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 없는 집념으로 피운 꽃

-영화 <길 위에 김대중> 후기

by 오렌


최근에 이렇게 가슴이 뜨거웠던 적이 있었나? 이토록 눈물이 치솟았던 적이 있었던가?

다른 지역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부산 극장가는 김대중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영화 <길 위에 김대중>의 상영 횟수가 너무 적고, 현재로서는 드는 관객도 너무 적다. 이러다가 조기 종영되는 건 아닐까 싶어서 서둘러 영화관을 찾았다. 주말 저녁인데도 딸과 나를 포함해서 총 열 명의 관객이 뒷자리에 모여서 보게 되었다.


<길 위에 김대중>은 배우가 재현하는 영화가 아니라, 김대중평화재단과 연세대학교 김대중 도서관의 자료 등 최초로 공개되는 미공개 영상과 김대중 전 대통령 주변인의 증언을 토대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첫 번째 소감은 일단 "너무 재미있었다!" 다큐멘터리 영화가 이렇게 재미있는 건 처음이었다. 흑백의 다큐멘터리라 재미는 접어두고 꼭 보아야 할 자료처럼 생각하고 갔는데 말이다. 김대중 대통령 인생 드라마가 영화 보다도 더 영화 같아서 재미가 없을 수 없었다.


두 번째 소감은 '꼭 봐야 될 자료를 봤다'는 것이었다. 이 영화야 말로 재현 영화가 아닌, 실사로 본 것이 너무 중요했다. 지금껏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영화가 몇 편 있었고, 실제 시각 자료도 본 적이 있지만, 이번에 공개된 자료는 압도적인 충격을 제공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수많은 연설과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당시의 사람들이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웠는지, 흑백의 창백한 화면이 붉게 느껴질 정도였다. 부르는 곳마다 달려가서 연설을 하느라 '늘 길 위에 있었던' 것이 이 영화 제목 <길 위에 김대중>의 단서가 된 것이다.


영화가 끝나자 엔딩크레디트가 한참 올라가는데도, 아르바이트 생이 앞문을 열었는데도, 열 명의 관객은 아무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영화 후반부부터 나기 시작했던 훌쩍이는 소리가 이어졌고, 어떤 분은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박수를 치기도 했다.


얼마 전에 <서울의 봄>을 같이 보고 나서 친구와 한번 더 보러 갔던 스물한 살 딸은 영화가 끝나자 '다큐멘터리라서 재미는 없을 줄 알았는데, 너무 재미있었다. 이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라고 하면서, '예전에 보았던 <택시운전사>와 <서울의 봄>을 한번 더 보고 싶다'고도했다.

늦은 시간, 국밥을 사 먹고 지하철 두 코스를 걸어오면서 딸과 민주주의에 대해, 현재의 정치에 대해 끊이지 않는 대화를 했다.




집에 돌아와서 책장 아랫칸에 꽂혀있는 <김대중옥중서신>을 꺼냈다. 첫 페이지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며, 2000년 7월 마지막 날'

23년 전의 나는 김대중 대통령으로 인해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김대중 대통령은 손에서 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는 지인의 증언을 들으면서 다시 한번 그 결심을 되새긴다.


이 책 <김대중옥중서신>은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유언을 쓰듯이 집필한 책이다. 그는 옥중에서 예수, 원효, 율곡, 최수운, 토인비, 간디와 같은 철학자와 성인들에 대한 책을 읽고 사색하면서 자신을 끊임없이 가두고 고문하고 죽이려 했던 사람들에 대해 용서와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겨내고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가고 만다.



타는 목마름으로


첫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서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 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김지하 (1975)



아래에 링크한 주소는 2002년 4월 27일 밤, 경기도 덕평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당 대선 후보로 최종 결정되신 날, '타는 목마름으로'를 부르는 귀한 영상이다. 영화를 보고나서 대학교 다닐 때 불렀던 이 노래가 생각나서 찾아보았고, 노무현 대통령께서 부르신 영상을 찾을 수 있었다.


노래를 마치신 노무현 대통령께서

"저는 할 일이 많은데, 여러분은 제가 대통령 되고 나면 뭐 하지요?"

라고 하자, 처음에는 웃던 군중들 사이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단어들이 들리다가, 한 곳에서 '감시'를 외치자, 주변으로 확산되면서 모든 시민들이 한 목소리로 '감시!'를 외친다.

"감시! 감시! 감시! 감시!"

그러자 노무현 대통령은 여러분이 너무 잘 아셔서 할 말이 없다고 하시면서 잘 '감시'해달라고 부탁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LqmVb5NvuOA



영화를 보면 김대중 대통령의 말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온다. 영화 전체에서 몇 번이 나오는지 헤아려 보고 싶을 정도였다.

민주주의(民主主義)는 국민이 권력을 가짐과 동시에 스스로 권리를 행사하는 정치 형태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수많은 사람들이 피 흘린 희생으로 쟁취하고 지켜내어 피운 꽃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우리가 해야 할 '감시'의 의무를 숙연한 마음으로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