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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Dec 30. 2018

독감 수업

독감은 ‘독한 감기’가 아니었다.

세상에, 독감에 걸리고 말았다. 난생처음 독감이다. 그게 뭐 대수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나도 겪어보기 전엔 그랬으니 말이다. 그래 봤자 ‘감기’일 뿐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손을 꼽아보면 크리스마스를 앞둔 토요일부터 본격 독감의 시작이었다. 아침부터 목이 칼칼했다. 미용실 다녀오는 남편에게 부탁해 목감기 약을 하나 사서 먹었다. 사실 이마저도 내키진 않았다. 감기는 그저 귤이나 오렌지처럼 비타민 가득한 과일을 잘 챙겨 먹고 푹 자면 낫는 병이라 믿었고, 약이나 주사를 자주 몸에 들이면 면역력이 떨어지고 약물에 의존하게 될까 봐서였다.


그래도 목이 따가운 게 예사롭지 않아 목감기 약을 먹었는데 낫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일단 예정한 일정이 있어 두 번 약을 챙겨먹고 남편과 외출을 했는데 오후부터 몸에 기운이 쭉 빠지더니 속이 울렁거렸다.


이때만 해도 얼마나 우스운 생각을 했냐면, 남편과 VR 오락실에서 만리장성 게임을 한 탓인 줄 알았던 거다. VR이 어찌나 실감 나던지 실제로 중국의 긴 성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기분이었다. 좌석이 VR 영상에 맞춰 들썩거리는 놀이기구를 탄 덕에 내가 이렇게 기운이 빠진 건 아닐까, 그런 단순한 생각이 들었고 늦은 점심식사 후 급속도로 나빠진 컨디션으로 예정했던 영화는 보지도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본격 감기 증세에 돌입했다.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까지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버거워졌고 식사도 잘 넘길 수 없었다. 머리는 꽝꽝 울리고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목 안에는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듯 뜨거워졌다. 말을 하면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바람소리만 났다. 남편은 지금이라도 응급실에 가보자고 성화를 부렸다.

“여보, 지금이라도 병원 가보자. 그냥 감기가 아닌 것 같아.”

“됐어. 정 아프면 내일 집 앞 병원이나 다녀오지 뭐.”


이윽고 정 아파서 집 앞 병원을 찾게 된 월요일 아침, 때는 바로 크리스마스이브. 걸어서 5분 거리의 이비인후과를 가면서 나는 열두 고개를 넘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병원이 이렇게 멀었던가, 뛰어가면 3분 거리였는데 오늘은 왜 걸어도 걸어도 나오지 않는가.


이런 생각에 잠겨 찾은 병원에는 사람이 미어터지게 많았고 한 시간을 기다려 내 차례가 왔다. 진료실 들어가기 전 항상 간호사가 환자들의 체온을 잰다. 보통은 체온을 잰 후 몇 도라고 말해주거나, 정상이라고 해주는데 어쩐지 내 체온은 두 번 쟀다. 그리고 진료실에 들어갔더니 입 안과 코 속을 들여다보며 의사 선생님이 뭐라 뭐라 질문을 했다.

“지금 증상을 보면 독감 같은데요. 검사를 받아보시겠어요?”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가늘고 길쭉한 꼬챙이 같은 게 내 콧속으로 쑥 들어왔다. 얼마나 깊이 들어오는지 꼬챙이가 내 뒤통수를 찍고 턴 하는 게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게 수치스러웠다. 검사 후 5분쯤 후 다시 진료실에 들어오라 해서 들어갔다. 의사는 독감 검사 키트를 보여주며 내 상태를 말해줬다.


“독감입니다. 지금 체온이 38도가 넘어요. 오늘부터 5일간 타미플루 복용하면서 격리돼야 합니다. 가족들과 수건, 위생용품 다 따로 쓰시고 가족들과 접촉을 안 하는 게 가장 좋아요. 전염성이 강하니까 집안에서도 마스크 끼시고 외출은 안 하는 게 좋습니다.”

“잠시만요. 격리요?”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독한 감기쯤 걸렸는데 격리라니?


