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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싱(Missing): #MeToo의 다음 단계

성범죄 재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매뉴얼 게임

by 오렌지나무



안녕?
나는 네가 안전하게 집에 있는거면 좋겠어.
왜냐하면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소녀가 납치되고
아무도 그녀가 어떻게, 왜 실종되었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야.
그녀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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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개발된 Missing이라는 게임의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 게임은 인도의 성매매 현실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2015년에 실종된 인도 여성은 약 13만 명.

인도 인권 관련 단체는 실제 실종되는 여성이 매년 300만 명에 이른다고 보고 있다고 한다.

상당수의 실종 여성들은 납치되어 성매매 업소에 팔려가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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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은 납치 당시 먹은 약물 탓에 이름도 고향도 기억하지 못하는 소녀 참파(Champa)가 좁고 어두운, 낯선 방에서 깨어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게임은 참파를 움직여 방을 나가도록 시도해보라고 권한다. 그러나 문은 잠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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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잠시 후에 들어온 건 마시(Masi)라는 여자 포주와 그녀를 돕는 미나(Meena)라는 소녀이다. 마시가 미나에게 이 소녀의 이름은 무엇이냐고 묻자 미나는 참파의 이름을 알려주려고 한다. 하지만 마시는 진짜 이름이 무슨 상관이냐며 참파를 루비(Ruby)라고 부르겠다고 한다. 미나가 참파의 진짜 이름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참파는 그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조력에 의해 납치된 것인지도 모른다(소름...).


마시는 참파에게 음식을 먹을 건지 물어보고, 게임 유저는 음식을 먹을지 거부할지를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어느 상황에서도 먹을 건 먹어야 된다는 주의이기 때문에(참파 미안...-_-) 처음엔 당연히 먹는 것을 선택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먹을 것을 거부하면 마시는 참파를 때리고 며칠씩 굶겨서 결국 참파가 마실 것을 달라고 애원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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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먹고 나면 마시와 미나가 들어와 빨간색 옷을 입으라고 준다. 이 와중에도 참파는 어린 소녀답게 이렇게 예쁜 드레스를 입어보고 싶었다고 반가워한다. 여기서 게임은 이 옷을 바로 입을 건지 아니면 옷을 수선하게 미나에게 도와달라고 할 건지 물어본다.


이 선택의 결과는 모두 암담하다.


옷을 수선하게 도와달라고 하면 참파가 도망갈 수 있도록 미나가 문을 열어둔 채 나간다. 이 게임은 튜토리얼이 그렇게 자상하지 않아서 문 밖으로 나간 다음 어느 골목으로 도망가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오른쪽 방향 길로 달렸다가 감시원에게 걸려서 왼쪽 방향으로 달렸더니 문이 하나 있긴 한데 열쇠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열쇠가 어디있는지는 알려주지 않아서 위쪽 방향으로 갔더니 그곳에 열쇠가 있다. 열쇠를 손에 넣는 것도 여러번 실패했다. 감시원이 있기 때문에 숨어서 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마침내 열쇠를 손에 넣고 다시 내려와 아까 그 문을 여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결과는...

숀티(Shonty)라는 감시원에게 잡혀 끌려와 숀티와 첫경험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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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빨간 옷을 입는 것을 선택하면 마시가 첫경험을 시킬 다른 남자를 직접 데려온다.


이 게임이 불편하다고 느낀 건 이 지점에서부터였다.

