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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Feb 25. 2019

무릎에 바람들다

가장 매력적이었던 시절을 보내줄 준비를 해야겠다.

어릴 때부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 버릇이 쭉 이어졌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랬다. 학교에도 일찍 갔다. 그건 집이 싫으니까 도망치듯 간 거라 치더라도, 성인이 되고 나서는 약간의 강박이 있었다. 잠을 자는 시간이 아까웠다. 자는 시간을 아껴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성인이 되고서도 7시 전에는 무조건 일어났다. 하루에 6시간 이상 자면 게으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던 대학 시절부터 기자생활을 하던 20대 후반까지 하루에 4시간 이상 잔 적이 별로 없었다. 어쩌다 주말에 늦잠을 자도 일요일부터 나는 다시 업무 모드로 돌아가곤 했다. 습관인지, 체질인지. 나는 잠이 없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자신을 ‘아침잠 없는 사람’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그랬던 내가 요즘 아침에 못 일어난다. 침대 위에서 시계를 보며 “일어나야 해.”를 중얼대다 기묘한 자세로 다시 잠들곤 한다. 매일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좀체 버티지를 못한다. 일어나더라도 한 시간 정도는 가수면 상태로 멍하다.


멍하니 보내거나 다시 잠드는 날은 오전 시간이 너무 아깝다. 남편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간단하게 정리했다.

“여보가 무의식 중에 프리랜서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아닐까? 프리랜서니까 어딘가 메여있지 않고 편안한 거야. 난 더 자도 된다고 인지하고 있을지 모르지.”


그런데 나는 아침에 자는 시간이 아까워 화가 날 지경이었다. 아침에 늦잠을 자버리면 오후에는 뭔가 성과를 낼만한 일을 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무의식과 의식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해도, 이건 불일치가 너무 심하지 않은가.


대체 왜 아침이 이렇게 힘든 걸까. 이유를 찾기 위해 달라진 점을 하나씩 생각해봤다. 생각하다 보니 달라진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오래도록 고수하던 생활습관에 조금씩 변화가 왔다.


언제부턴가 기름진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는다. 위가 나빠진 것도 있지만, 어느 날부턴가 그토록 좋아하던 튀김을 몇 개 넘기지 못하겠다. 스무 살 무렵부터 주 1회 치킨을 지켜오던 내가 최근에는 치킨 먹기가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다. 껍데기 붙은 삼겹살을 철판에 구워 먹는 것을 그리 좋아했는데, 이제는 고기를 먹자고 하면 하나도 반갑지가 않다.

식성의 변화는 김치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김치를 안 먹었다. 맛있다고 전혀 느끼지 못했다. 김치 없으면 밥 못 먹는다는 가족들 사이에 나만 혼자 편식을 했다. 물론 김치전이나 찌개는 잘 먹었지만, 김치 없이 30여 년을 잘 먹고 잘 살던 내가 작년부터는 김치가 없으면 속이 개운치 않았다. 김치가 떨어지면 당장 주문부터 하는 낯선 나를 만나게 됐다.


옷은 또 어떠한가. 외출할 때면 엄마가 쫓아 나와 옷 갈아입으라고 성화할 정도로 나는 짧은 치마와 반바지를 즐겨 입었다. 다리에 천이 휘감고 있는 느낌이 별로여서인지 짧은 옷을 좋아했다. 대학을 졸업하며 다이어트에 성공한 것도 자신감에 일조했다. 노출증이라고 손가락질받을 수준은 아니었으니 억측은 삼가 달라.


그런데 언제부턴가 짧은 옷을 입으면 되게 안 어울렸다. 얼굴이 말하는 나의 이미지와 몸에 걸친 옷이 말하는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평소 잘 어울리던 파스텔톤의 옷은 나를 부하게 만들었고, 빈곤해 보인다며 안 입던 검은 옷은 어느새 조화롭게 휘감았다.


