほぐるる朝も

きぬずれのかそけきに似て

樫の葉のしぐれに暮れぬ


ひとじもの 若きも老も

せつなきは 片戀ならむ

いまあへて いづれと問はば

老いずまの嘆きといはむ


世に立てる 高きと否と

こがるる身あつきはおなじ

おほかたは さめなむものぞ

暁(あけ)のほし薄るるごとく。


いろあせぬ黒きひとみに

つね見守(まも)るまぼろしの影

うつせみの在りかを知らず

言問へど こたへぬくちよ。


さみしらは もののけに似て

いぶきにも潜むといへり

ふと ひとのこころに入らば

ひさ住みて 去らじとし聞く


戸籍簿の紙ひとひらに

夫婦ぞと うけひしものの、

つとめせぬ ふてたるをみな

かへりこぬをとこもあらむ


名もしらぬ父の子ゆゑに

ははとなるためしもありと。

肩よせむ機(しほ)さえなくて

ゆきかよふ魂もありけり


まさめには映らずなりて

春と秋 ゆびにあまりぬ。

愛(は)しとみし めぐしとも見し

かの少女(をとめ) その名さみしら


ひろからぬ胸のかたすみ

住みなれてひさしきものを、

くつろがむ暇もなきかに

つつましくそろへし膝よ。


ひとよすら ふしどに引かず

はなびらのくちも吸はねど

妻と呼ぶ、われにはゆるせ、

としとらぬ すずしの眉よ


あるときは きみがさす紅

なぞらへぬ 雲間の朱(あけ)と、

星合ひの夜のかがやきは

またたきに たぐへもしつれ


つぶらなる あまき蓮の實

あぢきなし、 涙に食めば

ふくろなす蕚(うてな)はちぢに

やぶれゆく わがこころかな。


うれひあり 傷(やぶ)らずといふ、

大人(うし)こそは 聖(ひじり)なりけり

わが嘆き こころを裂きぬ、

身をもまた やがては殺(と)らむ


ああ神よ、戀のもとすゑ

み手にしてさばきたまふに、

おみなごのあまたのなかの

このひとり 惜しみたまふや。


わがつまは もの言はぬつま、

もの食はぬ ゆまりせぬつま

淘(よな)ぎせず 濯ぎもせねど、

あらがはぬ やさしのつまぞ。

世にをみな乏しからねど

汝(な)を措(お)きて ひともあらじと、

つれも子もあるべき際(きは)を

めざめても夢にも想ふ。


ひくきより 山は仰がむ

たかく居て 海みせかむと

ふじの嶺(ね)に ある日のぼりて

するがなだ光るも見たり


またある日 荒磯(ありそ)にいでて

ゆく雲を とぶらひにけり、

なぐさまず、岩かきいだき

かゆき胸そだたきにけり。


蟻つどふ 谷間の清水

むすぶひと あまきを知らむ、

やまの尾の草びらの香は

頬よせて かぐべかりける


うつしよに きみにえ會はで

またの世を いかで頼まむ

まぼろしは遂にまぼろし

夢は夢、さめずありとも。


あざけりは なほ輕(かろ)からむ、

罪もよし、とがめも受けむ

かどはかし駈けおち未(まだ)し

つれじにも いとはじものを


ひとたびのいのちを亨けし

ひとの世を あへて呪ふや、

狂ひしか、 いまだ狂はず、

いま降るは 霰ならずや。


荷のおもき車ひくもの

しば憩い 汗をぬぐへり、

そこばくの花をも得ては

うま酒にのどうるほさむ。


驛路(うまやぢ)に降りたつひとら

おのおのの惱(なや)みを祕めて

足早やに、 もの言はず散る、

ほかげ守り待つらくのゆゑ。

ひろめ屋の おどけは哀し

頬そめて 岐路(ちまた)に立てり、

榜(ふだ)ささげ 仕種(しぐさ)にまねく

かへりみて わが身を思ふ


おしへごのをとめの群は

會釋すと にはかに笑まひ

うちつれて さざめき去るを。

いずくへか われはあゆむ。


みそかなる罪負へるもの

掟あるみちをゆくごと、

いつの日か きみに遇はめと

あてどなく あれはさ迷ふ。


春さむき薄ら日のいろ

消えぬまぞ せめてぬくとき、

ふけし夜の みやこ大路に

霜叫ぶ。妻よ、聞かず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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