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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Mar 07. 2019

초보주부의 졸업시험

여전히 어려운 고르기와 다듬기

예전 글에도 썼지만 장을 보러 가서 풍성한 야채들을 보면 기분이 좋다. 첫 신혼집 동네에 있던 야채가게에서는 매일 아침 트럭에서 야채를 내리는 풍경을 목격할 수 있었는데, 방금까지 밭에서 자던 야채들이 실려 온 것 같아서 왠지 믿음이 갔다.


벌써 요리를 하고 장을 보며 산 지 4년이 넘었다. 결혼 직후 남편과 가사분담을 했는데 남편은 청결 담당, 나는 요리와 물품 구입, 자금 관리 등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니 식재료를 잘 사는 것도 내 역할이다.


몇 년째 장을 보니 시금치나 나물의 잎사귀에 누런 잎이 없는 게 좋고, 양파는 무르지 않고 단단한 게 좋다는 정도까진 알겠다. 그런데 그 이상의 지식은 좀체 쌓이지 않는다. 좋은 야채와 과일 고르는 게 여전히 어렵단 말이다.


한 번은 멜론이 먹고 싶어서 사 왔다. 도마 위에 놓고 큰 칼을 쑥 집어넣는 순간 달콤한 냄새에 조금 시큼한 냄새가 섞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상한 건가? 일단 마저 칼질을 해 멜론을 열었다. 안의 씨 부분이 옅은 갈색을 띠고 있었다. 상한 건지 괜찮은 건지 알 수 없어서 남편을 소환해 함께 멜론을 내려다봤다. 남편도 나와 다를 바 없이 아는 게 없었다.

“여보, 이거 상한 걸까?”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일단 한 입 먹어볼까?”


가운데를 조금 썰어 한입씩 먹어본 뒤 우리는 심각한 표정으로 멜론을 비닐에 담아 버렸다. 못 먹을 멜론이었다. 하지만 누구를 탓하겠는가. 수많은 멜론을 쌓아놓고 파는 마트에서는 모를 만도 하고, 겉으로 멀쩡해 보여 사온 나도 어쩔 수 없다.

한 번 더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남편과 외출 후 돌아오는 길, 거리의 과일 노점을 만났다. 바구니에 담아놓고 파는 과일이 먹음직스러웠다. 초여름이었다. 노점에 다가가 기웃거리니 푸근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았다.

“참외가 아주 달아. 이거 한 바구니 사가면 금방 먹을 거야. 두 바구니 사면 천 원 빼줄게.”


2인 가구니까 야채나 과일을 많이 살 수는 없다. 우리는 노란 참외를 한 바구니 사 왔다. 집에 도착해 냉장고에 넣어두고 저녁에 꺼내 슥슥 껍질을 벗겨 접시에 담았다. 남편과 하나씩 입에 넣고 참외를 씹다 생각했다. 내가 무를 사 왔던가?


무맛이 나는 참외였다. 적어도 씨 부분은 달아야 하는데 밍밍한 맛이었다. 남편도 한 개를 먹고 나더니 포크를 내려놓았다.

“여보, 참외가 참 맛이 없다.”

“아주머니가 달다고 한 그 참외는 다른 집 참외인가 봐.”

아주머니 부추기는 통에 두 바구니 샀으면 어쩔 뻔했나.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무맛이 나는 참외는 양이 많아 버리기도 애매해서 한동안 나를 고통에 빠뜨렸다.


얼마 전엔 사과를 샀는데 어디서 격하게 싸우고 왔는지 온몸이 멍투성이였다. 분명 겉으로는 빤질빤질 예쁜 사과였는데 말이다. 야채와 과일 고르기는 어쩜 이렇게 어려운 걸까? 몇 년을 해봐도 아직 모르겠다. 야채와 과일 앞에서 나는 몇 년째 고배를 마신 고시생이다.


일단 괜찮은 야채와 과일을 사 와도 다음 관문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바로 야채 다듬기다. 과일은 껍질만 벗긴다 치더라도 야채 다듬기는 몇 년째 해도 속도가 늘지 않고 버리는 게 더 많다.


