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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Apr 12. 2019

현실부부의 보험

우리 부부의 미래와 노후를 그려본 시간

“네 남편 보험은 있대?”

“뭐? 뭐가 있냐고?”

결혼 직후, 친구들과 대화 중 생각지 못한 ‘보험’이란 단어가 툭 튀어 올랐다. 내 남편에게 보험이 있냐는 사적이면서도 생소한 질문에 나는 솔직히 ‘모른다.’고 답했다. 그런 내게 친구들이 당장 보험 여부부터 알아보라고 한 마디씩 했다.


“당장 아프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가족 중에 누가 아프면 정말 막막해져. 보험은 당연히 있어야지.”

“아니면 보험에 가입돼 있는데 네가 모르는 거 아냐?”


정답은 마지막 질문에 있었다. 당시 나는 남편이 보험에 가입돼 있는지조차 몰랐다. 물어본 적이 없었다. 가입이 돼있는지, 보험이라곤 4대 보험이 전부인지 말을 꺼내본 적이 없었다. 건강한 내 남편이 혹여나 아픈 상황은 상상해본 적도 없고 상상하기도 싫었다. 하지만 가족이라면 응당 챙길 수 있는 부분이긴 했다. 


나는 대학교 졸업 직후에 보험 2개에 가입했다. 예상치 못한 질환이 찾아왔을 때 파산이라도 할까 두려워서였다. 내 몸 하나 챙기는 보험은 자유롭게 가입했지만, 결혼 상대자에게 그걸 물어보는 건 어쩐지 지나친 간섭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 내 남편인데,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그래, 내 남편 일이잖아. 생각지 못한 보험이라는 화두를 듣고 집에 돌아가는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거실에서 뒹굴 거리는 남편을 보자마자 보험을 물었다.

“여보, 보험 있어?”

놀라는 기색도 없이 남편은 대답했다.

“응, 있지.”

“어디? 어디 보험사에 어떤 거야?”

“회사에 있어.”

보험과 일절 관련 없는 회사에 다니는 남편이 회사에 보험이 있다는 모호한 답을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회사에서 직원들 보험 들어둔 게 있어. 직원이 수술받거나 많이 아프면 의료비 나온대.”

“모든 질병을 보상받을 수 있는 거야?”

“모르겠는데.”

“그리고 퇴사하면 그런 보험 하나 없는 거 아냐?”

“나 건강해서 괜찮을걸.”


아이고, 이제라도 물어보지 않았으면 해맑은 내 남편은 보험 하나 없이 지낼 뻔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보험 걱정이 내 발등에 횃불을 놓았다.


다음날부터 나는 남편의 보험 가입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보험설계사 일을 했던 큰언니와 며칠 동안 이야기를 하며 보험 가입에 필요한 것들을 정리하고, 몇 군데 보험사에 견적을 요청했다. 당시 다녔던 회사의 상사가 보험설계를 할 수 있는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어 몇 시간에 걸쳐 강의(?)를 들으며 보험 공부도 했다.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설계사를 만나 상품설명을 들어봤고, 인터넷에서 가입이 가능한 다이렉트 상품 설명도 들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유부녀로서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견적을 요청한 보험사 중 한 군데서 전화가 걸려왔을 때였다. 친구들 중에 그 보험사의 상품에 가입한 이들이 많았고, 큰 이슈 없이 건실하게 운영되는 것 같아 긍정적으로 고려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견적을 요청한 지 몇 시간 안 돼 걸려온 전화에 생각지 못한 소식이 있었다.

“저희 회사에 남편분 보험이 이미 가입돼 있어요.”

“저는 가입한 적이 없는데요?”

“어릴 때 부모님이 가입하신 것 같아요.”


보험사에서는 남편 앞으로 이미 수년간 납입된 보험 설계서를 보내줬다. 정말로 남편의 10대 시절 가입돼 꾸준히 보험료가 납입된 상태였다. 납입기간은 약 3년 정도 남은 상태였다. 상품 설계도 좋았다. 다른 보험사 상품과 비교해보니 보장이 꽤 알차고 괜찮았다. 내가 필요로 했던 요소들이 모두 들어가 있는 완벽한 리스트였다.


