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쯤, 마른기침을 한지 일주일 정도 되어서 약국 약으로만 견디고 있다가 동네 내과를 갔고, 처방해 준 일주일 분의 약을 먹으면서 잦아들었었는데, 약 기운이 떨어지자 기침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3주 차를 넘어서서 한 달 가까이 기침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기침이 오래되다 보니 가슴 부위가 얼얼할 정도가 되었고, 밤에 잠자리에 누우면 목과 가슴 언저리에서 쌕-쌕-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기침이 오래간 적은 없었기에' 겁이 슬슬 나기 시작했다. 아니다. 사실, '이렇게 기침이 오래간 적이 없었기에'가 아니라 한번, 이보다 더 기침이 오래간 적이 있었다.
바야흐로 삼십 년 전, 대학교 2학년 겨울, 딱 이맘때였다. 감기인 줄 알았던 기침이 한 달 넘게 그치지를 않았고, 다이어트를 해도 여간해선 줄지 않는 체중이 슬슬 줄어갔다. 동네 병원에 갔더니 보건소에 가보라고 했다. 보건소에서 폐 엑스레이 촬영을 했고, 결핵으로 진단을 받았다. 그때로서는 결핵이란 병은 상상하지도 못했고, 당장 검색할 수 있는 스마트 폰 시대도 아니었기 때문에 죽을병에 걸린 줄 알았다. (지금은 치료제가 개발되어서 약만 잘 먹으면 완치율이 높은 병이지만, 과거에는 결핵이 걸리면 사형선고였고, 결핵은 지금도 한국인 사망원인 중 높은 순위에 랭크되어 있다.) 내가 서 있는 보건소 공간으로부터 시작해서 온 세상이 회색빛으로 창백하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스물두 살 꽃다운 나이에 이룬 것도 없이 피를 토하며 죽어가게 된단 말인가!
보건소 담당 직원은 상당히 건조한 태도로 이후, 환자로서의 나의 의무에 대해 설명했다. 전염병이므로 가족과 식기, 수건 등 물건 사용을 분리하고, 학생이면 휴학을 하라고 했으며, 6개월간 약을 먹어야 하고, 단 하루라도 약 먹는 것을 빠뜨리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루라도 빠뜨리면 결핵균의 내성이 커져서 치료가 더 길어지고 어려워진다고 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와서 약을 타가고, 폐 사진을 찍어서 경과를 보는 것이 결핵 치료의 전부였다. 낮게 드리워진 먹구름 속에서 한나절을 지내고 곧, 이겨내고 살아남는 방식으로 모드를 전환했다.
약 먹는 것 외에 단백질 음식을 잘 먹는 것이 회복에 좋다는 어른들의 말씀에 따라 지금은 법안 통과로 종식된 보신탕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먹고, 염소진액도 먹기 시작했다. 항암 치료를 하는 사람들 중 보신탕을 먹고 원양을 보한 사람들의 사례도 많이 알게 되었다. 보신탕을 안 먹은 사람에 비해 먹은 사람이 기력을 회복해서 이후의 항암에 견디는 힘이 좋아졌다는 말을 들었다. 이런 측면에서 사회가 어떤 것이 문제가 된다고 해서 그것을 없애는 방향으로 서둘러 진행하는 것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소중한 것을 잃는 측면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사회는 때때로 불편하지만 건강한 세상이다.
6개월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약 먹는 것을 지켰다. 약 먹는 거야 쉬운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결핵 약은 한번 먹는 분량이 거의 한주먹이었고 약 먹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 구체적인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한 주먹의 알약을, 그것도 크기가 꽤 큰 알약을 몇 등분으로 나누어서 삼키고 나면 목이 얼얼해지고 배가 불렀다. 한번 약을 먹을 때마다 남은 횟수를 카운트했다.