내용도 불쾌했지만 참파를 도망시키려고 나름 열심히 애썼는데 이런 결과가 당연히 예정되어 있다는데 기운이 빠졌다. 이 게임이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현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걸 이때부터 좀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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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있은 이후 참파는 자살하려고 한다. 미나는 참파를 위로하며 자신도 그런 일을 겪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의 죽음이 여기서는 단지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걸 알기 때문에 자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나는 참파에게 가족을 다시 보기 위해 살아남고 여기서 도망치라고 말해준다. 참파는 가족을 다시 보고 싶긴 하지만 여기서 생활한다면 창녀가 되는 것이 아니냐고 괴로워한다. 그러자 미나는 네가 도망치려는 마음을 갖고 있는 한 누구도 너를 창녀로 만들 수 없다고 이야기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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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주된 부분은 참파가 길거리에서 호객행위를 하면서 탈출의 기회를 찾는 것이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남자들의 머리 위에는 하트와 돈 표시가 되어있다. 하트는 현재 성욕의 정도를, 돈은 남자가 수중에 지닌 돈의 액수를 나타낸다. 성욕이 낮은 남자에게는 술을 먹이면 성욕이 급상승한다. 이 표시들을 잘 보고 거기에 맞춰 가격을 제시해야 한다. 남자는 성욕과 가진 돈에 비해 높은 가격이 제시되면 너무 비싸다고 거절하고, 낮은 가격이 제시되면 너무 싸다며 성병에 걸린 것 아니냐고 하면서 떠나버린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마시가 수금을 하러 온다. 참파가 번 돈이 충분하면 마시는 만족해하고, 부족하면 마시는 숀티를 불러 참파를 폭행하게 한다. 성폭행인지 구타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나오지는 않지만 참파는 굉장히 괴로워하기 때문에 이 상황이 되면 스트레스 지수가 상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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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게임은 매춘생활 체험게임이 아니니 탈출을 해야 한다. 호객행위를 하면서 돈을 좀 벌면 마시에게 잠깐 산책을 다녀오겠다고 말할 수 있다. 돈이 충분하지 않으면 마시는 밖에 나가는 것을 허락해주지 않고, 호객행위를 하다가 시간이 너무 흐르면 마시가 수금하러 오기 때문에 빨리 돈을 모아서 산책 허락을 받아야만 한다.


이 게임은 튜토리얼이 잘 되어 있는 '쉬운' 게임은 아니기 때문에 세 갈래 길 중 어디로 가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길로 가든 감시원이 있기 때문에 매번 잡혀서 끌려와 숀티에게 성폭행 또는 구타를 당하는 것으로 끝이 나버린다.


물론 이게 현실일 것이다. 인신매매 당해서 잡혀와 강제로 매춘생활을 하고 있는 소녀에게 누가 탈출할 수 있는 길이 어딘지 친절하게 가르쳐주겠나. 이게 현실인 건 알지만, 참파에게 이미 감정이입이 되어있는 상황에서 탈출이 계속 좌절되고 참파가 처벌받는 것을 보려니 게임을 계속하기가 힘든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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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버스가 지나가는 틈에 감시원의 눈을 피해 뛰어야 한다거나 하는 '공략법'이 있기는 했다. 참파가 처음 잡혀왔을 때부터 주머니에 들어있던 실로 고향의 이름을 알아내고, 참파가 그곳으로 탈출한다는 해피엔딩이라고도 한다. (현실에서도 해피엔딩일지는 잘 모르겠다. 참파의 가족, 이웃들은 실종되어서 모종의 일에 강제로 종사했을 것이 거의 확실한 이 소녀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까. 참파의 마음의 병은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 아마 참파네 가족은 가난할텐데 무료 상담치료 프로그램이 제공될까...)


아무튼 나는 도중에 게임을 그만뒀기 때문에 그 해피엔딩을 보지는 못했다.




처음에 이 글을 준비하면서 '작가의 서랍'에 스샷들을 저장했을 때에는 단순히 이 게임을 소개할 생각이었다. 인도의 인신매매 현실 및 (전세계적인) 성매매의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는 핫한 게임이 있고 한번 플레이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그런 글을 쓰려고 했다.


쓰려고 했다.


그런데...


그 뒤로 쏟아지는 각종 성추행 뉴스들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안녕?
나는 네가 안전하게 있는거면 좋겠어.
왜냐하면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소녀가 성추행을 당하고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기 때문이야.
그녀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알고 싶니?

최근 소위 미투(#MeToo) 운동이 폭로한 우리나라 사회의 실상은 충격적이었다.

성추행이나 성폭행같은 성범죄 자체가 충격적인 것이 아니다. '개가 똥을 끊지'라는 우스갯소리가 적절할지는 모르겠는데, 모든 인간이 범죄를 끊는 것은 개가 똥을 끊는 것만큼이나 요원한 일이다. 인간이 있으면 범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범죄가 없는 세상은 우리 모두가 인격적 진화를 거듭해 수억 또는 그 이상의 세대를 거쳐 만들어나가야할 이상향이지 가까운 미래의 일이 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최근 폭로된 성추행들은 그게 범죄라는 걸 인지하고 숨어서 몰래한 것들이 아니라 공연히, 많은 사람들의 침묵과 방조 속에서 이루어져왔다는 점 때문이었다. 성추행을 처벌하도록 규정한 법과 그것을 집행하는 사법부가 있음에도 피해자 중 어느 누구도 경찰서로 달려가지 못했다.


