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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정옥 Feb 15. 2021

양말 한 켤레의 은밀한 이야기

 이 이야기는 호텔에서 룸 메이드로 일했던 1년 동안 겪은 일이다.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당장 할 수 있는 일인 호텔 룸 메이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청소 일이기는 하지만 침대와 비품들을 보기 좋게 세팅한다든가, 고객의 불만 사항이 없도록 정확하게 처리하는 등 나름 섬세한 기능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처음엔 기억해야 할 것도 많고 근무 시간 내내 끊임없이 몸을 움직여야 했기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바빠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또한 정해진 시간 내에 많은 일을 끝내야 하는 업무의 특성상,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질문을 하거나 말을 하지 않고 눈치껏 움직이는게 미덕인 분위기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말이 별로 없는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도 오직 느낌으로만 감지되는 부정적인 기류가 느껴졌다. 사람들이 간식을 싸와서 일을 마치고 나눠 먹는 자연스러운 상황이었고, 뭘 잘 모르는 초보자일 때는 당연히 그렇게만 보였지만 사람들에 대해 파악이 되면서 그것이 단순한 휴식의 시간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시간에 모종의 정치적인 이야기가 오고갔다. 

 누가 로커에서 스케줄러에게 돈 봉투를 주는 것을 봤다든가, 아침에 일찍 와서 선물이나 간식을 준다든가 하는 예민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렇게 돈 봉투를 주거나 스케줄러와 술자리를 가지면 다음 달 스케줄이 바뀐다는 것이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도록 일을 많이 주거나 비교적 업무가 편한 층에 가게 되고, 사소하게는 식권이나 자기가 받은 뇌물을 나눠 준다는 식이었다. 소장도 모르는 척하면서 앞에서는 바른말만 하지만 뒤에서는 스케줄러랑 나눠 먹는다는 말도 했다. 스케줄러가 실질적인 소장이라는 것이었다. 즉, 스케줄러의 말을 잘 안 듣거나 비협조적인 사람에게는 보복성 스케줄을 주어서 압박을 하고, 불복하는 사람은 결국 힘들어져서 그만두게 되는 식이 이곳의 암묵적인 시스템이었다. 

 

 힘겨운 적응 기간을 마치고 어느 정도 여유가 있기도 한 무렵이었다. 회사에 서 ‘턴다운’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났다. 턴다운은 2시간 늦게 출근해서 방 정비를 적게 하고, 투숙객의 방을 점검하면서 타월 등을 보충하는 세컨드 서비스를 말한다. 턴다운은 많은 인원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같이 일할 동료가 없다는 점과 투숙객을 응대해야 하는 상황에 대한 부담으로 지원자가 없었다. 이 일을 오래 할 생각도 아니니 나는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은 단순 호기심으로 턴다운을 지원했다. 스케줄러는 너무나 반가워하며 바짝 가까이 다가왔다.

 “니는 잘 할 거야. 내가 스케 줄 잘 줄 테니까 니는 일만 야무지게 하면 된다. 소장님도 널 좋게 보고 있으니까, 알겠제?” 

 그냥 회사에서 필요한 자리가 비어서 지원한 것뿐인데, 들은 소문 때문인지 스케줄러의 말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나 말고는 신청자가 나타나지 않아서 나와 주임 한 명, 이렇게 두 명이 턴다운 업무를 맡게 되었는데 주임 대여섯 명이 돌아가며 투입됐기 때문에 나는 매일 다른 주임들과 일을 하게 되었다. 

 그때 또 생각지 않았던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메이드들이 하던 말보다 더 내밀하고 오래된 비리들이었다. 주임들은 평균 10년 정도 그곳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더 많은 일들을 겪었을 터. 하나의 부정적인 사례가 나오면 그와 비슷한 과거의 사례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거기에는 돈에 더해서 가장 내밀한 문제일 수 있는 성 문제 까지 있어서 충격이 적지 않았다. 과거에 소장이나 과장, 부장 등 관리직 직원들과 잠자리를 한 메이드나 주임이 있었다는 소문이었다. 단순 불륜처럼 말했지만 권력형 성 문제로 보였다. 그런 일은 소위 정·재계의 권력층에서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찌 보면 가장 밑바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이곳에도 결국 돈보다 더 내밀하게는 성이 있었다. 돈과 성은 인간의 욕망 밑바닥에 있는 가장 질기고 원초적인 힘이구나 싶었다. 주임들의 그 기억들은 공적으로는 회사의 부정부패 및 비리의 산물이었고, 한 개인에게는 상처로 남아있었다. 


