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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정옥 Aug 20. 2022

실패를 통한 성장

뼈아픈 자기객관화

오늘 아침, 머리와 마음을 깨웠던 모닝페이지는 한근태 작가님 <고수의 질문법>에서 실패에 관한 질문 대목이었다.

'가장 좋은 교재는 실패다. 실패에서 배우고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뻔한 말들의 나열을 인내해가며 읽고 있었는데, 실패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이 폐부를 훅 찔렀다.

"왜 실패했는가?"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인가?"

"거기서 무엇을 배웠는가?"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그 질문은 곧 서울에서의 직장 생활을 중단했던 20년 전으로 데려갔고, 읽기를 중단하고 쓰기 모드로 전환다.

이 질문은 최근, 새 직장에 입사할 때도 보다 완곡한 형태로 변형되어 던져진 질문이기도 했다.

"과거, 회사를 왜 그만두었습니까?"

적당히 생각나는 답을 했지만 의식의 표면에 떠 다니는 부유물같은 것이었고, 심층의 진실에 닿아있는 답 아니었다.(는 것을 오늘의 모닝 페이지, '실패에 대한 질문'을 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20년 전의 나는 20대 후반으로 서울에서 웹디자인 일을 하고 있었다.

부산에서 살다가 부산에서 학교를 나오고 첫 직장도 부산에서 다니다가 당시의 벤쳐 열풍에 회사와 함께 역삼동으로 진출했던 것이었다. 수년간 온 몸을 바쳐 열심히 일을 했지만 벤쳐 버블이 꺼지면서 개인의 열심으로 극복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회사가 문을 닫게 되었고, 그 회사에 온 몸을 바치느라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허술한 포트폴리오로 다른 직장을 서둘러서 알아보게 되었고, 어찌어찌해서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다른 직장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 다행히 다니던 곳 보다는 일의 성격도, 근무조건도, 사람들도 좋아서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이 곳에서의 몇 년도 역시 온 몸을 바쳐 열심히 일했고 같은 패턴이 반복되었다. 비슷한 쇠퇴기를 감지했을 때, 지난 번 경험을 거울삼아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보다 더 내가 원하는 형태의 일을 하고자 퇴근 후에 학원을 다니기도 했다. 여기서 부터 필름이 깜빡깜빡한다. 종일 업무에 지친 상태학원에서의 어려운 공부 따라가지 못했고, 급하게 닥친 구조조정에 부산에서의 재택근무로 발령이 났다.

그때는 엄청난 행운의 여신이 움직였다고 생각했다. 재택근무한지 몇 달만에 회사가 무너졌다. 당시의 친구들이 부러워했던 재택근무는 결과적으로 빛 좋은 개살구, 맛있는 미끼같은 것이었다.

의식의 심층부에서 건져올린 오늘의 내 생각은 이렇다.

과거, 서울에서의 정체기 때 문제의식을 느끼면서도 제대로된 고민과 준비를 하지 못했다.

학원에 다는 부분적이고 소극적인 노력을 했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더 악착같이 현실에 들러붙어서 존재를 던져서 내가 원하는 삶을 지켜내지 못했다. '건너가기'에 실패했다는 것을 20년이 지난 지금에야 겸허하게 인정한다. 그 전 까지는 끝끝내 합리화를 했다.

'그 상황이었으면 누구라도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할 만큼 했다.'고.

"과연 최선을 다했나?"

뼈아픈 질문에 아니라고 답할 때, 불현듯 잊고 있었던 당시의 팀장님이 생각났다.

이름도 얼굴도 또렷이 떠올랐다. 그분은 내가 부산으로 내려오자마자 신선한 소식으로 채팅창에 나타났다.

책을 출간했고, 교육대학원에 입학했다는 것이었다.

수년간 같이 회사 욕을 하면서 밥을 먹었던 당시에 그분은 다른 사람같이 행복해 보였다. 같이 욕을 하면서도 자기중심을 잃지 않고 제대로 된 준비를 했던 것이었다. 건너가기에 성공한 것이다.

같은 조건에 있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다음으로 건너갈 수 있었던 팀장님과 내가 원하지 않았던, 외부에서 주어진 조건으로 건너갈 수 밖에 없었던 나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오늘 아침 실패에 대한 질문에 대해 답하면서 찾아냈다.

자신의 욕구를 확실히 하고, 그에 대해 제대로 된 질문을 하고, 제대로 된 준비를 하는 것과 그렇게 하지 않거나 못하고의 차이로 본인이 원하는 다음으로 건너가거나 원하지 않는 다음으로 건너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 갈림길에서 길은 묻는 엘리스에 채셔고양이가 하는 말과 같다.

"도착하려면 어디로 가면되니?"

"어디로 가는데?"

"몰라."

"그럼 아무데로나 가면돼?"

"그럼 뭐가 나오는데?"

"어디로 가든 분명히 도착하게 되어있어. 걸을만치 걷기만 한다면, 하지만 원하는 곳에 도착하려면 원하는 것이 있어야 해."

다리가 아플 만큼 걷고 또 걸어서 도착한 곳인데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면? 그것은 내가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행동 이전의 생각이다. 정신이 물질을 만든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 곳은 내가 원하는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인가? 제대로 된 질문으로 네비게이션을 재가동시키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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