다만 걸리는 게 있다면 그 보험의 납입을 시부모님이 하고 계셨기 때문에 보험을 계속 유지할지, 해지할지 등의 결정권이 시부모님에게 있었다. 가능하다면 이미 납입한 보험에 특약만 추가하고 싶었지만 그 결정권은 우리에게 없었다. 다시 말해 부모로부터 완전한 경제독립을 결정할 순간을 마주한 것이다.


그 보험의 존재 여부를 모른 척하며 시부모님이 계속 보험료를 내고 언젠가 남편이 보장을 받아도 되지만 이미 결혼해 새 가정을 꾸린 입장에서 그 ‘모른 척’이 내키지 않았다. 부모님이 먼저 제안한다면 모를까, 대뜸 나서서 그동안 보험료 내주셨지만 남은 3년간 우리가 보험료를 내고 그 보장을 챙기고 싶다 주장하는 것도 이상했다. 결혼 후에도 각종 요금을 부모님의 계좌에 남기고 캥거루처럼 지내는 이들의 얘기는 종종 접해왔으나, 나는 독립된 가정을 일구기 위해 행동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


결국 남편과 수차례 의논 끝에 시부모님이 납입하고 있는 보험과 별개로 다른 보험사에 가입하기로 결정했다. 이제와 돌이켜 보면 이 결정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시부모님은 남편 앞으로 가입된 보험의 만기 1년을 앞두고 해지한 뒤 그 돈으로 투자를 시작하셨다. 어차피 우리 부부 소유가 아닌 돈을 우리의 몫으로 탐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이로써 나는 경제적으로든 뭐든 시부모님께 보다 당당해질 수 있었다.


그 결정 이후 또 하나 얻은 깨달음은 우리 부부의 미래와 노후를 그려볼 시간을 만났다는 사실이다. 서로를 아끼고 보호하며 잘 살겠다는 마음뿐이었지 우리는 노후를 구체적으로 그려본 적이 없었다. 둘 다 자신의 직업을 좋아하고, 오래 일하고 싶고, 건강하고 즐겁게 살자는 데 동의는 했지만 구체적인 미래를 떠올려본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만약 내가 큰 병에 걸려 일을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값비싼 검사와 수술이 필요한데 혹여나 망설여진다면? 그 망설임으로 삶이 비루해진다면 지켜보는 남편의 마음은 어떨까? 그런 구체적인 미래를 상상하며 ‘현실부부’의 간을 볼 수 있었다.

보험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내가 건강한데 보험이 뭐가 필요하냐?”며 시큰둥했던 남편도 함께 노후를 상상하고 진지하게 본인과 나의 건강을 생각하게 됐다. 그 덕에 최종 결정을 앞둔 설계사와의 미팅에는 남편도 적극 참석했고, 궁금했던 점을 미리 메모했다가 물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남편의 새 보험을 가입했다.


보험은 말 그대로 보험이다.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일, 그 걱정에 매달 돈을 쓰는 행위, 걱정이 많으면 가짓수가 많아지고, 가짓수가 많다한들 건강하다면 영향을 받지 않을 금융상품의 하나일 뿐이다. 있으면 좋고, 없다 해도 세상이 무너질 일은 아니라는 것.


그래서 가장 좋은 보험은 자신의 건강을 등한시하지 않는 태도 아닐까. 언젠가 내가 아프면 가슴 아파할 남편을 상상하고, 혹여나 남편이 아프면 엉엉 울어버릴 것 같은 내 모습을 상상하며 배우자에게 힘겨운 시간을 떠넘기지 않도록 건강을 다듬은 태도. 그것이야말로 제일 값진 보험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부부는 값진 보험 활동을 몇 년째 이어가고 있다. 일주일에 두세 번 유산소와 근력 운동, 레토르트보다는 신선재료로 만든 건강한 음식, 술 마시는 횟수를 제한하고, 아픈 기미가 있으면 늦추지 않고 병원부터 들러보기.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보험’이란 단어가 드러난 날부터 시작된 현실부부의 보험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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