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울증으로 힘들더라도 웬만하면 악착같이 직장을 다니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우울증은 나쁜 놈을 만나도 악화되지만, 반대로 아무도 안 만나도 심해진다. 돈은 많을수록 좋다. 그래야 정신과 가서 약도 처방받고 상담도 받고 맛있는 것 먹고 기분전환하러 여행도 갈 수 있으니까.
정신과 약이 보험 적용되면 저렴하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통장에 최소 50만원은 들어있을 때의 이야기 아닐까 싶다. 부모님 지갑에서 티나지 않게 만원짜리 한두장씩 가져와 모아두었다가 사용해야 하는 찐백수 입장에서는 (부모님이 정신과에 굉장히 부정적이어서 지원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최초의 검사비며 약값이 막연히 두려울 수밖에 없다.
30대 후반까지 수험생활하는 백수 신분으로 우울증을 앓아온 나는 직업도 없고 경제적 자유도 없다는게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쭈그러뜨리는지 잘 알고 있다. 카페에서 녹차라떼 한잔을 마시는게 굉장한 사치였던 시절에는 마음도, 자존감도 한없이 작았었다.
그래도 우리나라가 굉장히 발전했다고 느끼는 것이... 무료 혹은 재료비 정도만 내고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정말 많았다. 심리상담부터 마음치유를 위해 도움되는 프로그램들, 취미 원데이 클래스 등등. 그런 것들을 이용해서 열심히 놀았다. 그때는 당장 내일 죽을지 말지를 생각해야 하는 때였으니까 오늘 살아남는게 중요하지 직업까지 생각할 여력은 없었다.
그 결과 기나긴 우울증의 터널을 거의 지나오긴 했는데, 그때부터 문제가 생겼다.
우울증으로 30대 후반까지 아무 직장도 다녀보지 못한 사람은 도대체 뭘 해서 먹고 살 수 있을까?
취준 중 참 막막했던 날, 친구와 함께했던 카페
나에게 남은 것은 30대 후반이라는 나이, 우울증 및 은둔형 외톨이 이력, 취직 경험없음(약 3개월 정도의 경력 제외), 죽네사네 하며 어거지로 다녔던 대학원 졸업장, 아마도 많이 부족할게 틀림없는 사회성, 통장잔고 0원, 학자금 대출이었다. 우울증이 아니라도 충분히 절망스러웠다.
어쨌든 살기로 결정했고, 살려면 뭐라도 해야했다. 2021년 1월쯤 서울시 뉴딜 일자리를 찾아봤다. 처음에는 뉴딜 일자리는 무경력자도 할 수 있는 일들일 줄 알았는데 관련 전공이나 경력을 요구하는 곳이 많았다. 수많은 일자리 중에 내가 지원할 수 있는 곳은 한정적이었다.
우울증 기간 중에 의료사협에서 마을활동을 경험해봤고 우울증 치유에 공동체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걸 배웠다. 그래서인지 '마을 공동체'에 관한 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그쪽이라면 뭔가 자기소개서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분야 일을 해보고 싶기도 했다.
3곳에 지원했는데 결과는 모두 불합격이었다. 자존감이 지하 100층쯤 있을 때라 면접에서 많이 떨고 말도 더듬고 했었다. 진심과 간절함은 있었지만 내가 그곳에 필요한 사람이라는걸 뒷받침해줄 경험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하시겠어요?"와 같은 질문에 "전에 어느 직장에서 비슷한 경험이 있었는데 저는 이렇게 해결했습니다."라는 대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면접용 검정 구두에 뒷꿈치가 쓸리면서 돌아오는 길에 이 나이 먹도록 경력이 없는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내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의 나라면, 우울증과 은둔형 외톨이 생활로 30대 후반, 40대에 첫 취직을 하려는 사람을 위한 사회적 지원은 왜 없는 거냐고 묻고 싶다. 특히 마을 공동체, 사회적 경제 기업 등 이윤보다 사회적 가치를 보다 생각하는 곳들에서는 나같은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좀 만들어줄 수 있는 것 아닐까? 아무튼 그때는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
별거 아닌 것 같아도 뭐라도 하면 그게 기회가 되더라는...
