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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Jan 28. 2019

수다만은 떨고 싶지 않아

우린 결코 쓸 데 없는 이야기를 마구 떨어대지 않는다

무심코 하는 말 중에 한 번씩 목구멍에 걸려드는 게 있다. 불쾌하다거나 화가 날 정도의 걸려듦은 아니지만 포도를 먹다가 씨앗을 넘기는 느낌이라든가, 바삭하게 구운 만두를 먹다가 탄 부분의 씁쓸함이 느껴질 때처럼 불현듯 다가오는 걸려듦이 있다. 그 걸려듦엔 ‘수다’라는 이름이 있다.


나쁜 뜻을 가진 단어가 아니다. 아주 일상적인 행위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수다’가 켁, 하고 걸려드는 걸까? 아마 수다를 ‘떨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 수다는 떤다고 표현한다.


‘오래간만에 수다를 떨었다’ 거나 ‘오늘 수다타임’이라든가, ‘수다 좀 떨자’라든가 수다에는 떨었다는 말이 착 달라붙는다. 책상 밑에서 다리를 달달 떠는 것도 별로 안 좋아했던 나는 좋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과정을 굳이 수다라는 이름으로 떨어 버리는 게 영 내키지 않는다.

사전에 수다를 검색해보면 ‘쓸 데 없이 말수가 많음’이라고 설명한다. 많은 사람들이 수다를 떤다고 표현하는 그 순간에는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들이 많고 반드시 실용적인 대화만 주고받는 게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그 이야기들이 아주 쓸 데가 없이 말수가 많은 건가, 하고 생각해보면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


서로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털어놓으며 공감하고, 몰랐던 살림 정보를 알아내 생활에 적용하기도 하고, 다른 가정은 이런 면이 있구나 하며 우리 가정의 어떤 면에 골몰해지기도 하는 이야기들이다. 그게 어찌 쓸 데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또 하나 찜찜한 부분이 있다면 수다를 떤다는 사람들이 유독 나이 든 여성에 집중돼 있어서다. 나이를 뉘엿뉘엿 먹고 있는 여성들이 모여 대화를 하는 모습을 ‘아줌마들 모여서 수다 떤다.’고 표현하는 경우는 언제든 흔하다.


하지만 나이를 뉘엿뉘엿 먹고 있는 남성들이 모여 대화를 할 때는 수다를 떤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쓸 데 없이 말 수가 많은 것은 아닐 것이고, 비록 남성들이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비교적 덜 드러낸다고 해서 그들이 어딘가 쓸 데 있는 대화를 한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아줌마=수다’라는 공식이 만연한 게 수다에 씁쓸해지는 이유다.


예전에 함께 일했던 언니가 남편에 대해 털어놓은 적 있다. 임신과 동시에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 셋을 키우느라 외출하는 것조차 어려웠던 언니였다. 마침 내가 언니가 사는 도시에 갈 일이 있어 연락을 했다. 나와의 만남이 오랜만이기도 했고, 바깥출입이 간절했던 언니는 퇴근 후 아이들을 잠시 맡아달라고 남편에게 부탁을 했다. 그런데 남편에게선 싸늘한 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근처 사는 아줌마 만나서 수다나 떨어. 누구 만나고 싶으면 근처 사는 사람이랑 연락해서 만나.”


언니는 남편이 아이들을 돌봐주는 것을 귀찮아하는 것에 분개했지만, 나는 다른 면에서 분개했다. 기혼여성은 아무나 만나서 쓸 데 없는 말을 늘어놓기만 하면 되는 걸까? 추억을 공유한 옛 동료와 이야기하는 것보다 가까운 데 사는 누군가와 대낮에 적당히 수다만 떨면 그만이라는 심산이 고까웠다.


수다라는 게 그렇게 값어치가 떨어지는 건가 싶어 더욱 수다라는 걸 떨기 싫어졌다. 혹여나 타인과 갈등하기 싫어서 웃으며 말하고, 어색함이 싫어서 이런저런 말이라도 꺼내는 사람의 배려가 수다를 달달 떠는 것으로 왜곡된다면 삭막하더라도 말을 아끼는 게 낫다 싶었다.

며칠 전, 인근에서 함께 독서모임을 하는 언니들을 집에 초대했다. 우리는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눴고, 다가올 명절 계획과 집 정리와 요리에 대한 각자의 요령을 공유했다. 약 3시간 정도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우리는 잠시나마 각자의 역할에서 놓여나 홀가분함을 느낄 수 있었고, 집에 돌아가 따뜻하게 가족을 맞이할 에너지를 충전했다.


그 시간을 굳이 ‘수다’라며 쓸 데 없는 시간으로 낮춰 말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대화를 나눴고, 좋은 감정을 공유했을 뿐이다. 이날 나는 수다를 떤 적이 없다. 우린 결코 쓸 데 없는 이야기를 마구 떨어대지 않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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