 스케줄러는 나만 보면 파이팅을 외쳤다. 또 한번은 은밀하게 다가와 어깨에 팔을 걸치고서는 나는 구석으로 끌고 갔다. 

 “니 스케줄 짜는 거 배워 볼래? 일찍 나오는 거 말고 다 괜찮다. 월급 말고 생기는 것도 있고. 니는 여기서 열심히만 하면 내가 계속 밀어줄 거니까 내 말 만 들어라. 소장까지 바라보고 일해라. 알겠제?” 

 턴다운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되었으니 좀 더 있다가 생각해보겠다고 하고 빠져나왔지만 역시 찜찜했다. 스케줄러는 늘 투지로 가득 차 있었다. 그 힘을 바라 보고 스케줄러와 운명을 같이하려는 메이드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분위기였다. 그것은 아침에 간식과 선물을 주려고 서는 줄이 길어지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턴다운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나 어느덧 급여일. 지금까지 받았던 급여 중 최고로 높은 급여를 받았다. 기분이 좋았다. 

 여느 날과 같이 방을 정비하고 있는데, 스케줄러에게서 전화가 왔다. 

 “니 이번 달 월급 제일 많은 거 아나? 10년 차 선배들도 제끼고 제일 많다. 내가 신경 써서 그런 건 줄 알제? 그래, 일 잘하고.” 

 생각지도 못한 내용에 뭐라고 말이 나오지 않아 대충 얼버무렸다. 전화를 끊고 나니 바쁜 시간에 별다른 용건 없이 이런 전화를 한 것이 몹시 불쾌했고,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날 저녁 깊은 고민이 되었다. 이런 노골적인 전화를 받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도 그렇고, 여기서 계속 일을 하려면 스케줄러 마음에 들도록 구는 수 밖에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나중을 생각하지 말고 두려움 없이 내 생각대로 행동하자고 마음을 굳혔다. 잘못되어봐야 이곳에서의 일을 그만두는 것이 전부이고, 이만한 일은 내일 당장이라도 구할 수 있다는 자신도 있었다. 그렇게 마음먹고 출근을 한 지 일주일째, ‘이게 바로 보복성 스케줄이라는 거구나.’ 선배들이 모여서 수군대던 말을 절감하게 되었다. 내 스케줄표에는 두 층으로 나누어져 있어 이동하는 일이 많은 층이나 좌식으로 된 한실 등 대부분의 직원들이 힘들어하는 곳만 집중 포진되어 있었다. 힘겨운 시간들이 지나면서 설마 했던 것들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 

 그때 다시 스케줄러로부터 전화가 왔다. 황당할 정도로 화가 난 목소리였다. 

 “니 진짜 너무한 거 아니가? 내가 니한테 그렇게 신경 써서 방 잘 주고 그만 큼 돈 벌게 해줬는데 이러기가? 소장님도 니한테 얼마나 신경 썼다고. 양말 한 켤레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가?” 

 더이상 생각할 것도 없었다. 나는 당장 소장에게 전화했다. 

 “메이드들이 돈 더 많이 벌고 더 편하게 일하려는 의도로 로커에서 몰래 스케줄러에게 돈 봉투를 주고, 아침이면 일찍 출근해서 간식이나 선물을 주려고  줄 서는 거 아세요? 그게 스케줄러가 노골적으로 종용하는 거라고요. 그렇지 않으면 보복성 스케줄을 주니까 사람들이 마지못해서 하는 거, 아시냐구요!”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그런 일 없습니다. 저는 양말 한 켤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양말 한 켤레’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보니 이곳에서 제일 하찮은 선물이 양말 한 켤레인 모양이었다. 같은 층에 일하는 언니에게 말했더니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고, 평소에 말이 없고 진중한 분위기로 후배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선배가 나를 찾아왔다. 입술이 다 부르트고 핏기 없는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니 소장한테 그랬다며? 어떻게 할 건데?” 

