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보기로 목차와 서문을 읽으면서 30년 전, 그러니까 90년대, 막 성인이 된 대학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삶의 한가운데서 치열하게, 또는 인생의 나락에 떨어져서, 툭툭 던져주듯이 나에게 다가온 류시화 작가의 글들을 받아 읽으면서, 그때그때마다 중요한 결정을 하는 단서가 되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가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그가 나를 불러 세웠다. 그는 자기 앞 탁자 위에 놓인 박하사탕 몇 개를 집어 내게 주며 영어로 말했다.
"Be happy(행복하라)!"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할 심오한 진리를 찾는 나에게 그 말은 그저 다정한 조언이었고, 나는 한 노인의 덕담이라 여기고서 그곳을 떠났다. 나보다 더 서운해하는 아이들과 열렬히 손을 흔들어 작별하며.
그 후 나는 매년 인도를 여행하고 많은 구루들, 사두들, 승려들, 판디트(학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세월이 흐를수록 그들의 말과 가르침이, 인간이 발견해 온 모든 형이상학적인 해답들이 그 한마디로 회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에 있든 행복하라!"
어느 곳을 여행하고, 어떤 추구를 하고, 누구와 함께하든 중요한 것은 '나는 행복한가?'였다. 그리고 그 행복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내 마음 구석구석을 밝게 비춰주는 행복이어야 했다. 그런 행복을 인도인들은 '지복(아난드. 신이 준 축복)'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 행복은 마음의 자유에서 온다. 여행길마다에서 나는 자문한다. '나는 행복한가? 진정 자유로운가? 행복의 기차표는 내 가슴 안쪽에 간직되어 있는가?' (......) '행복'이라는 표가 없으면 여행을 망칠 것이다.'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에 실린 글이다. 너무 오래되어서 딱 이 대목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분위기, 자유를 갈망할 수밖에 없는 갓 스무 살 무렵의 나는 이 책을 읽을 당시, 대학교 2학년 여름 방학을 앞두고 있었다. 그 무렵, 배낭여행이 대학생들 사이에서 유행이었고, 친하게 지내던 친구 세 명이 같이 유럽 배낭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도 가고 싶었지만 모아둔 돈이 없었고, 아쉽지만 아르바이트를 해서 다음을 기약했다. 여행 준비로 들뜬 친구들에게 지기 싫은 마음으로 독서를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자마자 묘한 마법의 힘이 온몸을 휘감기 시작했고,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충동으로 유럽배낭여행을 가기로 했다. 꼭 가겠다는 강렬한 마음은 외부의 자력을 끌어당겨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그 여행은 애초 한 달 계획이었던 것에서 열흘 더 연장해서 42일 동안 유럽 13개국을 다니며 넓은 세상을 보는 기회가 되었다.
"한 가지가 불만스러우면 모든 것이 불만족스러운 법이요. 당신이 어느 것 한 가지에 만족할 수 있다면, 당신은 모든 것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이오....... 나는 지금까지 20년 넘게 이 여인숙을 운영해 왔지만, 늘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소. 한쪽은 언제나 불평을 해대는 사람들이고, 한쪽은 똑같은 상황에서도 늘 즐겁게 지내는 사람들이오. 당신이 어떤 부류에 속하고 싶은가는 당신 스스로 선택할 일이오. (......) 당신은 지금 인도에 여행을 하러 온 것이지, 불평을 하러 온 것은 아니잖소."
이 글은 <지구별 여행자>에 실린 <내 영혼의 여인숙>의 일부다.
'신은 어디에 있는가'로 시작해서 '아 유 해피?'로 끝나는 이 책을 읽고, 그다음 날 당장 다니고 있던 대학원을 자퇴했다. 물론 아무 문제 없이 잘 다니고 있던 대학원을 달랑 책 한 권 읽고 자퇴하는 건 충동 장애겠지만, 그전에 이미 고민이 무르익은 상태에서 중요한 결정을 하는 질문이 되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질문 속에 답이 들어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그 글은 어두운 심연의 질문에 대한 또렷한 답으로 떠올랐다.
미술대학을 졸업했고 마땅히 취직을 준비한 것도 아니고, 작품 활동을 하면서 생계를 책임질 자신도 없고, 친구와 같이 하던 공방도 흐지부지되었고, 뭔가 명확하지 못한 주저함으로 보험 같은 개념으로 걸쳐놓은 교육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작가로 안되면 미술교사라도 한다.' 는 식의 안일하고 유치한 발상이었던 것 같다. 그런 나약하고 비겁한 마음은 나와 비슷한 처지와 생각을 가지고 같이 대학원에 다니는 동료, 선배, 교수님들이 다 수준 낮은 패배자들로 보이게 했다. 결국 그 수준 낮은 패배자는 나의 거울이었다. 류시화 님의 짤막한 경구로 마음을 뒤흔드는 문장들은 비겁하게 숨어있던 나를 밝은 세상으로 끌어내어 주었다.
그 이후로 국가에서 지원하는 미취업자 멀티미디어 교육인가 하는 것을 수료하면서 제대로 취업 준비에 정진했고, 당시의 벤처 버블에 올라타서 서울의 한 웹디자인 회사에 취업하는 것으로 자존감을 회복하고 경제적 독립을 하게 되었다.
