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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Dec 21. 2018

내 반지 가져요

지금은 사랑받고 살 것 같은 그 남자들

중학교 시절 친구들을 만난 날이었다. 결혼반지와 작은 귀걸이 외에 액세서리를 즐겨하지 않지만, 겨울철이면 왠지 손이 추워 보여 굵직한 반지를 끼고 나갈 때가 있다. 이날도 나는 손에 굵직하고 각기 모양이 다른 반지를 여러 개 끼고 나갔다. 친구들이 ‘이런 건 어디서 사느냐’며 너는 예전부터 예쁜 액세서리를 잘도 샀다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왔다. 


순간 떠오른 일이 있어 친구들에게 기억을 떠봤다. 

“얘들아, 예전에 그 꽃무늬로 장식된 화장품 브랜드 유행했잖아. 같은 장미무늬로 만들어진 거울도 유행하고.”

“아, 그렇지! 그것 유행했지.”

“거기 파우더 유명했잖아. 학생 때라 사기엔 좀 비싼데, 굳이 그거 사려고 엄청 애썼지.”

오, 다행히 친구들이 기억을 한다. 


“맞아, 맞아. 그리고 그 장미무늬로 액세서리도 꽤 나왔는데. 진품은 비싸니까 나 그 장미무늬 플라스틱 반지 이천 원 주고 사서 오래 끼고 다녔는데.”

“아, 맞아. 나 기억날 것 같아. 그게 뭐랄까 네가 입던 옷들이랑 잘 어울렸던 것도 같고.”

“내가 그 반지 한창 잘하고 다니다가 왜 안 끼고 다닌 줄 알아?”

그다음 이야기를 친구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다렸다. 나는 천천히 그 이야기를 꺼냈다. 


이야기 속 이천 원짜리 플라스틱 꽃반지는 대학시절 사서 졸업하고도 곧잘 끼고 다닌 물건이었다. 얼핏 보기엔 유치한데 핫핑크색 장미꽃과 검은색 링 부분이 묘하게 잘 어울렸다. 입고 다니는 옷에 어울리든 안 어울리든 그 반지를 두 번째 손가락에 곧잘 끼고 다녔다. 엄마는 애들 소꿉놀이 같다고 버리라고 했지만, 나는 그 꽃반지를 꽤나 좋아했다. 


졸업 후 어느 날 친했던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자신과 같은 연구실에 있는 후배를 소개해준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 내게 선배는 이런저런 설명을 늘어놓았다.

“얘가 되게 착해. 너 사람 외모만 따지고 그런 것 아니면 한 번 만나봐. 애가 정말 착하고 말이야, 음. 성실해. 마음이 참 착해. 내가 너한테 아무나 소개하겠니?”

“선배 말 대로면 되게 착하고 성실한데, 왜 여자 친구 없어? 왜 나한테 소개를 해?”


답을 얼버무리는 선배가 못 미더웠지만, 일단 고맙게 그 소개를 받기로 했다. 한 시간 넘게 단장을 하고 나간 소개팅 자리에는 내 취향과는 거리가 먼 외모의 그가 앉아 있었다. 키는 나보다 작았고, 나와 동갑 치고는 나이가 상당히 들어 보였다. 가수 조영남 씨를 빼다 박은 얼굴이었다. 나쁜 인상은 아니었다. 게다가 대화를 해보니 정말 착하고 재치 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매력이란 착하고 재치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 아닐까. 앉아서 이야기할수록 오랜만에 만난 동성친구 같다는 느낌이 강해졌다. 이성으로는 만날 수 없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애프터는 거절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설프게 여지를 남겨 불편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저녁 식사 후 차를 마시던 중 그는 내게 반지가 예쁘다며 말을 붙였다. 


“반지가 예쁘네요. 그렇게 큰 반지를 끼고 다니고.”

“아, 이거 되게 싼 거예요.”