 “끝까지 모른척하면 제주도 본사에 찾아가서 말하려고요.” 

 그러자 선배가

 “니도 돈 벌려고 온 거잖아. 조용히 일하면 안 되겠나?” 

 그 선배와 대화하고 나니, 이곳의 오래된 부정부패를 바로잡고 힘들게 일하는 동료들이 보다 인간답게 일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들고 싶은 마음으로 당장 비행기 표를 끊으려고 했던 의지가 사라졌다. 의욕을 사라지게 한 것, 선배에게서 보았던 것은 <체념>이었다.  <어차피 안 된다.>

 당장 큰 폭동이라도 일으킬 듯하던 선배들도 모두 내 눈을 피하며 각자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구조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개인들, 하지만 그들이 없는 곳에서 나 홀로 변화를 이끌어 낼 수는 없다는 판단을 내렸고 식권과 유니폼을 반납하였다. 그날 같이 일했던 주임이 족발을 사주겠다고 해서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게 됐다.

 “나는 똑똑한 니가 우리를 잘살게 해줄 줄 알았다.” 

 세월이 느껴지는 두꺼운 눈꺼풀 아래의 깊고 작은 눈에는 눈물이 맺힌 채, 입 가에는 웃음을 띤 채 장난처럼 말했다. 

 “제가 무슨 수로 그렇게 합니까?”

 “그래. 많이 먹어라.” 

 주임님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느라 거의 드시지 않았고, 나는 다시는 안 볼 사람의 굴곡진 인생 역정을 들으면서 혼자서 2~3인분의 족발을 해치웠다. 분노와 슬픔이 변한 식욕이었다. 그게 그곳에서의 마지막이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어느 날, 길에서 호텔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 언니를 만났다.

 “스케줄러, 계장 됐다. 그렇게 나쁜 짓 다 하고 다녀도 회사 입장에서는 자기들 돈 벌어주는 힘 있는 사람이니까 알아도 모르는 척 눈 감고 더 해보라고 하는 거지. 니 나가고 나서 반 정도 그만뒀다. 기장에 생긴 새 호텔로 다 갔어. 그만두는 사람만 억울한 거야. 요즘 사람이 없어서 일은 힘들지만 돈은 많이 벌어. 니 연락처 좀 찍어 봐.”

 다시는 안 갈 거지만 그냥 연락처를 알려줬다. 나 혼자의 힘으로 안 될 것을 알고 분노의 족발을 씹으며 돌아선 지 얼마 되 지 않아 반 정도의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떠났다. 스케줄러는 떠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승진했으니, 결국 우리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부정부패와 비리에 분노했던 순간들의 의미를 생각한다. 

 비겁하고 하찮게 보였던 각층에서의 수군거림. 자신이 낼 수 있는 만큼의 작은 소리, 또는 큰 소리로 뒤에서든 앞에서든 낸 목소리들,

 ‘이래도 되는가? 돈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저버려서 되는가? 먹고 사는 문제가 어디까지 중요한가?’ 

 청소를 하며 가빠진 호흡과 흐르는 땀방울 속에서 치솟았던 수많은 양심의 소리와 질문들. 달걀로 바위 치기같이 뻔한 결과 때문에 체념을 선택하지만, 때때로 달걀로 바위를 치는 무모한 용기가 의외의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바위에서 깨어진 달걀 물이 흘러내린다. 그 흔적을 보고 움직인 벌레가 죽을 수도 있었는데 죽지 않고 사는 것과 같은 작은 움직임을 느낀다. 미미한 듯한 우리의 분노와 작은 외침, 행동으로도 뭔가가 일어나고 변하고 흐르고 있다는 것을. 그때 비행기 표를 끊지 못했던 것, 나와 동료들, 미래의 사람들, 누군가에 대한 미안함이 숙성되어 지금, 이 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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