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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Jul 14. 2019

최악의 순간 나를 위로해준 것들

-이야기를 시작하며

  

 4년간 정신분석을 받으면서 수많은 꿈을 꾸었다. 

 내가 푸른 드레스를 입은 여신으로 나오는 꿈이나 세계적인 배우가 된 꿈, 재속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불사조, 전쟁의 승리를 알리는 화려하게 장식된 코끼리의 포효, 힘 있는 동물과 아름다운 식물들, 온갖 신비한 존재들이 무의식의 깊은 바다 속에서 나의 삶이 지속되고 꽃 피우기를 응원해주었다. 

 좋은 꿈들만 꾼 것은 아니었다. 어두운 귀신같은 존재들, 역겨운 시궁창, 들끓는 벌레들, 나에게 상처를 준 과거의 사람들, 나 자신의 한 측면이라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열하고 유치하고 우스꽝스러운 존재들도 대거 등장했다. 

 꿈에 나타난 모든 이미지는 우리가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못할 뿐, 다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처음에는 좋은 이미지는 당연히 내 모습이라고 쉽게 인정하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이미지는 수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융 심리학에서 말하는 내 인격의 부정적인 측면인 그림자를 통합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피터팬에서 웬디가 잃어버린 피터팬의 그림자를 바느질로 꿰매주는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때로는 나조차 외면하고 싶은 모습인 나의 그림자는 인생의 어느 모퉁이에서 나타나 삶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림자는 내 마음 속 많은 자아 중에 억압과 외면으로 인해 성장하지 못한 인격의 열등한 측면으로 내 안의 우등한 자아가 왕따 시킨 아이라고 할 수 있다. 외면한 친구인 나의 그림자는 돌돌 말아서 서랍 깊숙이 넣어둔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느질로 꿰매어서 일체를 이루듯이 함께 가야할 친구다. 그림자는 모른 채하고 무시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사는 방법을 찾을 때 더 이상 내 삶을 방해하는 훼방꾼이 아닌, 도움을 주는 더 없이 좋은 친구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틈만 나면 지도 위에 얼룩진 그림자를 보면서 놀라고, 내 우주의 블랙홀에 쉽게 빨려 들어가기를 수 없이 반복했다. 분석 초기에는 거대한 아메바처럼 증식된 커다란 환상으로 나의 신화를 쓰고야 말겠다는 투지로 불타올랐다. 

 나 자신의 조화로운 세계를 만나지 못함으로 인한 불균형의 세계에서 수 없이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할 때, 홀연히 떠오른 꿈은 성냥개비 인간이었다. 이 꿈은 내가 더 이상은 할 수 없다 싶을 만큼 큰 절망에 빠진 날 꾼 꿈이었다.

 나의 위대한 측면, 즉 상위 자아인 내가 나의 가장 힘없고 나약한 모습으로 형상화된 성냥개비 인간을 조종하고 있었다. 성냥개비로 만들어진 가느다란 발과 다리에는 투명한 줄이 연결되어 있어 상위자아인 내가 조종을 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내 안의 성냥개비 인간은 부러질 듯이 연약한 다리를 힘차게 들어 올려서 자기 몸집보다도 더 큰 계단을 하나씩 올라갔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깨달았다. 여신이나 배우, 불사조와 용 보다 더 위대한 최고의 꿈은 최악의 순간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내 안의 성냥개비 인간이라고. 그리고, 무력한 나 자신의 능력으로 만들어내는 신화가 아니라 하느님 연출 속 내 배역에 최선을 다하는 배우로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임을, 그 배역은 하느님 나라의 섭리를 이해하는 지극한 마음에만 주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일어나서 어제와 똑같이 묵묵히 일터로 나갔다.


 유튜브에서 한 책 쓰기 강의를 보고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사회적으로 잘 알려진 작가이자 행동가인 유튜버는 ‘솔직히 말씀드려서 책은 성공을 하고나서 쓰는 것이지, 성공도 안했는데 써봤자 사람들이 공감할 수 없다’ 는 식의 말을 했다. 먼저 성공부터 하고 그 경험담을 써야 책으로서의 가치를 발할 수 있다는 식이었다. 성공은 거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성공의 밑바탕에는 숱한 노력과 극복의 이야기들이 있고, 마침내 그에 따른 결과로써의 열매를 나눌 수 있다는 말이 당연하기도 하다. 그 분은 자신의 경험에 기대어 하는 진솔한 말일 수 있고, 그런 그의 조언에 도움을 받는 많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 사회적 ‘성공‘을 부추기는 그런 분위기가 사람들을 더욱 위축시키고, 경쟁 구도를 만들고,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과대포장과 과장된 감정과 거짓을 촉발시킬 수 있다는 경각심이 들었다. 


 심리학 박사가 아닌 상담을 받은 사람, 유치원 원장이 아닌 유치원 근무 경험자, 화가가 아닌 그림을 그리는 사람, 작가가 아닌 글을 쓰는 사람, 가르치는 사람이 아닌 나의 고통을 공유하는 사람……. 

 인생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명함을 파고 잠시도 쉬지 않고 종횡무진 땀을 흘려 일을 했음에도 세상에서 인정하는 확실한 전문가로 굳건히 뿌리내리지 못한 실패 프로그램을 어떻게든 포장해서 그럴 듯하게 재표출 하고, 마침내 성공담으로 만들어내고 말리라는 투지도 내 그림자의 아픔을 이해하면서 한풀 꺾는다. 

 실패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반드시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이름붙이기를 그만두고 그저 살아가기를 선택할 때 나와 한 번 더 화해하고 조금 더 친해질 수 있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의 가면이 무엇이든지 그것에 따라 자신감을 얻거나 절망하지 않고 꾸역꾸역 내 이야기를 써 나가겠다고. 살아가겠다고. 기뻐하겠다고.


 이 글들의 목차를 이루는 단어들을 살펴본다.

 행복한 청소부, 앵두낙엽버섯, 고구마, 채셔 고양이, 천사. 별, 전나무, 기러기, 꿀벌, 아이들, 사과, 원숭이……. 작고 하찮아 보이는 이 단어들은 최악의 순간 나를 위로해준 것들이다.

 인간의 소명은 자신의 기쁨과 세상의 요구가 만나는 곳에 있다고 했다. 

 지금 나의 가장 큰 기쁨은 최악의 순간 뿐만 아니라 최고의 순간 까지도 건너서 다시 일상의 호흡으로 돌아오는 일이다.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그저 내가 되는 일이다. 이 글들은 그 노력의 일부이다. 

 그 기쁨의 일어섬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한걸음 더 균형의 세계에 진입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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