“저 한 번 껴 봐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반지를 빼내어주니 손마디가 굵직한 그가 새끼손가락에 껴보고 재밌어했다. 그러고 나서 조금 더 이야기를 하다 집에 돌아갔다. 집에 돌아와 가방을 내려놓다가 반지를 돌려받지 않은 것을 알았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바로 그에게 전화가 왔다. 


“미안해요. 반지를 내가 끼고 와버렸네요. 다음에 만날 때 돌려줄게요.”

“괜찮아요. 비싼 것도 아니고 괜찮아요.”

“그래도 제가 껴보겠다고 잠시 빌린 건데 어떻게 그래요. 다음에 잠깐 밥이나 먹어요. 돌려  줄게요. 시간이나 장소는 제가 맞출게요.”


계속 돌려준다니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서 다음에 만나기로 했다. 확실히 선을 긋지 못한 것 같아 찜찜했지만 일단 한 번 더 만났다. 그렇게 다시 식사 약속을 하고 만난 그는 반지를 깜빡하고 두고 왔다고 했다. 괜찮다고 했는데 다음에 꼭 돌려준다고 한 번만 더 보자고 연락이 왔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난 날도 그는 반지를 가져오지 않았다. 


“진짜 미안해요. 내가 자꾸 깜빡하네요. 다음에 꼭 가져올게요. 정말 미안해요.”

“저기요.”

“네?”

“그 반지, 그냥 가지세요.”


안경 속 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반지 비싼 것도 아니고, 저 돌려받지 않아도 되니 그냥 가지세요.”

“화나셨어요? 정말 다음에 가져올 건데….”

“아니요! 아니요! 그냥 가지세요!”


허탈해하는 그에게 나는 인사를 하고 먼저 나왔다. 대학시절부터 몇 년을 끼고 다니던 플라스틱 반지와의 안녕, 착하지만 동성친구처럼 편하기만 했던 그도 안녕. 나중에 선배에게 듣자니 그가 며칠간 연구실에서 멍하니 그 반지만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본인 손가락에 들어가지도 않던 그 꽃반지를 말이다. 


까르르 하며 이야기를 듣던 친구 중 한 명도 비슷한 경험을 꺼냈다. 

“나도 그런 일 있었어. 나 예전에 큰 맘먹고 비싼 장갑을 샀거든. 얇은 장갑은 손이 너무 시려서 말이지. 그런데 그 무렵에 소개받은 남자 차에 그 장갑을 두고 내린 거야. 싫다는데 굳이 집에 데려다줬거든. 그 이후에 장갑 돌려준다면서 4번을 더 만났는데, 그때마다 두고 왔다는 거지. 장갑이 비싸서 웬만하면 돌려받고 싶었는데 도무지 안 되겠다 싶어서 나도 너처럼 말했어. 장갑, 그쪽이 끼세요.

그 남자도 손이 들어가지 않는 친구의 장갑을 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으려나. 생각해보면 웃기지만 마음에 드는 상대와 데이트하고 싶었던 그들의 여린 마음이 느껴졌다. 상대가 나를 마음에 안 들어하는 게 느껴지지만 한 번 더 기회를 잡아보고 싶은 마음. 데이트 신청이 차마 조심스러워 핑곗거리라도 찾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진가를 보이고 싶었던 다부진 마음가짐도 있지 않았을까. 


“그래도 그 남자들 지금 생각해보면 풋풋하지 않아?”

다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렇게 날 마음에 들어한 것도 얼마나 고마운 거야.”

“그런 추억이라도 있어야 좀 버틸 만하지. 나한테 이런 사람도 있었구나, 하면서.”

나 역시 오래전 그들의 마음이 고맙게 느껴졌다. 


지금은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좋은 아빠로, 누군가의 좋은 남편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타인을 조심스레 대하던 그들은 분명 좋은 가족 구성원이 돼있을 것이다. 언젠가 플라스틱 반지와 겨울장갑을 손에 쥐고 씁쓸해했을 그들이지만, 지금은 사랑받고 살기를 바란다. 내가 바라지 않아도 이미 사랑받으며 살고 있을 것 같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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