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잘하지 않아도 돼

약을 안먹어도 된다는 위로

by 오렌지나무
행복한 밥상

오늘은 점심식사에 초대받아 다녀왔다. 마을 공동체 활동을 하면서 알고지낸 분이 직접 밥상을 차려주고 싶다고 하셔서 맛있게 먹고왔다. 성인이 된 다음에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아 집밥을 먹고온건 두번째인데 기분이 따뜻했다.


초대해주신 분, 그리고 같이 초대받은 분들과 함께 요즘 같은 단체에서 일을 하고 있다. 나는 봉사활동(?)으로 하고 있는데 사실 조합원이니까 봉사는 아니고 내 일을 내가 한다는 개념에 가깝다.


다들 작은 일에도 칭찬해주고 고마워해주시니까 나도 점점 더 열심히 하게 된다. 오늘도 설문조사 자료를 가져와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


사실 요즘 좀 많이 바쁘다. A단체 총준위/추진단 회의들과 총회 준비, B단체 회의/선언 준비, 니트컴퍼니 활동, 개인적인 약속들, 은둔형 외톨이 활동가 양성교육과 실습 프로그램 짜기, B단체 공부방 참여, 다음주 첫 출근, 독서모임 발제 등등.


일과 약속이 몰릴 땐 숨이 막히는 것 같고 가슴 답답할 때도 있다. 오늘 아침이 좀 그랬다...


대충 노노, 디저트는 예쁜 접시와 잔에

그래도 사람이 좋으면 힘에 부쳐도 함께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안그래도 에너지가 부족해서 시간낭비하는걸 싫어하는데, 지금 하는 일들은 다 하나하나 사람들이 진심이고 좋아서 하게 된다. 우울증 치유에도 큰 도움이 되고.


아무튼, 좋은 사람들과 즐겁고 편안하고 맛있는 점심식사를 했다. 4시에는 병원 예약이 있고 6시에는 친한 언니랑 저녁 약속이 있어서 3시 반쯤 일어섰다. 함께 식사한 분과 버스를 타고 오는데 그분이 어딜 가냐고 물어보셨다.


ADHD약을 타러 병원에 간다고 대답을 했다. 2020년에 시험을 준비할 때, 우울증이 나은 것 같은데도 공부가 너무 안돼서 병원에 갔다. 검사 결과 심한 ADHD라고... 어떻게 대학에 갔는지 신기할 정도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때 약을 먹고 효과가 있었는데 시험에 합격할 정도는 아니었고 다른 쪽으로 취직하게 되면서 약을 끊었다. 새 직장은 비교적 단순한 일이라 약까지는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 올해 좀더 전문성이 필요한 곳으로 이직하고, 출퇴근 거리도 멀어지고, 대학원 진학도 계획하고, 외국어랑 통계 공부도 시작하고, 그러면서 마을 공동체 활동들까지 하려니 아찔했다. 그래서 다시 약을 찾게 됐다.


내 대답을 듣고 그분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는 아이가 한국에서 ADHD약을 먹다가 발리로 가서부턴 안먹어도 잘 살게 됐다고. 그 이유는 발리에서는 한국보다 느리게, 적게 해도 괜찮아서 약을 먹을 필요가 없어서라고.


그러면서 나도 몰랐던 내 마음을 콕 집어 이야기하셨다. 여기 단체 일도 잘하고 싶고 직장에서 일도 인정받고 싶고 다 잘하고 싶어서 약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거 아니냐고.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잘하지 않아도 돼. 대충 해. 안해도 큰일 안나."


그분이 주신 선물

나는 항상 내가 좀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남들은 워킹맘도 감당하고 직장 다니면서 대학원도 다니고 외국어 공부도 하고 미친듯이 열심히 사는데 나는 폰 중독에 빠져있으니까... 많이 한심하고 인생을 낭비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정상인(?)들을 따라가려면 약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내가 정상이고 충분히 잘 살고있는 거라면...?


일단 예약된거라 약을 지어오긴 했는데 생각이 좀 많아졌다. 묘하게 위로받은 기분이 든다. 이래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만나야 되나보다. 나한텐 너무 당연한게 누군가한테는 이상해보일 수 있으니까.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새로운 눈으로 나를 다시 보게 됐다.



나 이미 잘 살고있는 거였어...


약을 먹으면서 일에 나를 맞추는건 좀 이상해.


그냥 내 한계를 넘는 일은 거절하는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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