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이 한창 유명했을 때에는 읽을 기회가 없었다.
도서관마다 예약이 밀려있었고, 얼핏 듣기로도 우울증 환자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굳이 돈 주고 소장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다 해를 넘기면서 그동안 나를 지치게하던 일에서 잠시 해방되었다. 빈 마음으로 뭘 할까 고민하다가 도서관에서 이 책을 다시 찾게 되었다.
책을 빌려와 읽기 시작했는데, 첫머리에서부터 질려버렸다.
아내에게 매력이 없지만 무난해서 결혼했다는 남자의 말이나, 아내와 아무 대화도 없이 오직 차려주는 밥만 먹으면서도 이제 슬슬 아빠 소리를 들을 때가 되지 않았나는 남자의 생각이 너무 비현실적이고 도식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아내가 새벽에 혼자 냉장고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는 부분부터 뭔가 시작되나 해서 다시 흥미를 갖고 읽었는데, 작가의 설명이 군데군데 있긴 하지만 여전히 맥락없어 보이는 노브라와 딸 입에 강제로 고기를 쑤셔넣으려는 아버지, 자해, 동박새 물어뜯기, 온 몸에 꽃을 그린 채로 형부와 성관계하기, 가정이 있는 전 애인에게 자기 알몸에 꽃을 그려달라고 부탁하는 남자, 아무리 남편이 여동생이랑 성관계를 했다고 한들 정신병원에 보내기 위해 구급차를 부른 아내, 딸이 정신병원에 있다고 아예 딸을 찾아오지 않는 부모, 모든 음식을 거부한 채 나무가 되겠다고 저항하다 피를 뿜는 장면까지... 총체적 난국이었다.
어떻게 설명하든간에 영혜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인 건 분명하고 나는 '미친' 어떤 사람의 속사정을 이해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사춘기를 지나면서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굳이 외부에서 더 보태주지 않더라도 충분한 구정물과 통찰력 넘치는 파편들이 가득하다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는 이런 종류의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기도 했다. 단지 소설화시킬 능력이 없을 뿐 누구의 마음속에나 있는 이야기니까. 씹다 뱉은 껌(극히 예리한 어떤 감정과 순간의 포착같은 것들)을 거미줄치듯 방 벽에 여기저기 쳐놓아서 현란한 모습을 연출한다 하더라도 그건 결국 씹다 뱉은 껌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좀더 꼼꼼하고 탄탄하고 쫀쫀한 줄거리가 있는 글들, 예를 들어서 앤 타일러의 '종이시계'같은 소설들을 좋아한다.
그래도 이해해보려고 다시 한번 훑어보는데 내 눈을 사로잡은 구절이 있었다.
오래전 그녀는 영혜와 함께 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때 아홉살이었던 영혜는 말했다. 우리, 그냥 돌아가지 말자. 그녀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금방 어두워질텐데. 어서 길을 찾아야지.
시간이 훌쩍 흐른 뒤에야 그녀는 그때의 영혜를 이해했다. 아버지의 손찌검은 유독 영혜를 향한 것이었다. 영호야 맞은 만큼 동네 아이들을 패주고 다니는 녀석이었으니 괴로움이 덜했을 것이고, 그녀 자신은 지친 어머니 대신 술국을 끓여주는 맏딸이었으니 아버지도 알게모르게 그녀에게만은 조심스러워했다. 온순하나 고지식해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던 영혜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고, 다만 그 모든 것을 뼛속까지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이 부분을 읽고 깨달은 것은 '채식주의자'가 뜻밖에 현실적이라는 것이었다.
어릴 때 아버지가 기르던 개를 잡아 그 국을 먹인 트라우마 때문에 결혼 5년차의 주부가 갑자기 고기에 관한 꿈을 꾸고 육식을 거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사람이 고기뿐만이 아니라 서로를 잡아먹어서 자신을 유지한다는 걸 깨달은 어떤 여자가 처음에는 육식을, 나중에는 모든 음식을 거부하는 것은 충분히 현실적이다.
먹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먹는 행위는 어떤 것을 파괴해서 나를 유지하는 것이다.