“제가 하는 일이 있어서 밖에도 다녀야 하고요. 그런데 격리면 사람 만나는 일이 안 된다는 건가요?”

“회사원이신가요?”

“아니요. 회사원은 아닌데 이번 주에 인터뷰가 잡혀 있어요. 그런 활동도 불가한가요?”

“인터뷰는 좀 위험하겠는데요. 대면 상태에서 전염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지금 체력도 굉장히 떨어진 상태라 외출은 위험합니다. 가능한 모든 활동을 쉬는 게 좋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왠지 무서운 타미플루와 감기약의 처방전을 받아 들고 나오면서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얼마나 무지했냐면 난 이날까지도 독감이 ‘독한 감기’의 약자라고 생각했다는 거다. 집에 돌아와 약을 먹고 누워 핸드폰으로 검색을 해봤다. 다들 나처럼 독한 감기와 독감을 동일시하는 사람이 많은 듯했다. 그런데 ‘독감’과 ‘감기’는 전혀 다른 거였다. 병원에 가지 않고 귤이나 까먹으며 버텼다면 자칫 목숨이 간당간당할 판이었다.


일단 목요일에 지방 취재가 잡힌 게 문제였다.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멀리 지방에 다녀오는 인터뷰였다. 게다가 일정 조율이 어려워 인터뷰이와 한 차례 일정을 미룬 건이었다. 담당자에게 연락해 상황을 설명했다. 담당자 입장에서는 얼마나 뜬금없는 소식일까. 그러면서도 속 시원히 일정을 미루거나 다른 작가를 섭외하기 어려웠는지 내게 애매한 메시지를 보냈다.

“작가님, 지금 다른 작가님 섭외가 안 되는데 수요일에 다시 이야기하면 어떨까요?”


물론 나 역시 독감을 독한 감기쯤으로 알고 있었던 터라 처음에는 일을 나가볼 생각이었지만, 막상 이렇게 회신을 받으니 조금 섭했다.

‘나 진짜 죽도록 아픈데 섭외 안 됐다고 예정대로 인터뷰 가자고 하면 조금 서운할 것 같아. 게다가 전염이라도 되면 어째. 그렇다고 이게 담당자의 잘못은 아니지. 나도 처음엔 그저 독한 감기라고 생각했는걸.’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눈이 시려서 한숨 자고 난 다음에는 서운한 감정과 더불어 미안한 감정이 앞섰다. 갑자기 일정을 조정하려니 담당자는 얼마나 애를 먹으려나. 이런저런 생각에 골몰하다보니 다른 독감 환자들은 어떻게 대처하나 궁금해졌다. 침대에 누워 검색을 해봤다. ‘독감 외출’, ‘독감 격리’, ‘독감 출근’ 이런 단어들로 검색을 해봤는데, 생각보다 각박한 독감 대응에 나는 기함하고 말았다.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정보에 따르면 대부분의 회사들이 직원이 독감에 걸려도 출근을 지시한다는 거였다. 병가나 연차를 내고 5일간 쉬는 사람도 있지만 극히 드물었다. 무지한 나처럼 독감을 ‘독한 감기’라 생각하며 감기인데 왜 엄살이냐, 감기 정도면 나와 일해도 된다는 상사와 오너의 지시에 온몸이 부서질 듯 아픈데도 직장에서 버틴다는 이야기들이었다.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쓰러지기를 반복하던 내 입장에서는 이런 상황이 몹시 잔인해 보였다.