심지어 이번 미투(#MeToo)의 기폭제가 된 사건의 피해자는 검사였다. 법질서를 수호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국가기관인 검사조차도 법질서 속에서 가해자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없다는건, 대한민국에서 부와 권력을 가진 극소수의 사람(성범죄의 피해자 중 여성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남성 피해자도 상당수 존재하고, 성범죄 자체가 특정 성별에 대해서만 행해지는 성격의 범죄는 아니기 때문에 성별중립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사람이 성추행 정도는 길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처럼 툭툭 털고 넘어가야만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런데도 '미싱'이라는 게임이 인도에만 국한된 별세계의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미싱'을 기획한 것은 레나 케즈리왈(Leena Kejriwal)이라는 인도의 인권운동가이다. 그녀는 이 게임을 통해 인도 서뱅골의 아동 인신매매의 실상을 알리려고 했다. 실제로 이 게임은 다양한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 게임을 통해 문제의식을 갖게 된 사람들의 자발적인 시위와 각국 정부와 비영리 단체의 지원, 경찰의 협조 등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소녀들의 의식 변화였다. 삼촌 등 남자 친척에게 순응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던 인도 소녀들이 게임을 통해 스마트하게 변화하는 것을 보았다고 레나 케즈리왈은 말했다.

(*레나 케즈리왈의 인터뷰는 http://www.etnews.com/20171217000001 참조.)


우선 소녀들은 이 게임을 통해 인신매매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게임 속 참파의 경우에는 그녀를 아는 사람에 의해 약을 먹고 납치된 것으로 보이는데, 알든 모르든 누군가 다른 사람이 주는 음료수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부터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납치되어 불행한 일을 겪게 된 경우라면 자살하거나 자신을 내버리지 말고,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용의주도하게 탈출 방법을 짜내야 한다는 것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지진이나 태풍, 화재와 같은 재난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피하는 것이 효율적인지 매뉴얼을 만들고 그 매뉴얼대로 실전훈련을 하는 것과 같다. 왜 우리는 재난 상황에 대해서만 매뉴얼을 만들고, 범죄 피해에 대해서는 매뉴얼을 만들지 않는걸까?


우리는 유치원에서부터 화재발생시 행동요령에 대해 배운다. 불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불이야'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비상경보장치가 있으면 비상벨을 눌러야 하며, 119에 화재발생을 신고해야 한다. 승강기는 위험하니 계단을 통해 낮은 자세로 물에 적신 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고 대피해야 한다. 화재 사고가 발생하면 우리는 신문을 통해 다양한 사례를 수집하고,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기도 한다. 이런 매뉴얼이 중요한 이유는 생사가 오가는 긴박한 순간에 고민없이 몸에 밴 대로 행동해서 목숨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범죄를 당한 경우에는 어떨까? 유치원에서 낯선 사람이 자신을 만지면 '안돼요', '하지 마세요'라고 거부하는 것 정도는 가르치지만 그 이후의 대처에 대해서는 매뉴얼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피해자는 성범죄라는 재난이 닥쳤을 때 수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1) 성범죄 현장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범죄 상황도 재난 상황과 비슷하다. 사람들은 보통 범죄를 당한 경우에도 화재나 지진이 발생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당황하고 어떻게 해야할 줄 모르는 상태가 된다. 회식자리에서 상사가 신입사원을, 혹은 교수가 학생을 옆자리에 앉히고 가벼운 성추행을 한다고 예를 들어보면, 접촉이 발생하는 순간 '아, 왜 이러세요. 손 떼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은 이 사람의 행위가 불쾌하지만 내가 공식적으로 불쾌해도 괜찮은 일일지를 먼저 고민하게 된다. 자기가 불쾌한 반응을 보여서 가해자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어떤 불이익을 받게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어처구니없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도 하게 된다. 그렇다고 참고 있자니 주위 사람들이나 가해자가 자신이 이런 성적 행위를 은근히 즐기는 문란한 여자로 보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도 된다. 그래서 피해자는 로드킬당하는 고양이처럼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폭행 현장에서는 어떨까. 어떤 전문가들은 그 자리에서 격렬한 저항을 하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은 범인을 자극해서 오히려 살해당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저항하기보다는 피임 기구를 이용해서 하자거나 아니면 장소를 옮겨서 하자는 식으로 범인을 달래면서 도망의 기회를 찾는 것이 낫다고 한다. 어떤 전문가들은 반대로 어린이들에게 '하지 마세요, 싫어요, 안돼요' 이렇게 외치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한때는 학교에서 성범죄를 당할 경우 도움을 요청하라고 호루라기를 나눠주기도 했다. 어떤 대응방식이 더 효과적인지 보통 사람들은 잘 알 수도 없고, 설령 안다 한들 평소에 꾸준히 생각하고 연습하지 않으면 위기 상황에서 그렇게 행동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2) 성범죄가 발생한 이후에는 경찰에 신고를 한다?


