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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정옥 Feb 15. 2021

이해관계

 자료를 찾다가 검색어를 타고 들어간 한 블로그에서 꽤 깊이 읽기에 몰입되었다.

 블로그 주인은 암 투병 중으로 항암 치료의 고통 속에서 장문의 다작을 하며 번역, 출간에 이르기 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한 사람의 삶과 생각을 엿보고 싶은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고, 그 고통 속에서 건강한 사람도 하기 힘든 방대한 양의 독서와 글쓰기를 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 점에서 격려를, 상대적인 내 상태에 대한 반성을 두루 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두 편을 읽다가 더 많은 글로 확장해 나가면서 느껴진 것은 남편과 엄마, 옆 침대 환자, 간호사, 동료 환우에 이르기 까지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대한 서운함이 곳곳에 베어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가령 옆 침대 환자의 어머니가 남편이 와서 간호하는 것을 보고 미안해하면서 "남편들이 무슨 고생이냐."고 한 말에 대해서 남자가 아프면 여자가 간호하는 것에 대해 "아내들이 무슨 고생이냐."고 말하지 않을 것이라며 아내가 아프면 남편이 간호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닌가라고 분노했다. (아내가 아프면 남편이 간호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 도망가는 사람도 있다. 당연한 "듯이" 간호해주는 남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적적인 일인지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글은 '모나리자와 문둥이'라는 글이었는데, 한 환우가

 "나는 건강할 때 해 놓은 눈썹 문신 때문에 문둥이로 살지 않아도 되서 넘 감사하더라구요."

 라고 한 말에서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의 선경지명을 자랑하고 있었으며 스스로 환자이면서 같은 동료 환자들의 외모를 비하하는 태도에 대해 우리 사회에 팽배한 편견'이라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현대인에게 눈썹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은 아니라고 주장하며 눈썹의 역사와 기능에 대해 짚어가며 대응하기에 이른다. (단순히 아픈 사람이 자기는 문신을 해서 다행이라고 한 말에 눈썹의 역사와 기능이라니!) 그리고 모나리자를 생각해내며 자신의 실존적 입지를 다진다. 눈썹이 없다는 같은 증상을 놓고 모나리자로 보느냐, 한센병 환자로 보느냐는 마음가짐에 대해서 말한다. '이왕이면 모나리자로 보는 게 훨씬 낫지 않은가' 라며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맺고 있었다.

 '눈썹이 하나도 없을 때, 나는 내내 모나리자로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그녀는 어떠했던 간에.'


 그녀의 블로그 탐방 후 '이해 관계'라는 단어가 떠 올랐다.

옆 침대 환자의 어머니가 한 '남편들이 무슨 고생이냐'는 말이나 눈썹 문신을 미리 해둔 선견지명을 기뻐하는 동료 환우의 말, 자신을 둘러싼 타자들의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에서 상처와 충격을 받는 그 마음이 나로 하여금 많은 것을 연상시켰다.

 그녀 자신은 너무나 힘든 상황 속에서 그녀의 표현대로 '읽고 또 읽으며' 자신과 주변을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그 투혼은 누가 보아도 한 마디도 얹을 수 없을 만큼 가혹하게 치열하다.

 그녀를 비판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굳이 말하자면 연민이다. 단지 주변의 한 마디에도 날카롭게 반응하는 모습에서 언젠가의 내 모습을, 어쩌면 현재진행 중인 내 모습이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말들이 나에게는 아무렇지 않고 충분히 이해가 가는 것의 단 하나의 이유는 내가 더 마음이 넓어서가 아니라 내가 당사자가 아니어서이다. 이해 관계가 없는 관찰자이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섬세한 에피소드 들의 행간에서 스며나오는 감정의 깊은 골짜기들을 헤짚으면서... 책을 많이 읽는 것, 공부를 많이 하는 것, 세상을 잘 관찰하는 것, 세심한 기록... 그 모든 것에 대해 일괄적으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진짜 중요한 것에 대해서.

 암에 걸린 친구가 자신은 선견지명이 있어서 건강할 때 눈썹 문신을 해놓았다고 기뻐한다면 함께 기뻐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건 교과서에 나올만한 이야기다. 그렇지만 그 말에 휘둘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진정 '자신'의 눈썹에 대한 '자신'의 기쁨을 표현했을 뿐이다. 듣기 불편하고 거북할 수는 있지만 그녀가 자신을 포함한 다른 동료들 외모를 비하할 의도는 정말 없었을 것이다. 내가 '눈썹 문신'의 친구도 변호인도 아니지만 이렇게 강력하게 이입되는 것은 이 글 덕분에 최근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수한 이해 관계에서 촉발되는 오해와 그로인한 망상에 대한 통렬한 감정이 북받치기 때문이다. 타인의 어떤 말과 행동에서도 괴로와질 필요가 없다. 외부로 부터 취해진 '괴로움'이 있다면 자신의 내면에 그와 조응하는 물질이 있기 때문이니 그것을 먼저 알아차리고 외부에 대한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수순이다.


 그 분의 글에서 또 하나 걸린 단어는 '보통 사람', '평범함'에 대한 부분이다. 이 단어가 쓰여진 맥락은 이러하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괴로움에 대해... 자신은 보통 사람,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보통의 대응을 할 수 밖에 없다고. 나는, 우리는 평범할까? 특별할까? 그 역시 상황에 따라, 맥락상에서 다르게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한 입장에 서는 것이 생존과 이해관계에 타당하면 평범한 보통 사람이 되면 되는 것이고, 특별한 존재감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그것을 붙잡고 돌진해야 한다. 언제 어느때고 평범하거나 특별한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위험하다. 두 가지 모습의 이중성은 당연하게 누려야할 우리가 가진 생존 무기다. 그런 좋은 무기가 있음에도 나는 보통 사람에 불과하다. 그러니 보통의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성격의 한 측면에만 안주하며 특별한 자신의 힘을 계발하지 않는 것도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며, 특별한 자신을 구구장창 내세우며 타인의 충고나 겸허한 반성에 전혀 움직이지 않는 부동의 자세도 문제가 된다.

 자신이 규정한 한 가지 입장이나 가치에 매몰되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행위는 그 기준에 의해 적을 만들고 대치되는 구조를 스스로 만들어 낸다. 자신이 만들어낸 구조물에 스스로 갇혀 괴롭고 피곤한 인생이 되어간다. 이분적인 가치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한쪽 진영에 서게 되는 것이 당연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서 있는 곳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어나는 현상 자체를 볼 수 있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한 시인을 알게 되었다. 지역에서 꽤 인지도 높은 북카페를 운영하시는 인문학자인 이 분은 자신의 책을 수십 권을 내고 평생 동안 인문학 운동을 해왔는데도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고 책이 안 팔리는 이유를 '우리'에서 찾았다고 했다. '나'가 아닌 '우리'만이 해결책이라고 외쳤다. 과연 그럴까? 나는 그 외침에 대해 회의적이다. 구체성 없는 무력한 '나'들이 서로에게 의존하며 연대와 공존을 말하는 '우리'는 무너진다. '내가 다 한다'는 결연한 자세로 나를 던질 수 있는 '나'의 연합으로서의 '우리'여야한다.

 융합, 통섭, 생태적, 공동체적 삶, 공존만이 대안이라는 이 시대, '관계'의 화두가 뜨겁다. 그 관계의 시작은 '나에 대한 이해', '나와 나' 사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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