엄마는 열무를 금방 다듬어 김치도 하고, 나물도 슥슥 다듬어 무쳐주시곤 했는데 내가 야채를 다듬기 시작하면 해가 저문다. 오후에 시작한 나물 다듬기는 해가 다 져야 끝났다. 서서 하는 게 힘들어서 식탁 위에 펼쳐놓고 나물을 다듬기 시작하면 온 집안이 흙투성이가 되기도 했다.

한 번은 꾀를 좀 부려봤다. 다듬기의 고난도, 냉이를 사 온 날이었다. 냉이 된장국이 몹시 먹고 싶어 냉이를 사 왔는데, 다듬기가 만만치 않다. 예전에 냉이 한 봉지를 사서 두 시간 동안 다듬느라 허리가 아팠던 기억이 났다. 퇴근 중이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집에 손님이 왔어.”

“응? 누구?”

“냉이라는 손님이야. 냉이가 여보랑 악수하려고 기다리고 있어.”


냉이 한 줄기를 들고 현관에서 남편을 맞았다. 강제로 남편과 악수를 시킨 후 냉이 다듬기를 의뢰했다. 남편은 내내 툴툴거리며 냉이를 다듬었다. 한참을 냉이와 악수를 한 남편은 냉이 쟁반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외쳤다.

“다신 냉이 사지 마!”


야채 못지않게 어려운 관문은 해산물 다듬기다. 신혼 초에 마트에서 오징어를 주문했다. 오징어볶음을 하면 맛있겠거니, 생각하며 집에 도착한 오징어를 열었다. 세상에, 오징어 눈이 그렇게 큰 줄 미처 몰랐다. 사람 눈 마냥 까맣고 큰 눈의 오징어가 나를 노려봤다.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유튜브로 ‘오징어 다듬기’를 검색해 한참 쳐다본 후 다듬기를 시작했다. 비닐장갑을 끼고 가위와 칼을 준비한 뒤 싱크대에서 오징어의 멱살을 잡았다. 몸통 안에서 내장을 분리하라는데 미끈거리고 잘 안 돼서 가위를 갖다 댔다.


찍! 망했다. 먹물이 터져버렸다. 뽀얀 오징어살 위에 검은 먹물이 번졌다. 그 아래 보이는 오징어의 눈은 여전히 괴기스러웠고, 입은 또 왜 이렇게 큰 걸까. 껍질은 왜 이렇게 안 벗겨지는지. 그날 긴장한 채로 오징어를 다듬고는 다음날까지 어깨가 결렸다.

생선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생선이란 그냥 씻어서 굽는 건 줄 알았다. 시장에 갔다가 생선가게 아주머니의 말에 홀려 조기를 샀다. 비늘의 존재를 몰랐던 나는 조기에게 공격당했다.조개 해감도 몇 번을 실패했다. 해산물의 세계는 너무 가혹했다. 


그다음부터 해산물은 손질된 것으로 산다. 손질된 오징어와 생선은 조금 날씬한 감이 있고, 손질된 조개류는 가격대도 높은 편이다. 하지만 해산물 손질은 여전히 무섭다. 얼마 전 칫솔질을 해가며  꽃게 손질을 했다는 지인의 말에 나는 박수까지 쳤다.


이렇게 어려운 채소와 과일 고르기, 다듬기를 마주할 때마다 아무렇지 않게 슥슥 해내는 엄마들이 얼마나 대단해 보이는지 모른다. 결혼 전 무심하게 먹었던 오징어볶음이, 여름철 과일이, 수북하게 쌓아놓고 먹던 생선구이가 어떤 시행착오를 거쳐 상에 올라오는지 몰랐던 시절들이다.  


이 어려운 과정들을 뚝딱 해낼 정도가 되면 나는 만렙 주부가 되는 걸까. 채소와 과일 고르기, 채소와 해산물 다듬기는 초보주부인 내게 마치 졸업시험과 같다. 이것을 잘 해내면 초보주부를 졸업하고 “나 이 정도로 컸어!”라고 자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졸업은 먼 훗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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