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일기> 30화. 최종회
오랜일기를 시작하며
20년 전 홈페이지에 연재했던 그림일기를 이어간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저는 오래전에 작가님이 운영하셨던 홈페이지를 장기 구독하던 애독자예요.
웹에서 우연히 작가님 연락처를 보게 되었고 반가운 마음에 메일 보내봅니다.
홈페이지 이름이 오렌공작실이었죠.
'오렌지를 좋아하고 오래된 것을 좋아한다'고...
저는 그중 그림일기를 좋아했어요. 잘 그린 그림은 아니었지만, -_-;;
따뜻한 감성이 좋아서 3년이나 드나들면서 보았더랬죠.
배경음악으로 걸어놓으셨던 '키쿠지로의 여름'이 참 좋아서 그해 여름 내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좋아한다고 하셨던 바흐의 '골드베르크'도요.
언제나 건강하게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멀리서 강한솔(예명) 드림
‘오래전’이라는 것은 정말로 오래전이었다.
이십 년이나 전인, 강산이 두 번 바뀐다는 시간이 흘렀다.
뇌의 일부가 손상되었는지 나조차도 잊어버린,
‘오렌지를 좋아하고 오래된 것을 좋아한다’는 홈페이지 소개 글까지 어제 본 듯이 기억하고 있는 독자가 경이로웠다.
홈페이지, 오렌공작실, 그림일기, 책, 영화, 배경음악…….
따뜻하게 서늘한, 되찾고 싶기에 잊힌, 낙조의 오렌지 빛…….
알지도 못하는 20년 전 독자가 내 인생의 퍼즐 한 조각을 가지고 나타났다.
되찾은 이름, 되찾은 시간, 되찾은 음악, 되찾은 일기장, 되찾은 꿈을 이어간다.
기억력 좋고 마음 따뜻한 한 분의 독자로 인해 새 생명을 얻고 부활했다.
다시는 잊어버리지도, 잃어버리지도 않을 것이다.
오랜일기를 종결하며
우연히 연락이 닿은 20년 전 독자의 반가운 메일 이후로 몇 번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오랜일기를 계속 연재해 보라는 지지를 받고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연재를 시작할 때의 마음은 귀하게 다시 찾은 오랜일기를 가능한 한 오래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이었는데, 30화를 끝으로 아쉽지만 끝을 내려고 한다. 꼭 이 이름과 포맷으로 이어가지 않아도, 다른 형태로 끝없이 새롭게 태어나게 될 테니까. 또 한 번의 시원섭섭한 안녕을 고한다.
프리다에게 있어 일기는 단순한 일상의 기록이 아니었다.
하나의 카타르시스이며 정신적 치료의 수단이었다.
프리다 칼로, 내 영혼의 일기 | 프리다 칼로 | 안진옥 옮기고 엮음 | Book
나에게도 일기는 그랬다
오랜 날
오랜 밤
오랜일기가 있어서
얼어붙지 않을 수 있었고
길을 찾을 수 있었고
접힌 날개를 펼칠 수 있었다
허물을 벗는 기분으로 옛날 사진들을 모아봤다. 뱀의 허물 벗기를 예로 들면 뱀은 몸이 성장함에 따라 각질로 되어있는 비늘이 더 이상 자라지 않기 때문에 허물을 벗음으로써, 과거의 일부를 과감하게 버림으로써 생존과 자기혁신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한다.
10년 전의 세포가, 피부가, 머리카락이, 웃음이, 그때 입었던 옷들이, 저 사진들을 찍어준 누군가가, 지금의 나에겐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저 사진 속의 나는 모두 지금의 내가 아니고, 그 일부는 또 여전히 나의 본성에 닿아있다.
오랜일기도 이와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랜일기라는 형식이 아니라도, 더 이상 옛날의 반가운 독자가 나를 찾을 수 없더라도, 나는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뭔가를 만들든, 호작질을 멈추지 않을 것이므로, 나의 무언가가 계속 이 세상에 떠 다닐 것이다.
생선을 구우면 생선 냄새가 떠 다니고, 누룽지를 끓이면 누룽지 냄새가 떠 다니듯이, 내가 살아가는 모습에서 우러난 냄새가 떠 다닐 것이다. 그것이 유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오랜 날 오랜 밤 동안
정말 사랑했어요
어쩔 수 없었다는 건
말도 안 될 거라 생각하겠지만
밉게 날 기억하지는 말아 줄래요
아직도 잘 모르겠어
당신의 흔적이
지울 수 없이 소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