결핵을 앓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기력과의 싸움이었다. 다행히 발병 부위인 폐는 감각 신경이 없어서 통증은 없었지만, 의욕이 없어지고 나른해지며 약 기운으로 계속 잠이 오는 상태가 지속되는데, 이러한 무기력은 뭔가 한창 해야 하는 나이에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힌 기분이었다. 약을 열심히 챙겨 먹고 정기 검사를 받으면서 6개월을 보냈다. 무기력한 증상은 회복해 가면서 점차 활력으로 바뀌었고, 그동안 갇혀있었던 욕구가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1년 휴학의 나머지 6개월 동안 실내건축기사자격증을 따고 일본어 학원을 다녔고, 독한 결핵약 성분에 대한 부작용으로 얼굴 피부가 뒤집어져서 피부관리도 받아야 했다. 회복기에 발병 이전보다 훨씬 더 시간을 알차게 보냈다. 무기력에 잠식당했다가 빠져나온 세상은 이전 보다 더 선명했고, 활동하는 자체만으로 기쁨이었다.
쇼팽, 모딜리아니, 헨리 데이비드 소로, 비비안 리, 안톤 체호프, 프란츠 카프카, 제인 오스틴, 로렌스, 존 키츠, 김유정, 이상, 나도향, 가수 김정호 등 많은 예술가들이 결핵을 앓고 죽음을 맞았다. 에밀리 브론테는 결핵을 아름다운 질병이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결핵의 치료약이 없었고, 통증 없이 핼쓱하게 야윈 모습으로 변하면서 침대에 기대어 서서히 죽어가는 병이었다. 이러한 결핵 환자의 모습은 통증을 호소하면서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다른 질병에 비해 낭만적으로 보였던 것이었다.
결핵을 앓았던 입장에서 결핵이 결코 아름다운 질병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굳이 그러한 점을 생각하자면 앞서 말했듯이 병색이 깊어지면서,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면서 솟아오르는 내면의 열정이 아닐까 한다.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몸이 무기력해질 때, 그 욕구와 갈망은 더 커져서 세상에 무언가를 남기고 싶은 창조적 의지를 갖게 한다. 예술가들이 결핵에 많이 걸린 것이 아니라, 결핵이 서서히 죽어가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안의 예술가를 깨워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무기력한 육체에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들이 예술이 된 것이라고.
한 달 가까이 계속된 기침은 오래전 앓았던 결핵의 두려움을 끄집어냈고, 좀 더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기로 했다. '호흡기 내과 종합병원' 등의 키워드로 검색을 하자 기침을 하면서 매일 지나다니던 길에 있는 병원이 찾아졌고, 곧바로 갔다. 평소에 병원에 잘 가지 않는 데다 이렇게 큰 병원은 오랜만이었다. 외래 접수를 하고 호흡기 내과를 찾아가는 길에서 응급실과 장례식장이 눈에 들어왔다. 생사의 귀로에 선, 또는 막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과 가족들, 유족들의 모습이 황망하게 어른거렸다. 병원 안의 (나에게는)과도하게 느껴지는 난방과 건조함에 죽음의 그림자가 섞여서 숨이 막히고 진땀이 났다.
기침을 오래 해서 기관지가 좀 상했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예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혹여 결핵의 재발이나 천식, 만성기침, 폐렴, 최악의 상상으로 폐암까지도 떠올랐다. 그런 진단을 받는다면 저항하지 않고, 연명 치료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에 기쁘게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와중에 그동안 쓴 글들을 묶어서 책으로 내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이 났다. 기침을 하면서 장례식장 앞을 지나면서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못하고 있는 일들이 떠올랐다. 원고 더미와 함께 구석에 처박아둔 한 무더기의 겨울 옷도 생각났다.
진료 대기실에는 나보다 연배가 높은 연로하신 환자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수납하는 창구에서 "아무도 없나?", "얼만데?", "뭐 이래 비싸!" 반말을 하는 할아버지부터 시작해서, 내 옆에 앉아있던 할아버지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대기실'이라는 팻말이 붙은 방에 들어가려고 했다가 간호사로부터 저지당했다. 간호사는 지금까지 앉아계시던 곳에 계시라고 했고, 할아버지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저지당한 것이 무안한 듯이 "대기실이라고 쓰여 있잖아!" 소리를 버럭 질렀다. 간호사가 "거기는 코로나 환자 대기실이에요."라고 말하자 조용히 다시 내 옆자리에 와서 앉았다. 그리고는 내가 진료실에 들어갈 때 까지 병원이 불친절하고 어쩌고 하면서 혼잣말을 계속했다.
