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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Jul 14. 2019

별이 들려준 이야기


 인천 공항을 빠져나간 해외 여행객이 사상 최대라는 보도가 잇달을 무렵, 내 친구들은 자신을 찾기 위해 인도, 스페인 산티아고, 티벳 다람살라로 갔고, 나는 좀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이 책은 그 여행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 곳은 내 발밑이다. 우리의 발밑에는 다른 시대, 다른 공간이 있다. 긴 여행 끝에 피곤하고 힘든 일에 지쳐 돌아와 쉬는 중에 이 모든 이야기를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험난한 여행길에서 보고 배운 귀한 것들을 나와 같은 고통을 가진 사람들과 미래의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들은 과거, 유치원에서 같이 근무했던 동료 교사들과 어린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었다. 시간적으로는 십여 년 전, 의식적으로는 지금 보다 미성숙했던 그 때의 수많았던 질문들에 대해 삶이 가르쳐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오랜 세월 생활 글쓰기를 해온 습관으로 어느 정도의 글쓰기 근력은 있다고 생각했고, 온몸으로 한 경험이 많이 있으므로 글이 쉽게 잘 써질 것으로 여겼다. 막상 책을 쓴다는 생각으로 글을 쓰자니 미로 속을 헤매 다니면서 보고 들은 신비한 이야기들을 나의 언어로 표현해 내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마치 구슬과 실이 많이 있어서 그걸 끼우기만 하면 될 것 같았는데 막상 끼우기 시작하니까 구슬에 비해 실이 굵어서 실을 새로 마련해야 한다거나 하루 종일 끼웠는데 물러나서 보았을 때 배열이 마음에 안 들어서 빼내고 다시 시작한다든가 하는 시행착오를 수없이 반복했다. 재미있을 것만 같았던 구슬 끼우기가 힘들게 느껴지기 시작하자 처음 책을 쓰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의 설레임은 ‘내가 할 수 있을까?’, ‘내가 해야 될까?’ 하는 의심과 두려움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뜨거운 마음이 올라왔을 때는 금방이라도 다 써낼 것 같다가도 거의 다 쓴 것을 몇 번이나 마음이 바뀌어서 다시 고쳐 쓰느라 지쳐가고 있었다. 

 어린왕자가 자신의 작은 별을 떠나 지구에 와서 수많은 장미를 보면서 느꼈던 기분과 비슷한 것이었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다른 꽃들에 취해있다가도 내 장미를 기억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가 물을 주고, 바람을 막아주고, 벌레를 잡아준 꽃, 내 장미를 피우지 않고는 내가 나 일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노래도 잘 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엄마인 내 눈에는 잠재력으로 가득한,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딸아이가 내가 하고 있는 생각과 같은 말을 했다.

 “세상에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한다고 되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목구멍 까지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세상에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 많다 해도 이 세상에 너는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야. 그러니 너의 작품도 그런 거야.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목구멍 까지 차오른 뜨거운 것을 내 뱉으려다가 삼켰다. 그 뜨거운 것은 나에게 먼저 적용해야 할 말이었다. 알면서 안하는 건 모르는 것과 같은 것이고, 내가 모르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너는 왜 니가 꿈꾸는 대로 하지 않니?”

 이 말은 미하엘 엔데의 소설『끝없는 이야기』에서 어린왕녀가 주인공 바스티안에게 하는 말이다. 바스티안은 엄마가 돌아가시고 말없는 아빠와 둘이 사는 아이로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등 일상에서 아무런 즐거움을 못 느끼고 지낸다. 우연히『끝없는 이야기』라는 책을 읽고, 위험에 처한 환상계를 구하러 책 속으로 들어가는 모험을 겪는 이야기이다. 바스티안은 책 속 주인공 아트레유의 영웅적 행동에 대해 마치 자신인양 감정이입이 되지만, 위기에 처한 환상계는 책 속의 이야기일 뿐이므로 자신이 어떻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환상계가 무너지기 직전에 어린 왕녀가 눈물을 흘리면서 외친다. 

“너는 왜 니가 꿈꾸는 대로 하지 않니?” 

그때서야 바스티안은 이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인 것을 깨닫고 소리친다.

“내가 할게!”

 어린 왕녀가 바스티안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부탁하는 모습에서 나의 천사가, 나의 하느님이 나를 보시고 내가 딸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처럼 목 까지 차오르는 안타까움으로 지켜보고 계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할게!”

나의 어린 왕녀에게 소리쳤다. 내 신화 속 환상계가 위험하다는 것을, 그 세상은 나만이 구할 수 있다는 것을, 내 신화의 주인공이 나라는 것을 더 이상 모른 채 할 수 없었다.


 긴 시간을 보내면서 나의 이야기들은 바닥에 깊이 가라앉았다가 또다시 수면 위에 떠오르기를 반복하며 완성을 요구하는 미해결과제가 되었고, 나는 보다 엄정한 태도로 나의 과제를 떠안기로 했다.

 미하엘 엔데의 또 하나의 보석 같은 소설 『모모』에 나오는 이 한 문장이 머뭇거리는 내 등을 다시 한 번 힘차게 떠밀었다.

 ‘이제 모모는 깨닫게 되었다. 이 세상에는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없으면,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파멸에 이르는 그런 보물이 있다는 사실을.’

이어서, 모모의 질문에 대한 호라 박사님의 답변을 읽으면서 그동안 왜 그토록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싶어 하면서도 머뭇거렸는지도 이해하게 되었다.

“별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하는 건 괜찮나요?”

“괜찮지, 허나 해 줄 수 없을게야.”

“왜요?”

“그러려면 우선 네 안에서 표현할 말이 자라나야 한단다.”

“정말 그러기를 바란다면 우선 기다릴 수 있어야 해.”

“기다린다는 것은 태양이 한 바퀴 돌 동안 땅 속에서 내내 잠을 자다가 드디어 싹을 틔우는 씨앗과 같은 거란다. 네 안에서 말이 자라나려면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게야, 그래도 하겠니?”

 나는 말이 자라나기를 기다려 별이 들려 준 이야기를 하겠다고 스스로 약속했다.


 그 때가 언제쯤일까 조바심을 내다가 또는 모든 것을 잊어버린 듯이 지내다가 이제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 ‘그 때’를 알고자 했을 때, 예수님께서 일러주셨다.

 “무화과나무를 보고 배워라.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된다.”

 그 말씀을 간직하고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맞았다. 별들의 이야기를 들었어도 추운 겨울이 따뜻하지는 않았다. 봄이 오고 여름이 갔다. 다시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다. 여러 번의 겨울을 보낼 때 마다 별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새롭게 기억해 냈고, 이제 더 이상 춥지 않았다.

 그 때와는 다른 봄, 벚꽃이 떨어질 때, 하나의 별을 바라보면 그 옆에 별이 보이고 그 옆에 별을 보면 또 다른 별이 있고,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볼수록 수많은 별들이 촘촘하게 빛났다. 하나의 단어에서 연결되고 이어지면서 조용히 자라난 말들이 쏟아졌다. 

무화과나무가 말했다. 

 “지금이야!”

 반짝, 두려움이 다시 설레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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