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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Mar 28. 2019

결혼의 흔적, 선물과 축의금

냉장고와 청소기는 언제 받아갈 거야?

한참 결혼식 참석이 잦았던 때가 있다. 친구들의 결혼이 거의 매주 잡혀있던 20대 후반부터 직장 동료의 결혼식까지 드문드문 잡혀 수도권의 웬만한 예식장 구경은 두루 해봤던 시절. 


그때 축의금을 내며 나도 돌려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든 적이 많았다. 사이가 좋을 땐 종종 얼굴을 보고 예식에 참석도 하지만 결혼하면 연락이 똑 끊겨 얼굴 한 번 보는 것도, 예식에 초대하는 것도 애매하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나 역시 예식을 치르고 정리를 해보니 대체적으로 낸 만큼 돌려받았지만 못 받은 케이스도 상당히 많았다. 결혼한다고 연락까지야 어떻게든 하지만 상대가 축의를 하지 않는다 해서 “나는 네게 축의를 했는데 넌 왜 안 하니?”라고 따질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받아내는 건 ‘축의’가 아니니까.


어쨌든 이런 상황은 상대가 꼭 나빠서라기 보단 세월이 흐름에 따라 희미해진 우정이라든가, 소홀해진 인간관계의 주머니에서 알맹이가 솔솔 빠져버린 탓이려나. 이런 일이 많다고 워낙 자주 들어왔기에 각오는 했지만, 결혼과 동시에 인간관계의 실체가 드러나고 상처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우리 부부가 결혼할 때 내 나이 서른둘, 남편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당시 내 친구들은 거의 결혼을 한 상태였고 미혼은 나와 친구 두어 명이 전부였다. 결혼 후 육아에 바쁜 친구들 중에는 서로의 바뀐 전화번호를 모르는 경우도 많았고 연락이 닿는 친구들은 거의 축의나 선물을 해줬다. 

남편의 친구가 선물해준 원목 책장. 색이 조금씩 짙어감에 따라 함께 한 세월이 느껴진다.

이때 축의나 선물의 금액은 서로 생각하는 친밀도에 비례한다고나 할까. 친밀함을 금액으로 환산할 수야 없다만, 서로 생각하는 친분에 어울리는 액수를 건네게 된다. 친구들과 직장동료의 다수는 현금으로 축의를 했고, 필요한 물품을 물어보고 사주는 경우도 있었다. 


친한 사이에는 선물로 주는 경우가 많다고들 해서 리스트를 미리 뽑아놓은 적 있는데, 상대가 금액대를 말하면 수월한 반면 액수를 먼저 언급하지 않으면 얼마짜리를 말해야 할지 대략 난감하다. 


예를 들어 결혼 소식을 들은 친구가 “이십만 원 정도에서 갖고 싶은 거 말해봐.”라고 하면 리스트를 보고 20만 원을 넘지 않는 물품을 말하면 된다. 문제는 이런 종류의 대화였다. 

“어머, 결혼 축하해.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봐.”

“음, 필요한 것들이 있긴 한데 어떤 걸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냥 아무거나 갖고 싶은 거 말해봐.”

“어느 정도로?”

“그냥 아무거나.”


상대의 호의는 느껴지지만 비싼 걸 말했다가 당황시킬까 봐 조심스럽고, 너무 적은 금액의 선물을 말했다가 상대가 ‘얘는 나와의 관계를 이 정도로 생각하는구나.’하고 탄식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실제로 나보다 몇 살 어린 동생에게 비싼 걸 말하기 미안해서 3만 원대의 선물을 말했더니 정색하며 “언니, 이건 너무 적은 거 아니에요?”라고 말하기에 무안한 적 있었다. 


어쨌든 끙끙거리며 대답한 결과 여러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중학교 시절 친구들이 사준 예쁜 러그는 여전히 우리 집 거실을 장식하고, 회사 친구들이 사준 커피머신은 나의 소중한 생필품이다. 친구가 통 크게 사준 냉장고가 의기양양 주방에 서있고, 집들이 날 한 친구가 끙끙거리며 들고 온 제 몸의 반쯤 되는 화분은 분갈이를 거듭하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대학교 때 친구가 선물해준 질 좋은 침대 매트는 아무리 빨아도 견고함을 유지하고, 그 밖에도 크고 작은 생활용품들이 여전히 집에서 제 몫을 한다. 