허물어져가는 동네에서 누군가 가꾸고 있는 꽃밭
그러던 중 구청 홈페이지에서 주민자치회 지원관 채용공고를 보게 되었다. 주민자치회? 마을공동체! 꼭 해보고 싶었지만 하필 경력직이었다. 1년 경력이 필요했는데 관련분야에 마을활동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화해서 물어보니 의료사협에서의 활동 경력도 인정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지난 3년치의 마을활동들을 최대한 그러모아 자기소개서를 쓰고 활동증명서 같은 것들도 첨부해서 지원서를 냈다.
면접에 가는데 이번에는 정장 대신 면바지와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위에 정장 스타일 코트만 걸쳤다. 풀정장을 입고 면접에 갔다가 다 떨어진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도 또 그럴까봐 부모님 보기가 좀 그랬다. 떨어질까봐... 이 면접에 올인하고 있다는걸 보이는게 창피한 마음이었다.
면접 분위기는 좋은 듯 안 좋았다. 지난번에 떨어진 곳에서 물어봤던 질문을 이곳에서 다시 받았다. 그때는 버벅거리고 제대로 답을 못했다. 구두 끌고 돌아오면서 이렇게 말할걸 그랬다고 후회했는데 그렇게 정리해둔 대답을 이번에는 할 수 있었다. 거기까진 좋았고 주민자치회 구성에 관한 지식을 묻는 질문, 주민자치회에 관한 책을 읽은게 있냐는 질문에는 모른다/아니오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이번에는 간절함을 어필했다. 우울증에 관해 솔직하게 이야기했고, 마을공동체가 치유의 계기가 되었고 그래서 주민자치회에서 마을공동체를 촉진하는 일을 꼭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게 공익 분야에서 처음으로 도전하는 일인데 기회를 달라고 진심으로 부탁도 했다.
그 진심이 통했는지 합격했고 2021년부터 약 2년간 주민자치회에서 지원관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9개월 계약직, 첫 실업급여, 다시 9개월 계약직, 두번째 실업급여. 그리고 지금은 주민자치회를 떠나 비슷한 분야의 좀더 좋은 곳으로 이직을 했다. 아직 출근은 한달정도 남았지만.
아무 생각없이 했던 마을활동이 첫 취직을 위한 경력이 되어주었고, 낮은 급여에 불안정한 계약직이었지만 2년간의 근무가 또 좋은 곳으로의 이직을 위한 경력이 되어주었다.
마을엔 기회가 있다 그리고 있어야 한다
혼자 눈길을 걸어가는 느낌
우울증 경험자, 은둔형 외톨이에게는 다시 사회로 돌아오는게 쉽지는 않다. 경력이 없거나 있더라도 오랫동안 단절된 경우에는 취직 자체가 어렵다. 또 사회생활과 근무에 적응할 시간도 필요하다. 나는 마을에서 그 기회를 얻었다. 가깝고 느슨하며, 잠시 궤도에서 이탈한 사람도 받아들여줄 만큼의 여유가 있는 마을. 특별한 경력도 없고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다면 동네에서 취미생활이든 비건 모임이든 뭔가를 조그맣게 시작해보는건 어떨까? 일단 가보면, 직업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눈에 보일 수 있다.
덧붙여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우울증으로 휴업중이거나 은둔형 외톨이 생활 중인 청년들, 중장년들을 위한 마을 일자리 만들기를 제안하고 싶다. 당장 취업에 도움이 되는 기술을 배우는 것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공동체 안에 소속되어 사람들과 조금씩 교류하고, 함께 연대해서 보람있는 일을 하고, 여유 속에서 일상생활을 차곡차곡 쌓아나갈 수 있는 그런 일자리도 중요하다. 집 가까이, 마을에 그런 일자리가 많이 생긴다면 사회로 돌아오는 길이 조금 수월하게 느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