동물을 먹는 사람은, 그 동물을 파괴해서 자신의 몸을 유지한다. 식물을 먹는 동물은 그 식물을 파괴해서 자신을 유지한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우리는 생명을 갖고 자신만의 삶을 살던 어떤 동물을 죽여 얻은 사체를 먹고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물과 햇빛과 토양의 양분만으로 살아가는 식물은 조금 다르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토양 역시 수많은 벌레와 동물과 사람의 사체로 영양분을 공급받고 있으니 완전히 다르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생명을 가진 것들은 이렇듯 다른 무언가를 파괴해서 자신을 유지하도록 설계되어있다. 이것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왜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의식주와 사랑에 대해 '희생'이라는 단어를 쓰는 걸까. 그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먹을 것을 주고 옷을 입혀주고 따뜻한 집을 제공해주고 끝없는 사랑을 베풀어주기 위해서는 부모가 온갖 힘든 일을 견뎌야 하고 자신의 감정을 억눌러야 하기 때문이다. 어미 표범이 새끼들에게 먹이를 가져다주기 위해 배고픔을 참고 사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부모도 자식들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기 위해 매일 분투한다. 부모는 다른 사람이었다면 화를 냈을 일을 자식이 해도 화를 내지 않고 참으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자식이 부모를 파괴해서 자신을 유지하는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특이하게도 이런 현상은 사람에게는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나타난다. 작게는 화풀이라고 부르고 크게는 폭력이라고 부르는 관계도 '먹는 행위'의 일종이다. 다른 사람이 나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때 또 다른 사람에게 신체적, 정신적으로 폭력을 행사해서 나의 기분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부모의 희생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자식을 위해 파괴된 부모가 항상 희생을 감수하는 것만은 아니다. 가족을 위해 돈을 버느라 밖에서 온갖 수모와 힘든 일을 참아낸 아버지는 집에 와서 아내에게 분풀이를 하고 손찌검을 할 수도 있다. 남편에게 맞은 아내는 자식들에게 더 쉽게 화를 내고 때릴 수도 있다. 어머니에게 맞은 아이들은 밖에 나가서 자기보다 약한 친구들을 때릴 수도 있다. 자기의 기분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고, 이러한 폭력이 연쇄적으로 퍼져나가는 것이다.
예전에 어떤 서양인이 기독교의 교리 중에서 '원죄'의 개념이 가장 무섭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기독교에 기반한 문화 속에서 자랐지만 어째서 사람이 원초적으로 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교리와 별개로도 사람이 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은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이 그렇다.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남을 파괴하는 것이 생명의 본질이라면 생명은 죄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이 의미있는 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의 근저에는 수많은 생명을 파괴하고 스스로를 유지해왔다는 일종의 죄책감이 있는지도 모른다.
'채식주의자'는 이런 근본적인 죄를 저지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영혜가 가슴으로는 아무것도 해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이런 죄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혜도 이게 본능에 반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영혜는 고기를 끊고 아무것도 해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왜 자꾸 가슴이 여위고 날카로워지는지 고민하는 것이다. 영혜는 단순히 고기를 먹지 않는게 답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식물이 되려 한다. 영혜는 온몸에 꽃을 그리고 식물의 엉킴처럼 아무 죄책감 없이 형부와 몸을 섞는다. 하지만 언니 인혜가 그 모습을 목격했을 때 영혜는 자신은 누군가를 파괴해서 자신을 유지할 수 밖에 없는 생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채식주의자' 단편집의 마지막 편에서 영혜는 고기에 이어서 모든 음식을 먹는 것을 거부한다. 영혜는 나무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하지만 그 길에는 죽음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영혜 자신도 그것을 잘 안다. 그녀는 인혜에게 왜 죽으면 안되냐고 되묻는다.
인간의 생의 의미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생의 무게는 알 수 있다. 직접 소와 닭과 돼지를 도축해서 그 고기를 맛있게 먹는다고 상상해보면, 그만큼이 생의 무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많은 다른 것들의 생명을 파괴해서라도 이 생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밖에 없다. 바로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살아있기를 원하고, 나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것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런 목적이 있기에 사람은 죄의 무게를 겸허히 짊어지고 자신의 삶을 살아나간다.