이런 곳에서 의례히 보게 되는 눈살 찌푸릴만한 장면들이 속속 연출되었다. 이와 같은 해프닝을 대여섯 개 더 목격했지만 이만 줄이겠다. 환자들은 연로한 데다가 몸까지 아프다 보니 대부분 허리가 굽어진 자세로, 걱정 가득한 불안한 눈빛들이었다. 문득, 홀로 코스터 생존자, 빅터 프랭클이 생각났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참혹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 대목이 떠올랐다. 빅터 프랭클이 관찰한 바로 삶과 죽음이 결정되기 전, '이제 꼼짝없이 죽었다'는 생각으로 자세가 무너지고 시선을 내리 깔고 이미 절망하고 포기한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죽음을 맞이했고, 눈을 똑바로 뜨고 바른 자세로 걸어갔을 때 삶으로 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환자들이 간호사들에게 무례할수록, 그들의 굽어진 자세와 흔들리는 걸음걸이가 눈에 들어올수록 척추를 곧게 세워 자세를 바로 잡았다. 내 이름이 불리면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일상의 고정된 질서에서 벗어난 병원에서의 나는 군대에 온 훈련병처럼 군기가 잔뜩 들어가서는, 내 이름이 불렸는데 못 듣고 놓치면 큰 일이라도 나는 듯이 이름이 불리자마자 "네!" 손을 번쩍 들고는 큰 소리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홀로 코스트 수용소에서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수감자가 된 것처럼, 역할극을 하는 것 처럼.
엑스레이를 찍고 의사 선생님 면담을 했다. 빅터 프랭클이 자신의 운명을 거머쥔 교도관의 눈을 끝까지 들여다보았다듯이 나의 운명을 말할 의사 선생님의 눈을 응시했다. '무슨 말씀을 하든지 절망하지 않고 받아들이겠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새겨듣겠다.' 의지를 실어 주먹을 꼭 쥐었다. 결과는 예상대로 기침을 오래 해서 생긴 기관지염이었다. 기침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결핵의 재발이나 만성기침, 천식, 폐렴, 폐암 등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난 건강염려증의 과대망상이 눈 녹듯이 사라졌고, 내 운명을 거머쥔 교도관은 다시 친절한 의사 선생님으로, 홀로 코스트 수용소는 곧 동네의 친근하고 고마운 병원으로 돌아왔다.
이번의 장기 기침으로, 일생에 있어서 생긴 병력을 돌아보게 되었고, 호흡기가 좀 약한 것 같다는 경각심을 갖게 했다. 폐는 신경이 없어서 큰 병으로 진행될 때까지 증상이 나타나지 않고, 때문에 현재 암 사망률 중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넘쳐나는 정보로 인한 과도한 건강염려증도 문제지만, 건강과 질병을 맹신하거나 무시하는 것도 안 될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각성하게 된 계기였다.
아끼는 책, 홍신자 님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에 <몸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순간>이라는 챕터가 있다. '휴일도 없이 움직이며, 제 역할을 한시도 잊지 않는, 감사한 몸'에 대한 인정과 사랑의 말이 가득 담겨있다. '몸에 대해 필요한 감정은 바로 인정과 사랑'이며, 아픈 곳,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 등에 대해 '몸의 탓이 아님을 이해하는 것'을 강조한다. 몸은 항상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왔는데 우리가 무시해 왔으며, 몸에게서 멀어졌고, 점점 무리한 요구를 한 데 대한 결과라는 것이다. 몸에게 화해를 요청하고 사랑을 시작하라고 말한다. 이어서 '뇌에게, 뱃살에게, 피부에게, 발에게, 위장이 나에게, 성기가'까지, 그동안 혹사한 몸에게 편지를 쓰고, 몸의 말을 듣는다.
일주일 분의 약, 한 뭉치를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지금껏 오십여 년 동안 좋으나 궂으나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산소를 운반하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며 생명 유지 활동을 충실하게 하고 있는, 나의 폐에게 감사하면서 폐의 말을 들어보려고 했다. '기관지에 좋은 음식'을 검색했고, '도라지 배즙'을 한 상자 구매했다. 그리고 비싸게 주고 사놓고 냉장고 안에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던 도라지 청을 꺼내서 뜨거운 물을 부어 차를 만들었다. 달콤 쌉쌀하고 따뜻한 도라지 차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면서 장례식장 앞에서부터 위축되었던 오늘 하루의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하느님이 아직 부르시지 않는구나.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살아서 할 일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