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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Jan 11. 2019

그 꽃 함부로 꺾지 말라

왜 약자에게 폭력이 당연한가

연초부터 불길한 소식이 휘감았다. 국가 대표 선수의 오랜 성폭력 피해 소식이었다. 기사와 변호인의 인터뷰 영상을 보며 기가 차고 몸이 부르르 떨렸다. 어떤 이유로도 납득 어려운 범죄 중에는 성폭력, 그중에서도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폭력에 그 지독성이 있다. 


가만 생각해보면 그 선수가 찍힌 경기 영상이나 인터뷰 영상에서 웃는 얼굴을 본 기억이 없다. 주로 보였던 얼굴은 빨갛게 상기된 얼굴에 수수한 차림으로 등장해 질문에 답을 하는 모습이었다. 이와 대조되는 모습은 포털 사이트에 등록된 프로필 사진이다. 평소 어두운 얼굴을 했던 선수는 프로필 사진에서만큼은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 스물두 살은 이런 얼굴 아니었던가. 성인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만큼 세상에는 겪어보고 즐길 일이 도처에 쌓여 있고, 새로운 재미를 탐색하고, 나이를 가득 먹어도 추억할 만한 일을 쌓아두는 나이, 그런 시기. 그래서 현실과 대조되도록 화사하게 웃는 그 선수의 프로필 사진은 아리따운 나이의 표상이자 동시에 가장 슬픈 상흔으로 보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언론사들은 선수가 피해 입은 사실을 노골적으로 제목에 써가면서 자극적인 기사를 시시각각 토해냈다. 네티즌은 또 어떤가. 선수의 외모를 평가하거나 자극적인 기사를 골라보는 이들도 숱할 것이다. 네티즌의 전반은 가해자를 욕하고 있었지만,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에 눈에 가는 건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자세가 아닐지도 모른다. 


예상대로 가해자를 엄벌해달라는 청원이 시작됐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선수의 피해사실을 자극적으로 쓴 기사를 안 봤는지, 그런 기사를 비판했는지 궁금해졌다. 오죽하면 실시간 검색어에 피해자의 이름에 ‘성폭행’이라는 단어가 붙어 여러 날 올라와 있었겠는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대중들의 속살이 궁금할 따름이다. 


이 사건은 지난한 고소와 항소가 뒤섞여 몇 년을 질질 끌어간 후에야 결말이 날 것이다. 거듭되는 항소에 징역이 줄고, 혹여나 집행유예라도 되는 끔찍한 결말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죄가 세상 밖으로 드러나면 더욱 인정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 아마 가해자는 하루하루 뻔뻔함을 갱신할 게 분명하다. 그럴 때마다 또다시 자극적으로 제목을 뽑는 언론사가 있을 것이고, 그 가십을 보며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누군가도 있을 것이다. 


관련 기관에서는 누군가 책임을 진다고 옷을 벗을 것 같다. 고질적인 병폐는 고치지도 못하고 제대로 알지 못했다며 억울하단 표정을 지으며 한두 명이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지만, 조직 전체의 질환은 고치기 어려울 거라 생각된다. 그러니까 징역 몇 년, 누군가의 퇴사로 해결될 일이 아닐 만큼 심각하고 지독한 사건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고 사람들은 ‘체육계는 왜 저러냐’, ‘또 그 연맹이냐’, ‘이래서 그 체육회가 문제야’ 등의 반응을 보였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조금 의아하기도 하다. 불만과 성토와 함께 누군가를 탓하면서도 어쩌면 우리 내면에는 그 오랜 행태가 당연하게 인식된 건 아닐까? 


내 오랜 친구의 동생은 중고등학교 시절 야구를 했다. 고등학교는 야구 명문이었다. 그 학교는 시에서 야구를 정말 잘하는 아이들이 들어간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친구의 동생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야구를 그만뒀다는 거다. 야구로 대학에 가고 프로선수가 되고 싶었다고 들었는데, 어찌 된 일일까. 

“하도 맞고 오니까 아빠가 참다못해 그만두라고 했어. 처음엔 참으라고 했는데 정말 심각했어. 매일 같이 얻어터져서 오니까. 그렇게 맞아가면서 야구인생 사느니 그만두라고 했지. 지금은 아빠랑 헬스장 개업하려고 준비해.”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공연한 정보 ‘체육계는 폐쇄적이고 폭력이 만연하다’를 실물로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전하던 친구와 나의 맹점은 ‘왜 체육계에서는 당연하게 폭력을 쓰는가’에 의문을 제기하고 항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너무나 야박하게도 체육계는 ‘원래’ 그렇다면서 한숨 쉬고, 비판하면서도 ‘왜 고쳐지지 않는가?’에 열렬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번 소식을 접하며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들이 오랜 병폐를 고치지 못하고 당연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시초는 아마 본능적으로 약자를 판가름하고 나보다 약하거나 아랫사람에게 막대해도 된다는 관념 때문 아닐까? 


체육계 못지않게 그런 관념은 도처에 있다. 회사에서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당연하게 반말을 하고, 잘못하면 윽박지르는 경우가 많다. 어렵사리 취직한 신입사원들은 꾸역꾸역 참아낸다. 과거 비뚤어진 부모들은 자녀에게 당연하게 손찌검을 했다. ‘다 네가 잘 되라는 뜻’이라며 폭력을 포장하고, 본인의 기분과 기준에 어긋날 땐 ‘버르장머리를 고친다’는 명목으로 때렸다. 일부 교사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체육계는 원래 그렇다’는 비난보다 ‘왜 약자에게 폭력이 당연한가’를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일시적인 서명과 댓글로 화를 내는 대신 보다 장기적이고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동참했으면 한다. 예를 들어 덴마크의 경우 성인 1인당 평균 4개의 조합에 가입하고 사회, 정치, 복지 등의 문제에 의견을 제시하고 함께 개선하기 위한 활동에 참여한다. 댓글을 쓰고 분통을 터뜨리는 대신 행동을 보태는 그들의 자세에 감동한 적 있다. 피해 선수 입장에서는 자신을 지지하고 응원해주고 대신 화내 주는 여론도 감사하겠지만, 문제 해결에 끝까지 동참하고 사회 곳곳에 만연한 폭력을 없애는 행동에 더 감사할 거라 생각한다. 


피해 선수에겐 열일곱 살부터 4년간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 나의 열일곱을 떠올려봤다. 열일곱,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머릿속에 학교를 마치면 떡볶이를 먹을까, 짜장면을 먹을까 고민하느라 바빴다. 패션잡지를 사서 좋은 부록을 받고 싶어 안달복달을 했고, 친구들과 교환일기를 쓰며 깔깔거리던 나이였다. 


열일곱은 그런 나이다. 상상조차 어려운 모진 폭력을 당하기엔 너무나 여리고 순백한 나이. 누구에게도 그 청초함을 꺾을 권한은 없다. 진로에 필요한 무언가를 가르치는 입장 역시 꺾을 자격은 없다. 여린 인생, 여린 그 꽃은 누구도 꺾으면 안 되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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