하기야 내가 회사생활을 할 때만 해도 이런 문화가 당연하긴 했다. 어느 날 몹시 아파서 회사에 전화를 걸어 쉬고 싶다고 말했더니 상사는 “회사에 와서 아픈 걸 증명하라.”고 했다. 너무 억울했지만 택시로 회사 건물에 도착해 거의 기다시피 사무실에 도착했더니 “아파 죽을 것 같아도 회사에 와서 죽어야 한다.”며 병원에 다녀와서 근무하라고, 대신 지각처리는 면해주겠다며 선심 쓰듯 말한 상사를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뿐인가. 언젠가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하고 인천에서 서울로 출퇴근하게 된 상황에서 잠시 쉬고 싶다고 했더니 회사는 붐비는 시간을 피해 한 시간 늦게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라며 또한 선심 쓰듯 대했다. 한 시간 늦게 출근한들 1호선 전철이 한가할 리 없었고, 악명 높은 신도림역에서 환승하며 걸음이 온전치 못했던 내가 당한 수많은 고통은 모두 열거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회사에 도착해 “월급이 깎이더라도 병가를 내거나 퇴사를 하겠다.”고 질러버리자 마지못해 회사에서는 내가 출근한 날짜만큼의 급여만 주겠다며 며칠 쉬는 것을 허락했다. 결국 나는 회사에 오만정이 떨어져 다리가 나은 다음 사표를 내버렸다. 사표를 냈더니 그제야 사장은 “자네 아플 때 서운하게 굴어 미안하다.”며 붙잡았지만 사표를 도로 집어넣을 만큼 나를 위로하진 못했다.

검색으로 알게 된 사례들 중 무조건 출근하라는 회사에 복수하겠다며 사람들 앞에서 기침해서 독감을 퍼뜨리겠다고 울분을 토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복수의 일념으로 미운 상사 앞에서 일부러 입을 벌리고 기침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퍽 우습기도 슬프기도 하고, 그래도 전염시키는 건 나쁘지 않나 싶어 갸웃거리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며 요즘도 회사들이 이러냐고 물었다.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 덧붙였다.

“여긴 한국이잖아.”


어떤 설명보다도 짧고 분명한 이유, 한국의 조직문화에서는 아파 죽을 것 같아도 자리를 메꾸고 있어야 성실한 직원으로 인정받는다는 말이었다. ‘정상출근’이라는 밋밋한 단어는 사실 굉장히 추상적이면서 매섭다는 걸 실감케 했다.


콜록대며 알게 된 사회 속 불편한 감정과 독감이라는 병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게 돼 나는 이 며칠간 ‘독감 수업’을 들었다고 정의했다. 어디서 얻어온 건지 짐작도 잘 가지 않는 질병을 앓게 된 탓에 나는 여전히 불편하고 서러운 조직문화를 회상했고, 독감을 독한 감기쯤으로 낮춰보며 한숨 자고 나면 나을 병으로 착각했던 나의 얕은 지식이 부끄러워진 5일간의 독감 수업. 다사다난했던 올해의 가장 큰 액땜으로 기억할 듯싶다.      



안녕하세요, 브런치의 소중한 독자 여러분!

올해의 마지막 글을 올리며 간단히 인사말을 적어봅니다.


일단 지금은 격리에서 해방된 상태고요. 합병증이 와서 완치는 조금 더 걸릴 것 같아요.
결국 취재는 못 갔습니다. 저 때문에 담당자분이 2배로 고생하셔서 미안할 따름이지요. 친구는 독감 걸려서 7kg 빠졌다는데(!) 저는 살은 안 빠지고, 까마귀가 쓸고 간 밭처럼 피폐함만 얻었습니다 ;ㅁ; 골골골


요즘 독감 환자가 많다고 해요. 이 치밀한 바이러스는 잠시 빗장을 풀어둔 우리의 몸과 마음에 침투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독감 걸리기 싫다고 사람을 안 만날 수 없고, 학교나 직장에 안 나갈 수도 없으니까요. 길을 걷다가 걸릴 수도 있고, 슈퍼에서 물건을 고르다 걸릴 수도 있죠.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숨어있다가 척하니 달라붙는 이런 바이러스는 더불어 사는 사회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다고 볼 수밖에요. 그렇지만 우리는 더불어 살 수밖에 없죠. 그래서 언제든 또 독감에 걸릴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 섬뜻했답니다.

그러니 독자분들도 모쪼록 건강 조심하셨으면 해요.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구독이라는 선으로 이어진 미약하지만 믿음직한 이 관계에 많이 고맙습니다.

새해에도 공감하며 함께 웃는 작가와 독자로 지낼 수 있길 바라 봅니다.


얼마 남지 않은 2018년 잘 마무리하시고,

올해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 2019년이 펼쳐지길 기원하겠습니다.


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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