또 하나, 류시화 작가님의 글에 영향받은 일이 있었으니,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에 수록된 <당신의 잎새_신의 선물>을 읽고 서다. 이 글은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이 지은 우화, <니글의 잎새>에 나오는 내용을 재인용한 글로, '니글'이라는 이름의 화가지망생의 이야기다. '니글'이라는 이름은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쓰고 시간을 낭비한다'는 뜻으로, 이 글이 진행되는 내내 니글이 자신이 그리고 싶어 하는 나무를 그리지 못하는 답답하고 안타까운 내용으로 채워진다. 니글이 그리고 싶어 하는 나무는 수많은 잎과 가지를 가진 거대한 나무였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이웃 사람들이 발견한 그림은 때 묻은 캔버스에 그려진 아름다운 잎새 하나였다. 그가 그리고 싶어 했던 수많은 잎과 가지를 가진 거대한 나무를 그리지 못하고 잎새 하나를 그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방해 요인을 차단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곤 했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무의미한 일들에 지쳐서 모든 것을 잊고 쉬고 싶어 했다. 자신이 원하는 여행이 아니었고, 그 여행에 대해서 생각하기도 싫었지만, 선택하거나 회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처리해야 할 자질구레한 일들과, 그의 그림 따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이웃들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끊임없이 붓을 내려놓아야만 했다. 반나절만이라도 그림에 몰두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지만, 집에 돌아오면 피곤함에 의욕을 잃었다. '안 돼'라고 거부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또한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도 있었다. 그가 죽고 나서 그의 도움을 받은 이웃들은 이렇게 말했다.
"불쌍한 친구, 그가 그림을 그렸다는 건 전혀 몰랐는데." 그리고 그를 '어리석고 무가치하며 중요하지 않은 자'로 기억했다. 세상을 떠난 남자가 하늘나라로 가는 기차에 태워져서 달려가는데 어디선가 두 개의 음성이 들렸다. 하나는 엄격하게 꾸짖는 목소리였다. 사소한 일에 재능을 낭비하고 평생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시간을 보낸 것에 대한 질책이었다. 또 하나는 그의 착한 성품을 위로하는 따뜻한 목소리였다.
이 글은 목표를 잃고 바빠지고 초조해질 때마다 떠올라 곁에 두고 다시 읽으면서 마음을 다잡는, 매우 유용하고 고마운 글이다. 또한 내가 쓰고 싶은 수많은 잎과 가지를 가진 거대한 나무와 같은 글을 생각하게 하고, 니글처럼 잎새 하나만 남기고 세상을 떠나게 될까 봐 두렵게도 한다. 또한 그랬다 하더라도 분열되는 정신을 착한 성품 때문이라고 해석함으로써 끝까지 위안과 희망까지도 준다.
이렇듯 내 인생의 중요한 모퉁이마다 불쑥불쑥 나타나서 목숨을 살릴만한 촌철살인을 던지는 류시화 작가의 새 산문집의 서문은 또 한 번 나의 영혼을 뒤흔들었다.
'한 남자가 시골길을 운전하며 가던 도중, 주위 풍경에 한눈팔다가 차가 진흙 웅덩이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해도 차바퀴가 헛돌 뿐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근처 농장에 가서 농부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농부는 들판에 있는 노새 한 마리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워릭이 차를 웅덩이에서 꺼내 줄 수 있을 거요."
남자는 늙은 노새를 쳐다보고는 같은 말을 반복하는 노인을 다시 쳐다보았습니다. 하지만 시도해도 잃을 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농부는 밧줄로 노새 워릭과 자동차를 연결했습니다. 그러고는 고삐를 잡고 노새를 잡아당기며 소리쳤습니다.
"당겨, 프레드! 힘껏 당겨, 잭! 온 힘을 다해 당겨, 테드! 너도 힘껏 당겨, 워릭!"
그러자 놀랍게도 노새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차를 웅덩이에서 끌어냈습니다. 남자는 믿기지 않아서 노새의 등을 두드려 주고 농부에게 감사 인사하며 묻습니다.
"노새는 한 마리인데 왜 워릭 이름을 부르기 전에 다른 이름들을 계속 외치셨어요? 이 노새 이름이 여럿인가요?"
농부가 웃으며 말합니다.
"아니오. 워릭은 늙어서 눈이 보이지 않는다오. 하지만 자신이 다른 노새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고 믿으면 어떤 무거운 것도 끌 수 있소."
글쓰기는 고독한 일이지만, 미지의 독자가 있음을 믿으면 그 고독이 힘을 얻고 문장이 빛을 발합니다. 전달된다고 믿지 않으면 작가는 글을 쓸 수 없습니다. (......)
"자, 당겨, 샐린저! 힘껏 당겨, 네루다! 더 힘을 실어, 루이스! 온 힘을 다해 당겨, 류시화! 진창에 빠진 '마음대로 안 되는 마음'들을 어서 끌어내야지."'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 책을 읽는다>라는 제목의 서문의 일부인 이 신비스럽고 행복하고 생동감 넘치는 문장들을 읽으면서, 글을 쓰면서 과거의 사람들을 소환해내고 있는 내 마음의 이유를 찾아냈다.
하이오 선생님, 요란 선생님, 에리카 선생님, 마틴 선생님, 정수옥 선생님, 노은님 작가님, 김봉경 선생님, 홍철수 선생님...... 어떨 땐 성함이 기억나지 않아서 한참을 눈을 감고 분투해서 끝내 기억해 내서 쓰려고 하는 이 마음이 바로 류시화 작가가 말하는 '마음대로 안 되는 마음'들을 끌어내는데 그분들의 가르침과 힘의 조력을 받고 싶어 하는 의지라는 것을 말이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탄 난쟁이의 행복에서 내려와서 같이 무거운 짐을 수월하게 끌어내는 한 마리 눈먼 노새가 되는 기쁜 상상을 하게 된다.
가벼운 주머니지만 구매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다.
2023년, 수고한 나에 대한 크리스마스 선물로. 2024년, 영혼의 부활을 준비할 비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