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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정옥 Feb 15. 2021

고양이의 보은

  경력 단절 16년 만에 웹디자이너로 취업을 했다.

  시간도 보수도 좋으니 좀 더 안정적인 환경 속에서 하고 싶은 일인 글쓰기에 더 매진하자는 취지였다.

 디자이너의 페르조나에 걸맞게 화려한 패턴과 과감한 스타일의 옷을 장만하면서 뉴요커라도 된 듯이 즐거웠다. 12층 빌딩을 올려다보면서 화려한 미래를 꿈꾸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내 모니터보다 네 배나 큰 곡선형 얇은 모니터와 인체공학적 디자인이 적용된 듯한 의자가 있었다. 설명을 듣고 일을 시작하려는 찰나, 노란색 점박이 흰 고양이가 마치 모니터에서 튀어 나온 듯 모니터 뒤에서 유유히 걸어 나와 마우스를 잡은 내 오른손 위에 안착했다. 그러고는 심하게 반짝이는 동그란 눈으로 내 얼굴을 응시했다.

고양이가 말했다.

"너 여기 왜 왔냐?"

  갑자기 심한 갈등이 몰아쳤다. 고양이가 아닌건지, 내 선택이 아닌건지 여하튼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깟 고양이 한 마리의 출현에 마음이 동요되어서는 안 된다고 마음을 다잡고 일에 집중했다. 고양이는 책상 위를 종횡무진 넘나들고 다리 사이를 오가고 급기야 예의 그 '우다다' 까지 선보이며 나보고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16년 만에 첫 출근한지 30분 만에 이곳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고 판단하고는 때려치우고 나왔다. 그리고 열 평 내 사무실로 복귀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눈도 깜짝하지 않고 이 자리를 지키겠다고 말은 백번도 더 넘게 하면서 살짝 바람만 불어도 눈을 백번도 넘게 깜빡인다. 경력 단절 16년 만에 출근한지 30분 만에 도망치듯이 허겁지겁 나오면서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고양이 때문이 아니었지만 고양이 때문에 알게 된 것이었다.


  한 직업을 가지고 마음에 동요 없이 꾸준히 한 길을 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성실하게 일을 하면서도 ‘이 일이 내가 진짜 원하는 일이 맞나?’, ‘나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 ‘내가 진짜 원하는 일은 무엇인가?’ 우왕좌왕하고 오랫동안 고민하는 이들도 있다. 청년 실업 문제가 커지고, 생업을 위한 아르바이트와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이 다른데서 오는 삶의 이중구조, 거기서 오는 에너지의 분열, 양가감정 등으로 힘들어 하는 젊은이들도 많이 본다.

  이제 중년이 된 나도 내가 진짜 원하는 일을 찾아, 내가 누구인가를 찾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찾아 오랫동안 방황했다. 때로는 긴 방황이 부끄럽고 절망적일 때도 있었지만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이게 내가 진짜 원하던 거야.“ 하고 스스로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좌충우돌, 갈팡질팡, 우왕좌왕, 갈지자로 종황무진 했던 삶의 여정은 나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 아픈 사랑 끝에 배운 것이 무지 많다. 우왕좌왕의 실체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의 부족이었다. 정말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온전히 전력투구하지 못하면서 ‘내가 할 수 있을까?’,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많은데 내가 과연 될까?’ 그런 의심과 불안이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현실적으로 될 것 같은 보다 쉽고 안전한 길로 들어섰다. 쉽고 안전한 길은 내면에서 원하는 길이 아니니 조금 가다가 금방 내 길이 아닌 것을 느끼고 지루해졌다.

  헤아릴 수 없는 시도와 좌절 끝에 알게 된 것은 애초에 실패란 없다는 것이다.

  실패라고 이름 붙인 어두운 마음이 있을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걸리든 진정으로 순수하게 즐거운 일을 찾는 것, 그리고, 얼마나 오래 걸리든 꾸준히 그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럴 뱃심만 있다면 다른 것은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왜성해바라기가 자라고 있어요.’

파종시기 : 2019. 6. 10

개화시기 : 7~8월

  7월 19일 아침 산책길에 찍은 초록색 식물은 나선형으로 올라가면서 방사형의 잎이 나 있다. 한 달 뒤 8월 21일 오전에 찍은 사진에는 노란 해바라기 꽃이 피어나 있다. 거의 한 달 만에 생성 변형된 형태를 드러낸 것이다. 팻말이 붙어있는 같은 자리인 줄 몰랐다면, 관심이 없었다면 같은 개체인지도 모를 뻔 했다.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을 모르는 것이다.

 자신을 모르기에 남과 비교하고 부러워하거나 우월하게 여기며 스스로 갈등을 만들고 고통을 키우며 환상 속을 헤맨다.

  자신의 씨앗, 자신의 뿌리를 알게 되면 거기서 난 에너지로 살면 되는 줄 알기 때문에 초조해지지 않는다. 모든 초조함의 근원에는 먹고사는 문제, 생존 본능이 있다.

  초조함으로 성급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모든 행위를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자.

  6월에 파종한 해바라기는 7월이 되어 방사형의 초록 잎을 솟아내고 8월이 되어 해를 닮은 노란 꽃을 피워낸다.

  뜨거운 햇살과 몰아치는 비바람 속에서도 타고난 자신의 본성대로 꿋꿋하게 피어난 해바라기는 자신의 근본을 아는 것, 근원적인 힘을 믿고 차분하게 살아가면 된다고 조용히 말하고 있다. 초조해 하지 말고 초연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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