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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Oct 15. 2018

그 사랑, 꼭 해야 하나요?

맹목적이지 않다면 언젠가 사랑하겠지

작년 봄이었던가. <헌법의 풍경>이라는 책을 며칠간 읽었다. 주변에 추천하는 사람도 많고, 헌법이 담긴 풍경이라고 하니 제목부터 근사했다. 제목처럼 멋진 글을 쓴 저자 김두식 교수는 공감할 만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책에서 풀었다. 하지만 내가 지금 하고픈 이야기는 책에 대한 감상문이 아니라 책을 보며 떠올린 나의 몇 가지 경험담이다.

책의 본문 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국가를 사랑하지 말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국가에 대한 ‘사랑 표현’을 강제할 수는 없으며, 국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몇 배 더 중요한 것이 국가를 ‘통제’하는 일임을 강조하고 싶을 뿐입니다.” 이 얼마나 멋있고 각 잡힌, 군더더기 없는 주장인가. 내가 이 부분을 읽으며 떠올린 것은 유년시절과 최근의 경험이었다. 일단 먼 옛날인 유년시절로 달려 본다.


그러니까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몇 년 지났을 때니 아마 4~5학년쯤이었을 것이다. 이때의 세뇌교육이 얼마나 무섭냐면 매주 월요일 조회시간마다 외치던 국기에 대한 맹세를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외고 있다는 것이다.


그때의 맹세는 오로지 글자와 소리였다. 내용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당연히 저학년 때부터 외워야 하는 것이었다. 당시 내가 배우고 외웠던 맹세는 1974년 정해진 맹세의 내용이었는데, 그 내용이 무엇을 말하는지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외워 조회시간엔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며 외운 것을 입으로 토해내야 했다.


그런데 열 살이 넘어가면서부터 맹세의 내용이 끔찍해지는 것이었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이 부분을 욀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대체 나라의 영광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소중한 내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하는 걸까? 몸을 바은 마치 궂은 일을 해서 번 돈을 모두 나라에 헌납하고 집에 돌아와 거친 채소죽으로 연명하며 살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게 몹시 두려운 나머지 고민을 거듭한 끝에 담임 선생님께 여쭤봤다.

“선생님, 나라에 꼭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하나요?”

뜬금없는 질문에 선생님은 꽤 놀란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니?”

“국기에 대한 맹세요. 거기 나오잖아요.”


나의 대답에도 선생님의 놀란 표정을 좀체 풀어지지 않았다.

“그건 말이지. 애국하라는 뜻이야.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당연히 애국심을 가져야 해.”

“나라를 사랑해야 해요?”

“그럼, 당연하지.”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데 나라를 어떻게 사랑을 해요?”


선생님은 살짝 짜증 나는 얼굴로 대답했다.

“애국심은 그냥 다 있어야 하는 거야. 국민이라면 다 있는 거야.”

“태어날 때부터요?”

“그래, 태어날 때부터 애국심은 있는 거야. 이제 알겠지? 모르는 게 또 있으면 집에 가서 엄마랑 이야기해라.”


선생님의 시원치 못한 대답에 주눅이 들어 내 자리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하니 당시 선생님의 처신이 얼마나 무서운 거였는지 새삼 알 것 같다. 애국심은 당연한 게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애국심을 가진 아기라면 조금 무서울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어릴 적 선생님과 비슷한 반응을 지난해 여름 겪게 됐다. 당시 독서모임을 몇 군데 나가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모임에서 다 함께 대화하던 중에 국가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모임 구성원 중 한 명이 자신을 민족주의자라고 소개했다.


이때 내가 속으로만 놀라고 심기를 드러내지 않았더라면 그날의 집중포화는 없었을까? 나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솔직하게 내 생각을 말하고 말았다.

“민주화 이전까지는 민족주의가 민족을 구하는 데 큰 몫을 했지만, 지금의 민족주의는 변질된 부분도 많고 국가간 경계가 느슨해지면서 민족이라는 개념이 약해않았나요?”


모임 구성원들의 눈이 일제히 나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그녀들의 입은 내게 여러 가지 말로 사격을 시작했다.

“한민족이라면 당연히 우리 민족을 중시해야죠.”

“우리 민족의 한의 정서를 이해해야만 해요.”

“우리 부모님과 그들의 부모님, 또 할머니와 그들의 부모들이 살면서 고통받은 한의 정서를 이해하면 민족주의가 이해될 거예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당연히 애국심이 있어야 하고, 민족주의를 가져야죠.”


이런 말도 안 되는 저격을 당하고 있을 때, 한 명이 뭔가 떠올린 듯 내게 질문했다.

“그래도 올림픽 할 때 우리 선수가 이기면 감동스럽고, 지면 슬프고 그렇죠?”

나는 또 스스럼없이 답했다.

“아니요. 우리 선수가 져도 안 슬퍼요. 저는 그냥 잘 하는 선수가 이겼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우리 선수든 아니든 페어플레이하지 않은 상대 때문에 지면 그건 슬퍼요.”


올림픽 대답도 괜히 했나 싶을 정도로 다시 저격이 시작됐다.

“젊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오버하는 것 같군요.”

“올림픽 때는 무조건 우리 선수를 응원해야 해요.”

“민족에 대한 공부가 필요해 보이네요.”

괜히 말했어...

이런 종류의 설득을 한동안 당한 뒤에 다 함께 식사를 하고 집에 돌아왔다. 물론 밥은 평소의 절반도 먹지 못했다. 이날의 기분은 화가 날 정도의 단순함이 아니었다. 민족주의는 거대한 벽이자 어떤 설명으로도 유화되지 않는 고집으로 다가왔다.


무작정 애국심을 가져야 한다던 초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 한의 정서를 이해하고 올림픽 때 무조건 우리 선수를 응원하라고 강요하는 모임 구성원 모두 국가를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감정에 동요되지 않는 나는 다음부터 그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이랬던 내가 책을 읽다가 국가를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학자의 이야기를 들으니 내심 속이 시원했던 것이다. ‘왜 애국하지 않아도 되냐’는 질문에 대한 답과 ‘왜 애국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같다. 사상의 자유가 국가에 대한 맹목적 사랑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상의 자유가 몸속에 흐르는 혈류라면, 고지혈증이나 고혈압처럼 혈류를 방해하는 요소는 맹목적인 애국심과 같다. 피를 타고 산소가 내 몸속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듯,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자유를 누리며 살다가 내키면 나라를 사랑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책을 완독하고 마지막 장을 덮고 난 후의 느낌은 살얼음이 살짝 덮인 식혜를 벌컥벌컥 들이켠 것처럼 개운했다. 불쾌한 두 번의 기억이 아직 내게 남아있지만, 어쩐지 자유의 응원군을 얻은 이 기분 역시 오래도록 남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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