남편 친구들의 선물도 집 곳곳에서 분발하고 있다. 친구들이 돈을 모아 사준 에어컨 덕에 우리 부부는 여름을 난다. 신혼 초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던 남편의 몸무게를 재던 체중계는 집에 놀러 온 남편의 친구가 “예쁜 것을 찾다가 실패했다.”며 내민 선물이었다. 나의 부실한 베이킹을 받아내는 미니오븐과 전자레인지, 세탁기도 그의 친구들이 건넨 고마운 선물이었다. 게다가 당시 남편 친구들 중에는 학생도 다수 있었으니, 그 정성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그래서 집을 둘러보면 고마운 흔적이 구석구석 남아있다. 예상하기에 나는 결혼 20주년, 30주년이 지나고 금혼식을 치르는 날까지도 이 물건들을 곁에 두지 않을까. 혹여 온통 고장 나거나 손 쓸 수 없이 낡아 버리는 순간을 만나면 눈물이라도 나지 싶다. 그 마음들을, 그 고마운 흔적들을 버리는 건 상상조차 어려운 이별이다. 


내 경우는 먼저 준 선물과 축의금을 ‘회수’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남편은 친구들 중에 거의 첫 결혼이었고 돌려줄 일이 많은 축의들이었다. 언젠가 좋은 반려자를 만나 결혼 소식을 전해오면 기꺼이 성의를 전할 수 있는 약속의 흔적들이었다. 그래서 종종 결혼 소식이 들려오면 그리 반갑다. 


오늘 남편은 대학교 시절 친구들과의 저녁 모임에 나갔다. 그중 한 명이 다음 달에 결혼을 한단다. 오래 사귄 여자 친구와 올봄에 결혼한다고 들었는데, 드디어 날도 잡고 어엿하게 청첩장도 전해준다고 해서 나갔다. 그 친구들이 돈을 모아 사준 에어컨이 올여름도 우리 부부를 시원하게 해 줄 것임을 알기에 다음 달이면 우리는 그만큼의 축의를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돌려줄 수 있음이 얼마나 기쁨이고, 기분 좋은 지출인지 그 부부도 훗날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해보니 이것도 결혼선물이었다! 칼세트 친구분도 분발하시길!

그리고 주제넘은 걱정일 수도 있는데 우리에게 냉장고를 사준 친구청소기를 사준 친구가 고가의 가전을 사줬음에도 불구하고 결혼할 기미가 안 보인다. 두 친구 모두 결혼 생각이 간절하니 금방 돌려줄 수 있는 축의일 줄 알았건만, 내가 결혼 5년 차에 접어드는 동안에도 영 소식이 없다. 언젠가 다른 방식으로 성의를 보여줄 수야 있겠지만, 이왕이면 결혼선물로 돌려주고 싶은 내 마음이 주책인 건 알고 있다. 


어쩌다 냉장고를 청소하거나 식재료를 쟁여놓을 때면 ‘냉장고, 이 녀석은 결혼선물 언제 받아가려고 이러나.’ 싶고, 왱왱거리며 청소기를 돌릴 때 ‘청소기, 이 친구 청소기를 돌려받을 수는 있을까’ 궁금하다. 냉장고 친구가 썸 타는 이야기를 전하며 연애를 고민할 땐 나도 모르게 “야, 썸 좀 그만 하고 연애를 해. 연애를.”이러고 잔소리를 하지 않나, 청소기 친구가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들었을 때 “올해도 청소기 받기 글렀네.”라며 탄식을 하지 않나. 내가 나서서 소개팅 주선도 해봤지만 결과는 시원치 않았다. 


참견과 잔소리가 버무려진 내 모습이 주제를 넘을까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한 번씩 그들 걱정을 사서 한다. 특히 오늘처럼 남편이 청첩장을 받는다며 외출을 하는 뒷모습을 본 날은 더더욱 냉장고 친구와 청소기 친구 생각이 간절하다. 냉장고와 청소기, 올해도 분발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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