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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Sep 01. 2023

인생을 비워내다


우울증과 진로에서의 실패로 인생에서 비워짐을 한번 경험해봤다. 실패는 힘들었지만, 동시에 내가 해야만 할 것 같았던 일들이 내 인생에서 쑥 빠져나갔다. 실패해서 할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안해도 되게 되었다.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듣고 싶었던 말이다.

"괜찮아, 안해도 돼."

 말이 그렇게 간절하고 고마웠다. 반드시 해야 하고 못하면 죽어야 되는게 아니라, 원하지 않으면 안해도 된다는거... 안해도 난 당당하게, 나답게 살 수 있다는거...

믿을 수 없었지만 너무나 믿고 싶었다.


그리고 어느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살아내고 있었다.


평일 대낮에, 비가 그친 늦여름의 길을 걷다가 생각했다. 안해도 돼서 편안하다는걸. 비워지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 시간에 이곳을 이렇게 아무 생각없이, 즐겁게 걷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비워냄'은  정리, 마음 정리에만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었다. 인생 정리에서도 꼭 필요한 거였다.


인생에서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자원들은 한정되어 있다. A를 선택하면 B를 내려놓아야 하는게 인생이다. 아기라는 행복도 갖고 미혼의 자유로움도 갖기는 어려운 것처럼. 우리는 좋다는걸 다 짊어지고 인생길을 걸어갈 수가 없다. 하나를 손에 쥐려면 하나를 내려놔야 한다.


그래서 나답게 살라는 말이 있나보다. 다 가질 수 없고 다 이룰 수 없다면, 내가 진짜 원하고 나에게 잘 맞는 몇가지에 집중하는게 효과적이니까.



비워냄은, 그 공간을 다르게 활용하기 위한 거라는걸 이제는 알 것 같다.


빈 공간 자체를 즐기는 것도 좋다. 누군가는 지금의 내가 재능을 썩히고 있다고, 많은걸 쌓아놓고 다 무너뜨려 버렸다고 안타까워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작 나는 재능을 안써서 편하다. 복잡하게 머리 쓰는 일이 없어서 즐겁고, 칼퇴하고 나면 일 생각이 하나도 안나서 좋다. 모르면 모른다고 할 자유가 있으니까 내 분야에서 전지전능(?)해지려고 뾰족하게 나를 몰아세우며 공부하지 않아도 돼서 행복하다.


강요된 목표가 없어서 편안하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느라 나를 갈아넣지 않아도 돼서 좋다. 졸리면 자고 아침이면 일어나 기계적으로 단순하게 사는 이 삶이 만족스럽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비오는 날 오후 1시의 풍경들을 보는 것도 기분이 좋다. 먹물로 그려 하나씩 오려붙인 듯한 저 너머의 산, 비와 구름 그림자에 젖어든 경복궁 돌담들, 비를 피해 만난 '음과 양'이라는 어느 작품들, 보슬비처럼 가벼이 흩날리던 햇빛과 물 웅덩이... 그 모든 것이.


인생이 텅 비었다고 해서 불행한건 전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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