이게 가장 상식적이지만 피해자 입장에서는 뜻밖에 쉬운 결정이 아니다. 성추행을 당했다고 90%는 확신하지만 10% 정도는 확신이 없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지하철에서 누군가의 손이 성기 부분을 스쳐지나갔을 때 정황상 그 부위에 손이 닿을 이유가 거의 없고 그 사람의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보았으며 접촉 순간 성적인 불쾌감을 느꼈다고 하더라도, 성추행이 아닐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신고하는게 고민스러울 수 있다. 경찰에 신고했을 때 방금 저 사람의 손이 자신의 몸에 접촉했다는 증거를 어떻게 제시해야 할지도 고민된다.


성적인 불쾌감은 느끼지만 이게 법적으로 처벌되는 성추행에 해당하는지 잘 모르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회사의 상사가 신입사원의 셔츠 가슴 부분 주머니에 들어있던 목걸이 달린 신분증 카드를 꺼내 잡아당겨 카드를 확인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가슴을 직접 만졌다면 확실히 성추행이라고 하겠지만, 가슴에 손을 대지 않고 신분증 카드만 꺼낸 경우라면 성추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피해자는 불쾌감을 느끼지만 이게 경찰에 신고를 하면 확실히 처벌이 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성범죄를 당할 당시 또는 그 후에 당황해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거나 성범죄 전에 연인 사이거나 해서 객관적으로 성범죄가 아닌 걸로 보이는 경우에도 신고하기가 어렵다.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가 심한 정신적인 충격과 고통, 수치심 속에서 즉시 병원 또는 경찰서로 달려가 모든 증거물을 확보한 이후에야 비로소 몸을 씻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는 않을 것이다. 연인 사이라고 해도 일방이 거부의 의사를 밝혔음에도 강제로 성관계를 가졌다면 그건 성폭행에 해당한다. 그런데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달달한 사랑의 카톡을 주고받은 사이인데 합의하의 성관계가 아니라는걸 누가 믿어줄지 고민이 될 수 밖에 없다.


성범죄가 확실하다고 해도 가해자가 직업상, 사회생활상 심각한 불이익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거나 가해자를 고소하는 것이 조직에 누가 되는 경우라 압력을 받는 경우에는 신고를 할 수가 없다. 이번 미투(#MeToo) 사건의 검사들이 성범죄에 관한 법리와 법적 절차를 알고 있음에도 오랜 세월동안 법적 대응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물론 직장을 나와도 되고 언론이나 법적 수단을 동원해 투쟁을 할 수야 있겠지만, 아무 죄도 없는 피해자 입장에서는 왜 가해자 하나 때문에 자신의 커리어를 망치고 긴 시간 힘든 투쟁을 해야 하는지, 그렇게 해서 자신이 얻는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성범죄를 둘러싼 잘못된 관념도 신고를 망설이는데 한몫 한다. 우리는 어제 교통사고가 나서 다쳤다는 말은 공식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서슴없이 할 수도 있고 SNS에도 인증샷과 함께 올릴 수 있다. 그런데 성범죄의 피해자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 사회에 아직도 남아있는 그릇된 정조관념은 성범죄 피해자를 육체적으로 더럽혀진 사람처럼 인식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성범죄는 피해자의 고통때문에 쉬쉬한다기 보다는 피해자의 '명예'가 실추될까봐 감춰야하는 일이 된다. 그런 상황속에서 연인이나 배우자, 자식이 있는 사람이 가해자를 신고하는 선택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오히려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는게 성범죄의 특성이다. 피해자가 평소에 가해자 앞에서 잘 웃고 술도 자주 마시고 짧은 치마도 입은 적이 있다면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먼저 끼부려놓고 피해자인척 한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사람들은 피해자의 외모와 몸매도 궁금해한다. 피해자가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라면 사람들은 왜 돈 많고 권력있는 가해자가 수많은 젊고 예쁜 여자를 놔두고 그런 못생긴 여자를 성추행했겠냐, 사실은 성추행이 아니라 둘 사이에 뭔가 있는 것 아니냐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어떤 조직 안에서 가해자의 지위가 우월할 때 더 자주 발생한다.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신고할 때 이런 측면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3) 경찰에 신고를 한 이후 가해자가 처벌받기까지의 과정?