그리고 사람 사이에서는 상대를 '파괴'하는 것이 꼭 죄인 것은 아니다.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자식을 낳고, 자식을 입히고 먹이기 위해 모든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파괴이긴 하지만 죄는 아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서 비롯된 자기 파괴는 희생이지 받는 사람의 죄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영혜는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으며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도 없기에 그 모든 죄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영혜의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는 영혜가 자신의 열등감을 자극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녀와 결혼했고 아내보다 더 요리를 잘하고 돈도 잘 벌어오는 영혜의 언니에게 성적인 긴장감을 느낀다. 영혜의 부모도 자식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영혜의 아버지는 화풀이삼아 어린 자식들을 때렸고 나중에 영혜가 정신병원에 입원하자 영혜의 부모는 딸을 더이상 찾지 않는다. 영혜를 가장 많이 챙기는 언니 인혜도 영혜를 사랑하지 않는다. 인혜가 영혜를 살뜰히 챙기는 이유는 영혜가 아버지에게 맞는 것을 방관했던, 아마도 마음속으로는 자기 대신 영혜가 맞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어린시절의 죄책감 때문이다. 인혜는 영혜의 정신이 자신만 현실의 진창에 남겨둔 채 피안으로 떠나버렸다는 이유로 영혜의 퇴원을 거부하기도 한다.
인혜의 남편도 아내를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다. 그는 결혼할 때 사랑한다는 말 대신 당신은 나한테 과분하다는 말을 했고, 결혼 후에도 아내와 감정을 공유하지 않고 살았다. 아내에게 힘들다는 말을 하는 대신 옷을 입은 채로 빈 욕조에 들어가 혼자 웅크리고 있는 것이 그의 결혼생활이었다. 그는 자기 욕망에 따라 아내를 안으면서도 아내가 우는 이유를 알지도 못하고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그에게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처제인 영혜의 몽고반점에 사로잡혀 그녀와 성관계를 맺으면서도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 아내에 대해서는 아무 죄책감이 없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인혜도 남편을 사랑하는지 확신이 없다. 인혜가 남편을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교육자와 의사가 대부분인 남편 집안의 분위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인혜는 개를 잡고 아이들에게 손찌검을 하는 자신의 집안과 다른 남편 집안의 분위기를 동경했다. 인혜는 남편이 하고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생계를 책임졌다. 그런데 인혜는 자신이 정말 쉬게 해주고 싶었던 것은 남편이 아니라 열아홉살에 집을 떠나 혼자 서울 생활을 하며 버텨온 자기 자신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한다. 실제로 인혜는 빈 욕조에 웅크리고 있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도 남편과 대화를 시도하는 등 남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자기 의사에 반해 관계를 가진 후 울면서도 남편에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지 않는다. 인혜는 하나뿐인 아들 지우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 사랑도 지우를 위한 것인지 상처많은 어린 시절을 보낸 인혜 자신을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지우는 벌써부터 엄마의 눈치를 보고, 엄마를 웃게 하기 위해 일부러 동작을 지어내가며 애교를 부리는 아이다.
이들은 서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살아간다. 서로를 잡아먹어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영혜의 남편이 영혜와 사는 이유는 영혜가 집안일과 아르바이트로 도움을 주고 아이를 낳아줄 수도 있으며 흔히 아내들이 하는 이런저런 요구로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음에도 아내가 제공해주는 식사와 일정한 생활비가 필요해서 유지하는 결혼생활, 그것은 영혜를 잡아먹어 자신을 유지하는 것과 같다. 영혜의 아버지가 자식들과 함께 살았던 이유는, 어떤 측면에서는 자식들을 때리면서 자기 기분을 풀 수 있었기 때문이고, 어떤 측면에서는 자식들이 존재하고 결혼해서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자기의 사회적인 체면을 지켜주기 때문이었다. 인혜의 남편이 인혜와 살았던 이유는 인혜가 의식주를 제공하고 아들 지우를 낳아주고 잠자리를 해주기 때문이다. 인혜가 남편과 살았던 이유는 남편을 돌보면서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사랑에 가장 가깝고 어쩌면 진짜 사랑일 수 있는 것은 인혜와 지우의 관계이다. 지우를 사랑하기에 인혜는 아무것도 놓을 수 없고 어떻게 삶의 무게를 감당할지를 고민하며 계속 살아간다. 하지만 영혜에게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고, 그녀는 어느 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이의 꿈을 꾸고 냉장고 앞에 섰던 것이다.
여러가지 생각을 해볼 수 있게 해준 책이었다.
반납기한이 하루 늦어지게 되어 이 책을 예약한 분께 죄송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