20대 시절부터 즐겨 입던 짧은 치마와 반바지들이 몇 년씩 서랍에 있던 것을 이사 오면서 과감히 버렸다. 그리고 산 옷들은 전부 무릎을 넘는 길이의 치마와 긴 바지였다. 어느 날, 인터넷 서핑 중 마음에 쏙 드는 원피스를 발견했다. 내 키에 조금 짧은 느낌의 길이였지만, 지금 안  사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구입했다.


배달받은 원피스를 입어봤다. 왠지 옷은 톡톡 튀고 예쁜데, 얼굴과 따로 노는 기분이란. 거울 앞에서 잠시 고민했다.

‘내가 한동안 너무 점잖게 입어서 지금 어색해 보이는 걸까?’

‘그래, 자꾸 점잖고 긴 옷만 입으면 점점 그렇게만 입게 될 거야. 이미지 개선을 위해 가끔 이런 옷도 괜찮겠지.’

‘결혼하고 살이 쪄서 예전보다 덜 예뻐 보이는 걸까? 역시 살을 빼야겠어.’


반품하려던 마음을 접고, 다음날 그 원피스를 입고 외출을 했다. 약속 장소로 향하던 길에 나는 “이건 아니야.”라고 중얼거렸다. 짧은 원피스는 내 나이에, 얼굴에 안 맞기도 했지만 아주 중요한 걸림돌이 있었다. 무릎이 시렸던 것이다.


내 무릎은 대체 몇 살이기에 짧은 치마 좀 입었다고 이렇게 찬바람이 새는 걸까. 약속 장소를 향해 10분쯤 걸었는데 무릎이 너무 시렸다. 누가 내 무릎에만 에어컨을 튼 것 같았다. 오래간만에 신은 높은 통굽구두도 한몫했다. 먼저 도착한 카페에서 친구들을 기다리며 무릎담요를 찾았다. 무릎담요로 무릎을 싸매고 앉아 뜨끈한 허브티를 마셨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친구들을 만나 차를 마시고 식사할 곳을 찾아다니자며 나섰다. 거리를 십 분쯤 걸었으려나. 나는 못 참고 친구들에게 SOS를 쳤다.

“저기, 얘들아. 우리 어디든 빨리 들어가서 먹으면 어떨까?”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실은 내가 말이지. 무릎이 시려.”


친구들은 일제히 내 무릎을 쳐다보더니 깔깔거리고 웃었다.

“야, 너 몰랐냐? 원래 우리 나이에 짧은 거 입으면 무릎에 바람 드는 거야.

“뭔 소리야. 우리 나이에도 짧은 거 다들 잘 입거든?”

“우리 나이가 보통 나이인 줄 알아? 입고 싶어도 못 입는 게 더 많아진다고. 이제 그만 포기하시지!”

긴 바지에, 긴치마에 잘 싸매고 나온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철딱서니가 되고 말았다. 그날 이후 원피스는 다시 세상 구경을 못 했으니, 친구들 말이 틀린 건 없었다.


언젠가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이런 부분을 읽은 적 있다.

예전에 마거릿에게 들은 말인데, 여자는 자신이 가장 매력적이었던 시절의 헤어스타일을 늙어서까지도 고수하는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과감히 쳐내는 게 두렵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더는 어울리지 않는 스타일에 줄곧 매달리는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몸은 자꾸 제 나이 값을 하느라 신호를 보내는데, 나는 거기에 부응하기 싫어 떼를 쓰는 모양이다. 이제 잠을 더 이상 줄이면 안 된다고, 기름진 음식을 먹기에 소화기관이 버텨주질 않는다고, 무릎을 따뜻하게 해줘야 한다고 몸이 자꾸 전보를 친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이십 대의 모습, 가장 빛나던 시절의 나를 지키려 부단하다. 여기서 더 부단해지면 안쓰러워질 테니, 이제 그만 포기해야겠다. 올해로 서른 하고도 일곱을 덧붙이면서 나는 젊음의 흔적을 조금은 포기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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