경찰에 신고를 하더라도 그 이후의 과정을 견디는 것도 피해자 입장에서는 쉽지 않다. 조사를 받으면서 피해 당시의 상황을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해야 하고, 충격받아서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있거나 횡설수설하게 되면 피해자가 오히려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몰릴 수도 있다.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을 받지 않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피해자가 성폭행을 당할 당시 두려움때문에 혹은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범인을 달래기 위해 충분히 저항하지 않은 경우 법원에서는 성폭행이 아니라고 볼 가능성도 있다. 가해자가 무죄판결을 받는다면 앞서 (1)~(3) 과정의 추가 피해를 모두 감내한 피해자는 가해자를 무고한 사람으로 몰리는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다.



이런 여러가지 두려움이 성범죄를 당한 피해자에게 닥쳐오면, 피해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민하다 그냥 덮고 넘어가는 선택을 하는 경우도 많다. 이미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은 피해자가 그 상황에서 추가적인 불이익을 각오하고 결단을 내리는 것은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성폭행이야 경우가 조금 다르겠지만 심하지 않은 성추행이나 성희롱 정도라면 그렇게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물론 성범죄와 관련해서 법원의 판결이 엄격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피해자의 진술이 중요하게 작용해서 성범죄와 관련한 무고도 많이 발생한다는 현실은 알고 있다. 사회적 인식도 바뀌어서 성추행이나 성희롱에 대해 단호하게 대응하는 조직도 많다는 것도 안다. 여기에서 쓴 내용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저런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번 미투 운동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아직 바뀌지 않은 조직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넘어간다면 성추행이나 성희롱 정도는 범죄로 여겨지지도 않고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분위기가 형성되어버린다. 이번에 미투 운동에서 충격적이었던 것은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수년간 성추행으로 처벌된 적이 있는 가해자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미투 태그를 달아 용감하게 사실을 폭로한 피해자들 본인도 범행 당시에는 이를 신고하지 못했다. 당한 피해자도, 피해자가 당하는 걸 본 사람들도 아무 문제제기도 하지 않고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는 상황에서 가해자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가해자가 그렇게 행동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아는 다른 예비 가해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어떤 아이가 매일 어떤 가게에 들어가서 사탕을 훔친다. 그런데 주인은 사탕을 훔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방치한다. 다른 손님들도 아무도 사탕을 훔치는 것으로 뭐라하지 않는다. 그럼 그 아이는 사탕에 물리지 않는한 계속 훔치지 않을까? 아니, 나중에는 훔친다는 생각조차도 없어지지 않을까?


그래서 이런 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가해자에게 공개적으로 사과를 받거나 법적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그 선택권은 피해자에게 있겠지만, 이번 미투 운동을 보면 사건을 덮더라도 피해자들의 마음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성범죄라는 재난을 당한 피해자는 수치심과 두려움 속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그 자리에서 대응을 하고 사과를 요구하거나 고소하거나 덮고 넘어가거나 하는 후속 조치를 결정해야 한다.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도 찾아야 한다. 게임 '미싱'에서 참파와 같은 입장에 놓인 것이다. 이럴 때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좋은지 미리 연습할 수 있는 '미싱'과 같은 게임이 있다면 어떨까?


'미싱'에서 참파가 성범죄 피해를 입고 자살하고 싶어할 때 미나가 해주는 것처럼 성범죄가 피해자가 수치스러워하고 숨겨야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고, 무엇이 성추행이나 성희롱에 해당하는지, 그 자리에서 어떤 대응을 선택할지, 그 후에 어떤 조치를 선택할지, 어떻게 상처를 치유하면 좋을지를 미리 연습해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실제 자기가 선택을 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경우의 수를 체험해보면서 예비 피해자는 자기가 그런 상황에 놓였을 때 가해자에 대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선택이 가장 자신의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는지 생각해둘 수 있을 것이다. 험한 길을 선택한다면 마음의 준비도. 그리고 실제 상황이 닥쳤을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상황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이런 게임을 하면서 피해자가 이렇게 대응해서 자신이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행동을 조금 더 조심하게 되지 않을까.


학교에서의 성교육 매뉴얼로 제공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역시 가장 효과적인 것은 게임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고 종이 매뉴얼이나 일방향의 수업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미싱'이 게임으로 만들어지게 된 이유와 마찬가지로.


성범죄의 예방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대책들이 있겠지만, '미싱'이라는 게임을 하면서 게임이라는 접근법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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