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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정옥 Feb 15. 2021

신묘한 일

 한 인터넷 방송 플랫폼 BJ에게 시청료 개념인 별 풍선을 수 천 만원 지불하고 식사 요청을 거절당한 한 남성이 한강에 투신하여 구조대에 의해 구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멀쩡하게 구조된 남성은 매체를 통해

"열혈 팬은 전통적으로 소원권(소원을 들어주는 권리로 추정된다) 을 받는다.

별 풍선을 쏘고 BJ에게 식사를 하자고 제안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면서

"금전적 피해보다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배신감과 상실감이 크다."

는 말을 남겼고, 이에 해당 BJ는 '식사를 하자는 말을 들은 적도, 들어줄 이유도 없다.'는 입장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많은 시민들은 사행심을 조장해서 힘들게 번 돈을 매수하는 BJ를 매도하거나 또는 그런 협박성 행동에 겁먹지 말고 하던 대로 밀고나가라는 격려, 또는 각종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건전하지 못한 플랫폼을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 그깟 BJ에게 힘들게 번 돈을 갖다 바치고 하나뿐인 목숨을 버리려한 남성에 대한 지탄이 쏟아졌다.

여기서 주목되는 문장은 투신한 남성이 사용한 '전통적으로' 와 BJ의 '들은 적도 없다'는 대목이다. 이 문장들로 짐작하건데 모든 것이 환상 속에서 키워진 일들이란 것이다.

  문제가 키워지는 것은 실체가 없는 환상계의 영역이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제어하지 못하면 물질계의 고통으로 변환된다. 없지만 있게 되는 신묘한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회면에 실리는 대부분의 흉악 범죄나 사건. 사고들의 배후를 따라가 보면 사건 자체는 각각 다르지만 이면에 얽혀 있는 감정 문제의 양상들이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헤어지자는 여자 친구의 말에 사형 선고라도 받은 듯이 격분해서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폭행을 저지르는 데이트 폭력이라든가, 헤어진 옛 연인의 SNS를 오랫동안 들여다보면서 새로운 사람을 사귀며 행복해하는 모습에 분노하고 자기비하에 빠진다든가,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고 온 힘을 다해 준비해왔는데 번번히 취업에 실패하여 삶의 희망을 잃은 젊은이들의 이야기라든가, 더 나아가 그런 부정적인 감정의 불씨를 조절하지 못해 상실감과 좌절이 우울증으로 번지고, 심지어 목숨을 버리는 안타까운 사고로 까지 이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수많은 감정의 혼돈과 관계의 불협화음에 대해 심리학자들은 어릴 때 부모의 양육 태도에서 온 문제라고 말한다. 무당이나 점성술가들은 조상이나 우주의 어떤 힘에 원인이 있다고 한다. 모든 것을 경제 탓으로 또는 정치 탓으로 돌리는 사람은 항상 거기에서 불행의 원인을 찾는다. 하지만 근원적인 문제는 그 모든 크고 작은 일들을 접촉하는 나, 내 생각, 감정, 감각, 의지… 내 마음이다.

  어떤 현상을 접촉할 때 기분이 좋기만 하지는 않는다. 불쾌하거나 화가 나거나 슬프거나 우울한 부정적인 감정이 들기도 한다. 이 때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으로서 많은 불행한 일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이 마음의 힘이다.

  심한 압력의 경쟁 구도 속에서 공부를 하고, 직장을 찾고,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직 정주행만 해오면서 좁아진 시야와 약해진 몸과 마음이 여유를 잃고 나 아닌 누군가를 이해해줄 수 없는 각박한 마음들을 양산해 낸다.

  유럽의 나라들은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면 1년을 자유롭게 지내면서 앞으로의 진로를 탐색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또, 라오스는 우리나라 남자들이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듯이 일생에 한번 반드시 스님이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도 그처럼 각자 자신의 감정을 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가는 방향을 정할 수 있는 시간이 의무와 권리로 모든 국민에게 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언젠가 피아노 학원을 다녔을 때의 일이다. 피아노 선생님 아이가 네 살이었다. 엄마가 자기하고만 있어주면 좋겠는데 마음대로 안 되니까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는 이렇게 소리쳤다.

  “엄마, 안 좋아. 엄마, 안 좋아. 이게 다 엄마 때문이야.”

  그러다 아이가 좋아하는 과자와 장난감을 주자 언제 울었냐는 듯이 뚝 그치고 미소를 띤 채 과자를 먹고 있었다. 아이니까 그런 모습도 귀여웠다. 그런데, 어른이라면 자신의 좋지 않은 기분에 대해 스스로 알아차리는 힘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른이라도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거나 수용할 수 없는 미숙한 사람일수록 남 탓, 사회 탓, 세상 탓을 많이 한다. 이러한 탓을 심리학 용어로 투사라고 한다. 자신의 생각이나 욕구, 감정 등을 다른 사람의 것으로 지각하는 것, 자신의 부정적인 욕구나 감정에 접촉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다른 사람의 것으로 돌림으로써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려는 것이다. 성숙한 사람일수록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힘이 있다. 무조건 내 탓으로 돌리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맑고 투명한 힘 말이다.

  사람이 배우고 공부하고 돈을 벌고 더 나아지려는 것은 생존 본능이다. 내가 생존에 위협을 느끼면서 타인을 배려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가난한 이웃들은 오히려 없어도 다 살아진다며 맘 편히 사는 사람들이 많은 반면, 학력과 재력이 높고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 더 불안해하고 더 서로를 공격하고 끌어내리고 더 가지려 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이러한 블랙 코미디와도 같은 현상을 일상다반사로 보게 된다.

  행복은 소유하는 것, 완전해지는 것과는 다르다. 팍팍한 우리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실 수 있는 사랑을 이끌어내는 것은 불완전하고 부족한 채로 존재하는 것, 그 불완전하고 부족한 자신과 이웃에 대한 연민을 느낄 때이다. 나의 박탈과 결여를 채우려 하는 것을 멈추지 못하면 나의 고통은 남 탓이 된다. 비판과 분열을 낳는다. 다 같이 불행해진다.

  부족한 자신의 조건을 향유함 속에서 느끼는 자기만족, 자신의 욕구와 수준에서 시작하고, 오직 자신의 성장을 향하는 기쁨을 누리자. 그런 작은 기쁨들만이 진정으로 서로를 연결시킬 수 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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