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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Jul 09. 2024

내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기억하라

-<원라이너> 10화.



혈액암을 극복한 허지웅 작가가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의 투병기를 책으로 출판하려고 읽어보다가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아프고, 제일 불행한 사람 같아 보여서 삭제했다고.



나에게 혈액암과 같았던 일을 쓰려고 만들었던 연재 브런치북 호텔 헤르메스를 붕괴시켜 버린 것도 허지웅 작가가 원고를 버린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어려움 속에 있을 때는 죽을듯이 괴롭고 세상에서 내가 제일 억울하고 불행한 것 같지만, 상처가 아물고 한걸음 떨어져서 보면 누구나 그런 아픔 하나쯤은 다 있는 법이다.



낭떠러지에 떨어져 까마득한 절벽을 다시 기어올라가고 있는 것만 같던 그 시절, 일상의 모든 일이 다 두렵고 불행하게 여겨졌지만 그중에 최악의 상황은 비 오는 날 오토바이를 타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른 방법이 있었을 법도 한데, 그때는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 없었다.

빗물이 시야를 가리고 미끄러질 것 같은 두려움이 온몸의 세포를 곤두세워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지내다가 어느 날, 스스로 두려움에 맞서지 않으면 누구도 그 두려움에서 나를 구원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한 분명한 행동을 시작했다.

비닐로 된 싸구려 비옷과 장화, 빗물에 쉽게 습기가 차는 헬멧 대신에 재질이 좋고 비싼 비옷과 미끄럼 방지용 장화와 빗물에 시야가 가려지지 않도록 특수 코팅이 된 헬멧을 샀다.

장거리를 달려야 되어서 50cc에서 125cc로 바꾸고는 오토바이가 너무 큰 것 같이 느껴지는 것도 두려움의 큰 원인 중 하나라고 분석하고 오토바이 센터에 가서 거금을 들여 내 몸에 맞게 좌석 높이와 핸들을 튜닝했다.



비오는 날은 알바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돌아가는 길에 조금이라도 덜 젖은 옷을 입기 위해 빗물을 잘 털어서 말려놓았다.

엔진오일도 더 규칙적으로 보충하고 정기 점검도 잘 받았다. 그러다 오토바이 센터 사장과도 친해졌다. '누나, 누나' 하면서 커피도 사주고 자기 와이프랑 싸운 이야기도 하고, 아이 교육 문제에 대한 상담을 하기도 했다.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한 날은 미안한지 오토바이에 대한 정보도 많이 알려주고 정비비를 안 받기도 했다.



비 오는 날이 최악의 라이딩이라면 최고의 라이딩도 있었다. 맑고 화창한 날 바닷가를 달리는 것이다.

알바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사람이 거의 없는 바닷가를 달릴 때의 그 싱그러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것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불행이 하나 있으면 행복도 꼭 하나 있다.

그 행복은 어디있냐면 불행한 일을 떠올리면 행복한 일도 꼭 하나 생각해 내는데 있다.

이것이 불행할 수도 있는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다.

과거의 불행 보다 현재의 축복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폭풍우 치는 날 새벽, 두려움 속에서 나에게 힘을 주는 말을 기억해 냈다.

7년간의 유리드미를 마치는 마지막 수업 때 하이오 선생님께서 나에게 해주신 말씀을 떠올렸다.


쭁옥, 쮹쮹~!


선생님은 긴 두 팔을 하늘을 향해 뻗으시고는 미소를 머금고 말씀하셨다.

수업 때 마다 틀리더라도 주춤하지말고 과감하게 자신감있게 나아가라는 말씀을 많이 해주셨는데, 마지막 순간에 다시 한번 강조해주신 것이었다.



너는 재미있다. 아이들에게 좋다.
에리카 선생님


너는 빠르고, 영리하다.
샤롯데 선생님


좋은 당나귀였다. 너는 무대에서 다르다.
요란 선생님


그림의 느낌이 좋다. 계속하라.
마틴 선생님


예정옥 선생님, 좋아해요.
정수옥 선생님


선생님은 딱 예술가다.
이현진 선생님


예 샘 그만두면 나도 그만둔다.
한주미 선생님


걸어오는 소리만 들어도 선생님인 줄 알아요.
이정국 선생님


선생님이 제 인생에서 최고의 선생님이에요.
김혜경 선생님



한 말씀을 떠올리자, 다른 말들도 줄줄이 이어서 떠올랐다.

노트를 펼치고 떠오르는 말들을 적었다.

나의 좋은 점을 떠올리기 시작하자 두려움이 자신감으로,

자신감이 설렘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듯이 컴퓨터를 켜고 브런치 작가 신청을 했다.

두려움은 내가 누구인지 잊게 한다.

가장 어두울 때, 새벽이 밝아온다.



어둠 속에 앉아서 기억하라
내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를





You know better than I (내 길 더 잘 아시니) -이집트 왕자 2 :요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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